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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ganized Resident Demands and Institutional Responses: The Operation and Limits of Social Accountability in the Manila South Commuter Railway Project in the Philippines

필리핀 마닐라 남부 통근열차 사업에서 나타난 사회적 책무성의 작동과 한계

dahye Kim**

** 전북대학교 동남아연구소 전임연구원, Jeonbuk National University, dahye1215@gmail.com

Published: July 2026·Vol. 91, No. 45권 2호·pp. 179-210

DOI: https://doi.org/10.33334/sieas.2026.45.2.179

Abstract

This study examines involuntary resettlement in the Manila South Commuter Railway Project in the Philippines, supported by Korea’s Economic Development Cooperation Fund (EDCF), from the perspective of social accountability developed by Jonathan Fox. Rather than treating residents affected by development projects primarily as passive victims, the study conceptualizes them as active actors capable of making claims and demanding accountability. It analyzes how residents organized their demands, the channels through which those demands were conveyed, the role of civil society as interlocutors, and the institutional responses that emerged in both the recipient and donor countries.

The findings show that affected residents transformed individual grievances arising from forced relocation into organized, rights-based demands concerning housing, livelihoods, access to information, meaningful consultation, and relocation within or near the city. They pursued vertical channels by making claims directly on Philippine government agencies and political institutions, while also extending their demands beyond the recipient country through external channels directed toward the Korean government and aid institutions. Civil society organizations in the Philippines and Korea supported residents’ organizing, connected their claims to institutional arenas, and brought their concerns into public debate, thereby functioning as interlocutors that amplified residents’ Voice.

These organized demands helped activate accountability mechanisms in both the Philippines and Korea and led to partial institutional responses, including the temporary suspension of evictions, changes in relocation procedures, and the review and monitoring of resettlement plans and living conditions. However, these responses were not sustained through consistent policy implementation, effective remedy, or the restoration of residents’ livelihoods and living conditions. However, these responses were not sustained through consistent policy implementation or effective remedy, and residents continued to experience livelihood insecurity and poor living conditions after distant relocation. These limitations resulted from the diffusion of response responsibility across multiple actors, the priority placed on national development and infrastructure expansion in the recipient country, constraints on its financial and implementation capacity, and the donor country’s emphasis on the project’s economic and technical viability over its social impacts, together with inadequate accountability mechanisms.

The case demonstrates that organized Voice can serve as a critical trigger for social accountability in international development cooperation. Yet Voice alone does not guarantee substantive rights protection. For residents’ demands to lead to meaningful and sustained outcomes, institutional Teeth must also be capable of translating those demands into policy adjustment, implementation, corrective action, and remedy across both recipient and donor contexts.

Keywords:social accountabilityinternational development cooperationofficial development assistance(ODA)involuntary resettlementorganized VoicePhilippines
Funding: 대한민국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 (NRF-2025S1A5C2A02022370)

이 연구는 2025년 대한민국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NRF-2025S1A5C2A02022370). 또한, 본 연구의 일부는 박사학위논문을 수정 보완한 것이며, 세심한 검토와 제언을 해주신 심사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Ⅰ. 들어가면서

국제개발협력은 다양한 행위자가 서로 다른 권한과 이해관계를 가지고 참여하는 다층적 구조 속에서 이루어진다. 공여국 정부, 협력국 정부, 원조기관, 민간기업, 국제기구, 시민사회 등이 사업의 기획과 집행에 관여하지만, 정작 사업에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는 협력국 주민들은 의사결정 과정에 소외되기 쉽다. 특히 인프라 개발사업의 경우 토지 수용, 비자발적 이주, 생계 기반의 상실과 같은 문제가 발생할 수 있으며 이때 사업의 영향을 받는 주민들이 충분한 정보를 제공받고 자신들의 요구를 제기하며 그 요구에 대해 권한을 가진 행위자들이 어떻게 응답하는가는 개발협력의 책무성을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기존 국제개발협력의 책무성 논의는 주로 공여국과 국제기구 차원의 상호책무성(mutual accountability) 체계 구축, 원조기관의 성과 평가와 보고의무 그리고 세이프가드(safeguard)와 같은 피해 예방 절차에 초점을 맞추어 왔다(Grant and Keohane 2005; Kim 2019; Mahn 2017; 정법모 2017). 이러한 논의는 어떠한 제도적 장치를 통해 책무성을 확보할 것인가를 설명하는 데 기여하였지만, 사업의 영향을 받은 주민들이 스스로 요구를 형성하고 전달하는 과정, 그리고 이러한 요구가 협력국과 공여국 정부의 대응으로 이어지는 메커니즘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였다. 최근에는 NGO와 인도주의 분야를 중심으로 수혜자에 대한 ‘하향적 책무성(downward accountability)’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으나(Noble et al. 2025), 이 역시 주민들이 스스로 어떻게 행위자로 구성하고 요구를 제기하는지보다는 참여, 피드백, 제도적 절차의 작동 여부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다.

또한 협력국 참여자와 주인의식이 강조되는 흐름 속에서도 협력국 행위자가 실제 개발협력 현장에서 자신을 어떻게 인식하고 행동하는지에 대한 연구는 제한적으로 이루어져 왔다(Baran 2022). 그 결과 협력국 주민들은 여전히 개발사업의 피해자 또는 보호의 대상으로 설명되는 경우가 많으며 책무성을 요구하는 적극적 행위자로 분석되는 경우는 제한적이다.

본 연구는 이러한 논의의 한계를 바탕으로 협력국 주민을 개발협력사업의 수동적 피해자가 아니라 책무성을 요구하는 주체적 행위자로 바라본다. 또한, 책무성을 제도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주민들의 조직화된 요구와 이에 대한 제도적 응답이 결합되는 과정으로 이해한다. 이러한 시각은 공식 제도만이 아니라 주민과 주민조직의 집합적 요구가 어떻게 권한 행사 주체의 응답을 이끌어내는가에 주목하는 사회적 책무성(social accountability) 논의와 맞닿아 있으며, 본 연구는 주민의 ‘조직화된 요구(voice)’와 ‘제도적 응답 능력(teeth)’의 결합을 강조하는 폭스(Fox 2015)의 사회적 책무성 논의를 분석틀로 삼는다.

이러한 시각에서 본 연구는 필리핀 마닐라 남부 통근열차 사업(South Manila Commuter Rail Project, 이하 사우스레일 사업)을 분석사례로 삼는다. 이 사업은 한국의 공적개발원조(Official Development Assistance, 이하 ODA) 가운데 대외경제협력기금(Economic Development Cooperation Fund, 이하 EDCF)을 통해 추진된 유상원조 사업으로, 사업 과정에서 대규모 비자발적 이주 문제가 발생하였다. 이 사례에서는 주민들이 자신들의 요구를 조직화하고 다양한 경로를 통해 전달한 과정뿐 아니라 이에 대한 필리핀 정부와 한국 정부의 부분적 응답과 그 한계도 함께 확인된다.

특히, 이 과정에서 아시아브릿지와 필리핀 도시빈민운동 단체들은 현지 주민조직과 한국 시민사회를 연결하였고, 참여연대를 비롯한 한국 시민사회단체들은 현지조사, 공론화, 정보공개 및 정책 개선 요구 등을 통해 필리핀 주민들의 요구를 한국의 정책・공론장으로 전달하였다. 이들은 주민들이 형성한 요구가 공여국의 정책 공간으로 이동할 수 있도록 매개한 초국적 중간자(interlocutor)로 기능하였다. 따라서 사우스레일 사례는 주민들의 조직화된 요구, 제도적 응답 능력의 가능성과 한계, 그리고 초국적 중간자의 역할이 함께 드러난다는 점에서 폭스(Fox 2015)의 사회적 책무성 논의를 적용하기에 적합한 사례이다.

이 사례는 한국 개발협력에서 협력국 주민의 요구가 공여국 사회에서 공론화된 초기 사례로 평가된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사우스레일 사업이 알려지기 이전까지 한국의 ODA 정책은 협력국 개발지원과 한국 기업의 해외 진출을 동시에 도모하는 정책 수단으로 인식되는 경향이 강했다(강신영 외 2008). 그러나 공여국 지원으로 추진된 사업으로 인해 협력국 주민들의 생계와 주거 기반이 훼손되는 문제가 발생하고 이 사실이 한국 시민사회를 통해 공론화되면서 개발협력이 ‘누구를 위해, 어떤 책임 아래 수행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시민사회, 국회, 정부 차원에서 본격적으로 제기되었다(Jung 2014). 이러한 점에서 사우스레일 사업은 한국 개발협력에서 주민보호, 사회・환경적 영향 검토, 공여국 책무성의 필요성이 가시화된 초기 사례로서 의미를 갖는다.

본 연구의 질문은 다음과 같다. 첫째, 비자발적 이주의 영향을 받은 주민들은 어떻게 자신들의 요구를 조직화하였는가? 둘째, 이들의 요구는 어떠한 경로를 통해 협력국과 공여국의 행위자들에게 전달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초국적 중간자들은 어떠한 역할을 수행하였는가? 셋째, 이러한 요구에 대해 필리핀 정부와 한국 정부는 어떻게 응답하였으며 그 응답은 어떠한 조건 속에서 제한적으로 작동하였는가?

본 연구는 2000년대 중후반에 발생한 사우스레일 사업의 비자발적 이주 갈등을 문헌자료와 공개 자료를 바탕으로 분석하는 질적 사례연구이다. 분석 자료로는 사우스레일 이주 현장에서 장기 참여관찰과 심층 면담을 수행한 선행연구들, 국가인권위원회의 공식 조사자료, 한국과 필리핀 시민사회단체의 보고서 및 성명서, 필리핀 현지 언론과 시민사회단체의 아카이브 자료 등을 활용하였다. 이러한 자료들을 교차 검토함으로써 주민 요구의 형성과 전달, 해당 요구가 협력국과 공여국의 정책・공론장으로 확장되는 과정, 그리고 이에 대한 양국 정부의 응답과 한계를 분석하였다.

본 연구는 단일 사례를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분석 결과를 다른 개발협력 사업이나 협력국의 맥락에 곧바로 일반화하기 어렵다. 또한 사건 당시 주민과 관련 행위자의 경험과 인식을 직접 확인하기보다 기존 자료에 기록된 내용을 중심으로 분석하므로, 자료에 포착되지 않은 관점이나 행위 동기를 충분히 규명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본 논문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Ⅱ장에서는 책무성의 개념과 국제개발협력의 다층적 구조를 검토하고 사회적 책무성 논의를 바탕으로 분석틀을 제시한다. Ⅲ장에서는 필리핀 마닐라 남부 통근 열차 사업의 추진 배경과 비자발적 이주 정책의 주요 쟁점을 살펴본다. Ⅳ장에서는 이주 대상 주민들이 어떻게 조직화된 요구를 형성하고 이를 다양한 경로를 통해 전달하였는지 분석한다. 특히 주민들의 요구가 필리핀 내부에 머무르지 않고 한국 시민사회와의 연대를 통해 공여국의 정책・공론장으로 확장되는 과정을 초국적 중간자의 역할에 주목하여 살펴본다. Ⅴ장에서는 주민들의 요구에 대한 필리핀 정부와 한국 정부의 대응을 검토하고 양국 정부의 제도적 응답 능력이 왜 제한적으로 작동하였는지를 분석한다. 마지막으로 Ⅵ장에서는 분석 결과를 정리하고 국제개발협력에서 사회적 책무성이 실질적으로 작동하기 위한 조건과 한국 개발협력 정책에 대한 함의를 제시한다.

Ⅱ. 국제개발협력의 다층적 구조와 사회적 책무성

1. 책무성의 개념과 구성요소

책무성(accountability)은 권한을 위임받은 주체가 자신의 결정과 행동에 대해 감시자에게 설명하고 정당화하며 필요한 경우 시정이나 제재를 수용하는 관계를 의미한다. 기존 연구들은 정보 제공(information), 설명(answerability) 또는 정당화(justifying), 대응성(responsiveness), 제재 가능성(enforceability) 등의 요소를 포함하는 개념으로 이해해 왔다(Schedler 1999; Mulgan 2000; Bovens 2007; Fox 2015). 이러한 점에서 책무성은 특정 행위나 결과가 발생한 이후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가’를 묻는 책임(responsibility)과 구분된다(김태균 2018, 56).

<표 1>은 책임과 책무성의 개념적 차이를 도표화한 것이다. 먼저 초점 측면에서 책임은 행위자 개인의 양심과 도덕적 판단이 작동하는 내부적 측면에 놓이는 반면, 책무성은 행위자가 감시자와 맺는 관계 및 그 관계에서 요구되는 절차와 같은 외부적 측면에 놓인다(Mulgan 2000). 이를 구성하는 핵심 요소 역시 다르게 나타나는데 책임의 경우 행위자의 양심, 도덕적 판단, 전문적 재량이 핵심이 되는 반면, 책무성의 경우 행위자가 감시자에게 자신의 행위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설명하며 정당화할 의무를 지고, 감시자는 이에 대해 질문하고 판단하며 필요한 경우 제재를 가할 수 있는 관계와 절차가 핵심이 된다(Bovens 2007). 이러한 차이는 결국 책임이 결과가 발생한 이후 그 귀속을 묻는 사후적 개념인 반면, 책무성은 권한의 위임 관계가 지속되는 동안 상시적으로 작동하는 과정적 개념이라는 점으로 이어진다.

<표 1> 책임과 책무성의 개념적 차이

구분 책임(responsibility) 책무성(accountability)
초점 내부적(internal) 측면 외부적(external) 측면
핵심요소 핵위자의 양심, 도덕적 판단, 재량 등 정보제공, 설명과 응답, 제재 가능성 등 관계 및 절차
작동시점 사후적 귀속 과정적・관계적
핵심질문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가? 누구에게, 어떻게 설명하고 응답하는가?

*Mulgan(2000), Bovens(2007) 참조하여 저자 재구성

책무성 관계는 권한을 위임한 주체와 권한을 행사하는 주체가 동일한 정치 공동체 안에 존재할 때 비교적 명확하게 작동할 수 있다. 그러나 국제개발협력에서는 권한 행사와 그 영향이 국경을 넘어 분산되기 때문에 책무성을 요구하고 응답하는 관계가 보다 복잡하게 구성된다. 이 경우 권한을 행사하는 주체와 그 결정의 영향을 받는 주체가 일치하지 않으며 책무성을 요구할 수 있는 경로 또한 단일하지 않다. 따라서 국제개발협력에서 책무성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일반적인 위임 관계를 넘어 복수의 행위자와 경로 속에서 책무성 요구가 어떻게 형성되고 전달되며 이에 대한 응답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2. 국제개발협력의 다층적 구조와 책무성 요구 경로

국제개발협력은 협력국 정부, 공여국 정부, 원조기관, 민간기업, 국제기구, 시민사회 그리고 사업의 영향을 받는 주민들이 함께 관여하는 다층적 구조 속에서 이루어진다. 특히, 인프라 개발사업에서는 공여국의 재원 제공, 협력국의 정책 결정, 원조기관의 사업 승인과 관리, 기업의 사업 수행, 지방정부의 집행과 이주대책이 결합된다. 이처럼 사업의 기획, 재원조달, 집행, 이주대책, 사후관리가 여러 행위자에게 분산될 경우 누구에게 어떤 책무성을 요구할 수 있는지가 불명확해질 수 있다.

이러한 다층적 행위자 구조는 책무성 요구의 귀속과 전달 경로를 동시에 복잡하게 만든다. 국내 정책의 경우 권한을 위임한 주인(principal)인 시민이 권한을 행사하는 대리인(agent)에게 비교적 직접적으로 책무성을 요구할 수 있다(Grant and Keohane 2005). 그러나 국제개발협력에서는 권한을 위임한 주체, 권한을 행사하는 주체, 사업의 영향을 받는 주체가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공여국 정부와 원조기관은 자국의 시민과 의회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아 ODA 정책을 수행하지만, 그 정책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주체는 협력국 주민이다. 반대로 협력국 주민들은 개발사업으로 인해 이주, 생계 상실, 주거 불안정과 같은 영향을 경험하면서도 공여국 정부나 원조기관을 선거와 같은 방식으로 직접 통제하기 어렵다(김태균 2018).

따라서 국제개발협력에서 책무성 문제는 단순히 ‘누가 책임이 있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사업의 영향을 받은 주민들의 요구가 어떤 경로를 통해 권한 행사 주체에게 전달되고, 그 요구가 어떤 제도적 응답으로 이어지는가의 문제로 나타난다. 본 연구는 이러한 책무성 요구의 경로를 수직적(vertical), 수평적(horizontal), 외부적(external) 경로로 구분한다.

첫째, 수직적 경로는 권한을 위임한 주체가 권한을 행사하는 주체에게 설명과 정당화를 요구하는 전통적 책무성 관계에 기초한다(Mulgan 2000). 일반적으로 국민이 선거, 청원, 의회, 행정 절차 등을 통해 정부나 정치적 대표자에게 책무성을 요구하는 관계가 이에 해당한다. 국제개발협력 맥락에서 협력국 주민들은 협력국 내 지방정부, 입법부, 행정부 등 제도권 정치과정을 활용하여 자신들의 요구를 공적 의제로 제기할 수 있다.

둘째, 수평적 경로는 국가 기관들 사이의 상호 견제와 감시에 기반한 책무성 관계로 입법・행정・사법기관 간의 견제, 감사기구나 인권기구와 같은 독립기관의 감시 등이 이에 해당한다(O’Donnell 1998). 이는 주민들이 직접 요구를 제기하는 경로라기보다, 주민들의 책무성 요구에 의회, 감사기구 등 제도적 감시 주체가 행정부나 집행기관을 견제하고 조사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시민사회, 언론, 종교계 등 비국가 행위자도 정보 제공과 문제 제기를 통해 주민 요구를 사회적으로 가시화하고 제도적 감시의 작동을 촉진할 수 있다(Fox 2015).

셋째, 외부적 경로는 책무성을 요구하는 주체와 권한을 행사하는 주체가 서로 다른 정치 공동체에 속해 있어 직접적인 통제 수단을 갖지 못하는 경우에 중요해지는 경로이다. 국제개발협력 맥락에서 살펴보면 협력국 주민들은 공여국의 원조 정책이나 개발사업으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만, 공여국 정부를 선거와 같이 정치과정을 통해 통제하거나 직접 제재할 수 없다. 그럼에도 공여국의 재원과 정책 결정이 사업 추진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치는 경우, 주민들은 시민사회, 국제기구, 언론, 초국적 네트워크 등을 매개로 공여국 정부와 원조기관에 설명과 응답을 요구할 수 있다(Grant and Keohane 2005; Kim 2019). 이 점에서 외부적 경로는 협력국 주민의 요구가 공여국의 정책・공론장으로 확장되는 과정을 분석하는 데 중요하다. 이상에서 논의한 세 가지 경로의 특징을 사우스레일 사례에 적용하여 정리하면 <표 2>와 같다.

<표 2> 책무성 요구 경로의 유형과 사례 적용

구분 수직적 경로 수평적 경로 외부적 경로
의미 권한 위임한 주체가 권한 행사 주체에게 설명과 응답을 요구 동등한 지위에 있는 기관이나 행위자 간 상호 감시와 견제 주민 요구가 국경을 넘어 다른 정치 공동체의 정책과 공론장으로 이동
주요행위자 주민, 주민조직 등 의회, 감사기구, 인권기구 등 주민, 시민사회, 국제기구 등
기능 요구를 공식의제로 제기하고 권한 행사 주체의 응답 요구 주민 요구를 조사, 결의, 감사 등 제도적 감시로 전환 초국적 연대를 통해 책무성 공간 확장
사례 적용 필리핀 주민 → 필리핀 정부에 항의 및 이주대책 요구 등 필리핀 상원 결의안 채택, 국가인권위 조사 등 필리핀 주민 단체 → 한국 노무현 대통령에게 항의 서한 발송 등

* 기존 논의를 바탕으로 저자 정리

이 세 가지 경로는 각각 독립적으로 작동하기보다는 상호연결되고 보완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 협력국 주민들이 협력국 내부의 제도권 행위자에게 제기한 요구는 의회나 독립 감시기구의 조사와 견제를 촉발할 수 있으며 동시에 초국적 시민사회 연대를 통해 공여국의 정책과 공론장으로 확장될 수 있다. 사우스레일 사례는 주민들의 요구가 수직적・외부적 경로를 통해 전달되고, 이러한 요구가 양국 정부 내부의 수평적 책무성 장치의 작동으로 이어진 사례로 이해할 수 있다.

3. 폭스(Fox)의 사회적 책무성과 분석틀

그러나 책무성 요구의 경로가 존재한다고 해서 책무성이 자동적으로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경로는 주민들의 요구가 전달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하지만 그 가능성이 실제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주민들의 요구가 개별적 불만에 머무르지 않고 공동의 문제로 조직화되어야 한다. 또한 조직화된 요구가 다양한 경로를 통해 전달되더라도, 권한 행사 주체가 이에 응답하고 정책적으로 조정할 수 있는 제도적 응답 능력이 결합되지 않는다면 책무성은 제한적으로 작동할 수밖에 없다(Fox 2015).

이 점에서 본 연구는 폭스(Fox 2015)의 사회적 책무성(social accountability) 논의를 분석틀로 활용한다. 폭스는 사회적 책무성이 실질적으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아래로부터의 조직화된 요구(voice)와 이에 응답할 수 있는 제도적 응답 능력(teeth)이 함께 작동해야 한다고 보았다. 조직화된 요구는 공동의 문제를 인식한 행위자들이 자신들의 요구를 집합적으로 형성하고 권한 행사 주체에게 설명과 응답을 요구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이때 조직화된 요구가 실질적으로 전달되기 위해서는 ‘중간자’의 역할이 중요하다. 중간자는 주민과 국가 사이의 쌍방향 소통을 촉진하는 매개자로서, 문화적・권력적 격차를 완화하고 배제된 주민들의 요구를 제도권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전달하는 역할을 수행한다(Fox 2015). 특히 주민들이 공여국 정부에 직접 접근하기 어려운 국제개발협력 맥락에서 주민들의 요구를 국경을 넘어 공여국 내부로 전달하고 공론화하는 초국적 중간자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진다.

제도적 응답 능력은 단순한 제재 능력이 아니라, 요구를 받은 주체가 실제로 반응하고 정책을 조정하며 문제를 시정할 수 있는 역량을 의미한다(Fox 2015). 따라서 조직화된 요구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이를 수용하고 실질적으로 조정할 수 있는 제도적 응답 능력이 함께 작동할 때 비로소 사회적 책무성이 실현될 수 있다.

이에 본 연구는 사회적 책무성 논의를 바탕으로 사우스레일 사례를 세 가지 차원에서 분석한다. 첫째, 사업의 영향을 받은 주민들이 어떻게 개별적 불만을 조직화된 요구로 전환하였는지를 살펴본다. 둘째, 그 요구가 수직적・외부적 경로를 통해 어떻게 전달되고 수평적 책무성의 작동으로 이루어졌으며, 이 과정에서 중간자들이 어떠한 역할을 수행하였는지를 분석한다. 셋째, 협력국과 공여국 정부의 제도적 응답 능력이 어떻게 작동하였고, 왜 제한적으로 나타났는지를 검토한다. 이를 통해 국제개발협력의 다층적 구조 속에서 사회적 책무성의 가능성과 한계를 규명하고자 한다.

Ⅲ. 필리핀 마닐라 남부 통근열차 지원사업과 비자발적 이주문제

1. 필리핀 마닐라 남부 통근열차 사업의 추진 배경

필리핀 사우스레일 사업은 알라방(Alabang)과 투투반(Tutuban) 간 약 36km 구간을 연결하는 수도권 통근 철도 개선 사업이다. 주요 사업 내용은 기존 단선 철도의 복선화 및 선로 중량화, 신호・통신 시스템 개선, 교량 및 역사 개보수, 정비창 복구, 디젤자동차 18량 도입 등을 포함하였다. 사업 총괄은 필리핀 교통부(Department of Transportation, 이하 DOT)가 담당하였으며 운영은 필리핀 국영철도공사(Philippine National Railways, 이하 PNR)가 맡았다(최일권 2010).

사우스레일 사업은 필리핀 정부가 1990년대부터 추진해 온 철도 현대화 전략의 일환이었다. 남부노선(Main Line South)과 북부노선(Northrail)을 포함한 철도망 재건 계획 가운데 사우스레일 구간은 수도권 외곽과 도심을 연결하는 핵심 노선으로 분류되었으며 필리핀 정부는 사업 추진을 위해 해외 공여국의 원조 및 기술지원을 적극적으로 모색하였다(GMA News Online 2007/06/04).

2004년 당시 글로리아 마카파갈 아로요(Gloria Macapagal Arroyo) 대통령은 한-필리핀 정상회담에서 노무현 대통령에게 사우스레일 사업에 대한 ODA를 요청하였다. 한국 정부는 EDCF를 통한 유상원조 차관을 승인하였으며, 총사업비 약 6,468만 미 달러(USD) 가운데 약 3,500만 달러를 EDCF 차관으로 지원하였다(강동균 2009).

차관계약에 따라 대우인터내셔널을 중심으로 한 컨소시엄(한진준공업, ㈜로템 포함)이 건설, 차량 납품, 설계 및 감리 등을 일괄 수행하였다. 이는 한국의 공적자금과 민간기업이 연계된 구속성 원조 방식으로 추진되었으며, 당시 한국 정부는 이를 ODA와 기업의 해외 진출을 연계한 대표적 사례로 평가하였다(강신영 외 2008). 이후 사업 착수식에는 아로요 대통령의 요청으로 노무현 대통령이 마닐라를 공식 방문하여 참석하였다(김윤경 2005; 노무현 2005).

이처럼 사우스레일 사업은 필리핀 정부에게는 수도권 교통망 현대화라는 국가적 과제를 실현하기 위한 주요 인프라 사업이었으며, 한국 정부에게는 개발원조와 기업의 해외진출을 동시에 추진하는 정책 수단이었다. 또한, 양국 정상이 직접 관여한 국가 간 사업이었다는 점에서 높은 정치적 중요성을 지녔다. 이러한 특성은 사업의 지속과 추진을 우선시하게 만들었으며, 이후 주민들의 요구가 사업의 방향을 바꾸거나 이주정책을 근본적으로 조정하는 데 구조적 제약으로 작용하였다.

사우스레일 사업은 수도권 철도 인프라 개선을 목표로 추진되었지만, 사업 구간에 위치한 대규모 비공식 거주지의 철거와 주민 이주를 전제로 하였다. 이에 따라 이주정책과 주민 보호를 둘러싼 다양한 쟁점이 제기되었으며 이는 이후 주민 조직화와 책무성 요구 형성의 핵심 배경이 되었다.

2. 비자발적 이주정책과 주민 생활기반의 위험

사우스레일 사업 구간은 인구 밀집 지역인 메트로 마닐라를 관통하는 핵심 철도 축으로 필리핀 PNR이 소유한 철도부지 주변에는 수십 년에 걸쳐 자생적으로 형성된 다수의 비공식 거주지가 존재하였다. 이 지역 주민들은 주로 1970-80년대 이후 도심 내 생계를 찾아 유입된 이주민과 그 자녀 세대로 구성되었으며 건설노동자, 노점상, 운전사, 가사노동자 등 비공식 경제 부문에 종사하는 저소득층이 다수를 차지하였다(정법모 2017).

기존 철로의 복선화와 교량 재건을 포함한 대규모 개량 공사는 철도부지의 물리적 확보를 전제로 하였으며 이에 따라 철로변 비공식 거주민에 대한 대규모 이주가 불가피하였다. 필리핀 정부의 조사에 따르면 이주 대상자는 약 3만 5천 가구에 달하였으며 이 가운데 철로로부터 5m 이내에 거주하는 약 2만 가구가 우선 이주 대상으로 분류되었다(최나래 2011; 국가인권위원회 2007). 이처럼 사우스레일 사업은 단순한 철도 인프라 개선 사업이 아니라 수만 가구의 생계와 주거 환경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대규모 도시 재편 사업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사업 추진 과정에서 필리핀 정부는 이주 대상 주민들에게 외곽 정착지로의 이전 또는 고향으로의 귀환이라는 두 가지 선택지를 제시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주민들이 도심에 생계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방식은 실질적 대안으로 기능하기 어려웠다. 특히 정부가 최종 지정한 주요 이주지는 마닐라 남부에서 약 40km 떨어진 카부야오(Cabuyao) 지역이었다(국가인권위원회 2007). 이러한 외곽 이주는 기존 일자리, 시장, 학교, 교통망, 사회적 관계망으로부터 주민들을 분리시킬 가능성이 높았으며 결과적으로는 이주정책은 주민들의 생활기반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채 추진되었다.

이주정책을 담당한 국가주택청(National Housing Authority, 이하 NHA)은 대규모 이주민 수용을 위한 재정 확보에 어려움을 겪었다. 토지 매입, 주택 건설, 사회기반시설 설치 및 보상금 지급에는 상당한 재원이 요구되었으나 이를 충당할 예산은 충분하지 않았다(정법모 2017). 그 결과 이주 예정지의 주택은 완공되지 않은 상태였으며 전기・수도・도로・학교・보건시설 등 기본적인 생활 인프라조차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주민들의 이주가 추진되었다(Gentolia-Murphy 2006). 또한 주민들에게는 낮은 수준의 보상 또는 장기 분할 상환 방식의 이주 대출이 제시되어 경제적 부담이 전가되었다(국가인권위원회 2007, Jung 2014).

절차적 측면에서도 다양한 문제가 제기되었다. 필리핀 정부는 ‘선이주 후 철거’ 원칙을 제시하였으나 실제로는 정착지 조성이 완료되지 않은 상태에서 퇴거가 추진되었다(김동주 2006; 임영주 2008). 철거 일정, 보상 기준, 대체 주거지와 관련한 정보 제공은 제한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주민들과의 실질적인 협의 역시 충분하지 않았다. 일부 주민들은 철거 직전까지 자신이 이주 대상자인지조차 통보받지 못하였다고 증언하였다. 대통령 직속 도시빈민위원회(Presidential Commission for the Urban Poor, 이하 PCUP)와 LIAC(Local Inter-agency Committee) 등 협의체가 존재하였으나 주민들의 의견이 정책 결정 과정에 실질적으로 반영되기는 어려웠다(국가인권위 2007; COHRE 2007).

이처럼 이주정책 과정에서 누적된 주민들의 피해 경험과 불만은 이후 집단적 조직화와 책무성 요구 형성의 핵심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Ⅳ. 주민 요구의 형성과 전달: 조직화된 요구와 전략적 경로

1. 조직화된 요구의 형성: 개별 저항에서 조직화된 요구로

사우스레일 사업에서 책무성 요구의 일차적 주체는 철거 대상이 된 비공식거주민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대응은 처음부터 조직화된 형태로 나타난 것은 아니었다. 사업 초기인 2005년경 주민들은 개별적 항의나 퇴거 지연 전술과 같은 수동적 저항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았다.

2006년 이후 필리핀 정부의 강제 이주가 본격화 되면서 주민들은 공동의 피해 경험을 기반으로 자발적인 공동체 조직을 결성하기 시작하였다. 파마릴(Pamaril), 사우스레일 구간 주민연합 인 KOSARIKA (Koalisyon ng mga Samahan sa Riles Katimugan, 이하 KOSARIKA)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 조직은 개별 지역에 흩어져 있던 주민들의 이해관계를 하나로 모으고 공동의 요구를 지속적으로 제기 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Hermitanio 2006; HIC 2008/01/25).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주민들의 대응이 단순한 철거 반대나 일시적 항의에 머물지 않았다. 주민들은 자신들의 피해를 개별적 생활상의 불편이 아니라 개발사업 추진 과정에서 보장되어야 할 권리의 문제로 재구성하였다. 주민들이 제기한 요구는 크게 세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기존 생계 기반과 사회적 관계망을 유지할 수 있는 ‘도시 내 이주(in-city relocation)’, ‘도시 근교 이주(near-city relocation)’였다. 둘째, 이주지 내 전기, 수도, 도로, 의료시설 등 기본적인 생활 인프라의 확보였다. 셋째, 철거 일정, 보상 기준, 이주지 조성현황 등에 대한 정보공개와 실질적인 협의 절차 보장이었다(국가인권위원회 2007; HIC 2008/01/25).

이러한 요구는 필리핀 도시개발주택법(Urban Development and Housing Act, 이하 UDHA)과 국제 인권 기준에서 강조하는 적절한 이주 원칙에 근거한 것이었다. 따라서 주민들의 요구는 단순한 민원 제기를 넘어 주거권, 생계권, 참여권 보장을 요구하는 집단적 권리 주장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처럼 주민들은 강제 이주의 피해를 개별적 불만으로 남겨두지 않고 조직화를 통해 공동의 요구로 전환하였다. 주민조직의 형성은 요구의 내용을 구체화하고, 이후 다양한 경로를 통해 이를 전달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폭스(Fox 2015)가 강조하는 전략적 접근의 출발점으로 평가할 수 있다.

2. 주민 요구의 전달: 내부적・외부적 경로의 전략적 활용

조직화된 주민들은 단일한 경로에 의존하지 않고 다양한 경로를 전략적으로 활용하여 요구를 전달하였다. 사우스레일 사업은 필리핀 정부가 추진한 철도사업이면서 동시에 한국의 EDCF 차관과 한국 기업의 참여를 통해 수행된 개발협력 사업이었다. 따라서 주민들이 책무성을 요구할 수 있는 대상 역시 단일하지 않았다. 주민들은 협력국 내부의 제도적 정치과정을 활용하는 한편, 시민사회 네트워크와 공여국을 향한 외부적 경로를 통해 요구의 범위와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하였다.

(1) 수직적 경로: 제도권 정치과정을 통한 요구 전달

주민들은 먼저 협력국 내부의 제도권 정치과정을 활용하였다. 주민단체들은 마닐라 시의회에 철거 유예를 요청하였고 일부 구간의 주민들은 상원에 이주정책 개선을 촉구하는 서한을 전달하였다(Gentolia-Murphy 2006). 또한 주민들은 부통령실, NHA, 지방정부 등을 대상으로 항의 활동을 전개하며 이주정책의 문제점과 대체 이주지 마련의 필요성을 지속적으로 제기하였다(Hermitanio 2006; Gentolia-Murphy 2006). 이러한 행동은 주민들이 이주 문제를 단순한 행정 집행의 문제가 아니라 지방정부와 입법부가 다루어야 할 공적 의제로 전환하려는 시도였다.

행정부가 충분히 응답하지 않는 상황에서 주민들은 하나의 기관에만 요구하지 않고 공식 제도 안에서 활용가능한 여러 정치적 통로를 전략적으로 동원하였다.

(2) 외부적 경로: 공여국을 향한 요구의 확장

사우스레일 사례에서 특히 주목할 점은 주민들의 요구가 필리핀 내부에 머물지 않고 공여국인 한국으로까지 확장되었다는 점이다. 주민들은 사우스레일 사업이 필리핀 정부가 추진한 철도사업인 동시에 한국의 EDCF 차관과 한국기업의 참여를 통해 수행된 개발협력 사업이라는 점에 주목하였다. 이에 따라 사업에 재원을 제공하고 사업 추진에 관여한 한국 정부와 관련 기관 역시 비자발적 이주 문제에 대해 설명하고 응답해야 할 주체로 인식하였다.

KOSARIKA를 비롯한 주민조직은 노무현 대통령과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에게 항의 서한을 전달하였고 주한 필리핀 대사관 앞에서 항의 시위를 전개하였다(HIC 2008/01/25). 이러한 활동은 주민들의 책무성 요구가 필리핀 정부와 국내 제도권에 한정되지 않고, 사업의 공여국인 한국으로 확대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요구는 국제개발협력에서 책무성 관계가 협력국 주민과 협력국 정부사이에만 한정되지 않음을 보여준다. 국제개발협력은 공여국 정부와 원조기관, 협력국 정부와 시행기관 등 다수의 행위자가 재원 조달과 정책 결정, 사업 집행에 관여하기 때문에 책무성 관계를 단일한 주인-대리인 관계로 명확히 구분하기 어렵다. 사우스레일 주민들은 사업에 재원을 제공하고 추진에 관여한 한국 정부에도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비자발적 이주가 협력국 내부에서만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공여국 역시 그 사회적 영향에 대해 설명하고 응답해야 할 사안임을 제기하였다. 이는 개발협력의 영향을 받은 주민들이 협력국 내부의 제도적 경로뿐 아니라 사업에 관여한 공여국 정부와 원조기관에도 정당한 책무성 요구를 제기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3) 중간자의 역할과 초국적 연대

사우스레일 사례에서 시민사회는 주민들이 직접 접근하기 어려운 제도적 공간과 연결하고 주민들의 요구가 외부에 전달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중간자 역할을 수행하였다. 필리핀에서는 KADAMAY(Kalipunan ng Damayang Mahihirap)와 UPA(Urban Poor Associates) 등 기존의 도시빈민운동 단체들이 주민조직과 연계하여 조직화와 권리 주장을 지원하고 주민들이 지방정부와 관련 기관에 요구를 제기할 수 있도록 뒷받침하였다(HIC 2008/01/25; Jung 2014).

이러한 활동은 필리핀과 한국 시민사회의 초국적 연대로 이어졌다. 양국 시민사회는 국제 NGO ‘아시아브릿지’를 설립하여 주민조직의 활동을 지원하고 주민들의 피해와 요구를 한국 사회에 전달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 과정에서 주민들의 항의서한 전달과 피해 실태의 대외적 공론화가 지원되었으며 사우스레일 사업의 이주 문제가 한국 ODA의 사회적 영향과 관련된 문제로 알려지기 시작하였다(Jung 2014).

한국의 시민사회단체와 언론은 현지조사와 주민 인터뷰를 통해 이주 과정과 이주지의 생활 실태를 파악하고, 이를 국내에 알리며 한국 정부와 원조기관의 대응을 촉구하였다(유신모 2007a; 2007b; 유신모 외 2007; 임영주 2008; 여정민 외 2006). 일부 시민사회단체는 한국수출입은행과 재정경제부에 사업 관련 정보공개와 이주대책 점검, 정책 개선을 요구하였다(염형철 2005). 이러한 활동을 통해 주민들의 요구는 한국 사회의 공론장으로 확장되었고 이후 국가인권위원회의 실태조사 등 공여국 내부의 제도적 관심과 대응으로도 이어졌다(참여연대 2007).

이처럼 협력국과 공여국의 시민사회는 주민들의 요구를 대신하기보다, 주민 조직의 활동을 지원하고 그 요구를 국경 너머로 전달하며 공여국 내부의 책무성 문제로 공론화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V. 책무성의 작동과 제도적 응답의 한계

1. 협력국과 공여국 내부의 책무성 작동

사우스레일 주민들의 조직화된 요구는 협력국과 공여국 내부의 제도적 감시와 검토를 촉발하였다. 필리핀에서는 마닐라 시의회의 철거유예안 채택과 상원의 청문회 결의 및 조사가 이루어졌다(Senate of the Philippines 2008a; 2008b). 이는 주민들의 요구가 지방정부와 행정부에 대한 직접적인 문제 제기를 넘어, 입법기관이 이주정책과 집행 과정을 점검하는 수평적 책무성으로 이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상원 청문회는 주민들이 제기한 이주절차와 이주지 생활 여건의 문제를 공식적으로 확인하고 공적 의제로 다루는 계기가 되었다(Philippine Human Rights Information Center 2010).

공여국인 한국에서도 사우스레일 사업의 사회적 영향에 대한 제도적 검토가 이루어졌다. 국가인권위원회는 한국인권재단에 실태조사를 의뢰하였으며, 해당 조사는 한국수출입은행과 관계 부처의 자료, 필리핀 현지 인터뷰와 설문조사 등을 바탕으로 한국의 유상원조가 협력국 주민의 인권과 생존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였다(국가인권위원회 2007; Jung 2014). 이는 협력국에서 발생한 이주 문제가 공여국 내부의 인권 및 원조정책의 문제로 검토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러한 과정은 주민들의 조직화된 요구가 협력국과 공여국 내부의 수평적 책무성 장치를 작동시켰음을 보여준다.

2. 제도적 응답과 주민 권리 회복의 한계

책무성의 작동은 협력국과 공여국 정부의 일부 정책 조정과 대응으로 이어졌다. 필리핀에서는 마닐라 시정부가 이주지 조성이 완료되기 전까지 철거를 유예한다는 원칙을 제시하고 대체 이주지의 가능성을 검토하였다(HIC 2008/01/25). 중앙정부는 행정명령을 통해 철거와 이주 과정에서 사회적 준비 절차를 강화하고 PCUP의 감독 기능을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당시 부통령 겸 주택정책조정위원장이었던 마누엘 로이테리오 데 카스트로(Manuel Leuterio de Castro Jr.)는 이주지를 방문하고 열악한 생활 여건 등을 확인하고 전기공급 및 기반시설 확충을 약속하였다(COHRE 2007).

한국 정부 역시 초기에는 ‘적절한 이주대책의 마련을 요구하면서도 이주 문제는 기본적으로 필리핀 정부의 책임’이라는 입장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주민들의 적극적인 책무성 요구 이후 재경부는 두 차례에 걸쳐 아시아개발은행(Asian Development Bank, 이하 ADB)의 이주 전문가를 통해 이주계획의 타당성과 이주단지의 생활 여건을 조사하였다. 또한, 평가 결과에 따라 후속 자금 지원 여부를 조절할 수 있도록 관련 조건을 계약에 반영하고, 이주가 국제기준에 부합하게 이루어지는지를 지속적으로 점검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국가인권위원회 2007; HIC 2008/01/25).

그러나 이러한 제도적 응답은 주민의 실질적인 권리 회복으로 이어지지 못하였다. 이주지 완공 이전까지 철거를 보류한다는 원칙은 일관되게 지켜지지 않았으며, 일부 주민들은 기초 생활기반이 충분히 마련되지 않은 채 원거리 이주지로 이전하였다. 원거리 이주는 주민들이 도심에서 유지해온 일자리와 생계 기회에 대한 접근을 어렵게 하였을 뿐 아니라, 기존의 사회적 관계망과 생활기반도 약화시켰다. 이주 이후 생계 불안과 교통비 부담, 기초서비스 부족 등의 문제가 지속되었으며, 일부 주민들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다시 도심으로 돌아오기도 하였다(Jung 2014; 정법모 2017).

이처럼 주민들의 요구는 협력국과 공여국의 제도적 응답을 이끌어 냈지만, 조사와 일부 정책 조정은 구속력 있는 이행과 지속적인 사후 관리로 연결되지 못하였다. 그 결과 주민들의 핵심 요구였던 안정적인 정착과 생계 기반의 회복은 실질적으로 보장되지 못하였다.

3. 제도적 응답의 제약 요인

사우스레일 사업에서 제도적 응답이 제한된 첫 번째 요인은 국제개발협력의 다층적 행위 구조이다. 사업에는 필리핀 정부와 PNR, NHA, 지방정부뿐 아니라 한국의 재정경제부, 수출입은행, 한국 기업이 서로 다른 역할로 참여하였다. 이처럼 재원 제공과 사업 집행, 이주대책의 수립과 시행이 여러 기관에 분산되면서 주민 보호와 피해 회복에 대해 누가 최종적으로 설명하고 시정해야 하는지가 불명확해졌다. 한국 정부는 이주 문제를 일차적으로 필리핀 정부의 책임으로 보았고, 필리핀 내부에서도 이주대책의 책임은 여러 기관에 분산되어 있었다. 그 결과 주민들은 여러 기관을 상대로 반복적으로 문제를 제기해야 했지만, 어느 한 기관도 주민 보호에 대한 최종적 책무를 충분히 부담하지 않았다. 이는 다수의 행위자의 참여로 책임의 귀속이 분산되는 ‘다수 행위자의 문제(many hands problem)’로 설명할 수 있다(Bovens 2007).

두 번째 요인은 협력국의 국가 발전 우선 기조와 행・재정적 제약이다. 필리핀에서 철도 현대화는 교통 인프라 개선과 국가 발전을 위한 주요 사업으로 추진되었다. 이 과정에서 사업과 이주정책이 하향식(top-down) 방식으로 결정되면서 주민의 정보 접근과 협의, 생활권과 생계유지에 대한 고려는 상대적으로 후순위에 놓였다. 도시개발주택법 등 주민 보호를 위한 법 절차가 존재하였으나, 사업 추진을 우선시 하는 정책 기조 속에서 이러한 규정들이 실제 집행 과정에서 충분히 준수되지 못하였다. 아울러 이주지 조성에 필요한 토지 매입, 주택 건설, 사회기반시설 설치, 보상금 지급 등에는 상당한 재원이 요구되었으나 이를 충당할 예산이 충분히 확보되지 못하였다(정법모 2017). 이러한 정책적 우선순위와 행・재정적 제약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주민들의 요구가 제기된 이후에도 이주 정책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조정하기 어려웠다.

세 번째 요인은 공여국의 경제성 중심 원조 인식과 책무성 제도의 미비이다. 한국은 사업의 경제적・기술적 타당성에 비해 비자발적 이주가 초래할 사회적 영향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하였다. 사우스레일 사업은 교통 인프라 개선과 한국 기업의 참여가 결합된 사업으로 추진되었으며, 사업 심사 과정에서도 경제적 효과와 기술적 실현 가능성이 중시되었다. 반면 대규모 이주가 주민의 주거와 생계, 사회적 관계에 미칠 영향은 핵심적인 위험으로 다루어지지 않았다(염형철 2005). 당시에는 이러한 위험을 사업 초기부터 점검하고 주민 보호 조치의 이행을 확인할 환경・사회 세이프가드와, 피해 주민이 공여국 원조기관에 직접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책무성 장치도 충분히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따라서 문제 제기 이후 조사와 모니터링은 이루어졌지만, 사회적 위험을 사전에 예방하거나 주민의 요구를 사업 조정과 피해 구제로 연결할 제도적 기반은 제한적이었다.

Ⅵ. 결론

본 연구는 필리핀 사우스레일 사업에서 비자발적 이주를 경험한 주민들의 요구가 어떠한 경로를 통해 협력국과 공여국의 제도적 응답으로 이어졌으며, 이러한 응답이 왜 주민의 실질적인 권리 회복으로 이어지지 못했는지를 분석하였다. 분석결과, 주민들의 조직화된 요구는 책무성 작동의 출발점이 되었으며 협력국 내부의 제도적 경로와 공여국을 향한 외부적 경로의 활용, 시민사회의 초국적 중간자 역할은 주민들의 요구가 두 국가의 정책과 제도적 공간에서 다루어질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사우스레일 주민들은 개별적인 피해 경험을 조직화된 요구로 전환하고, 필리핀 정부와 관련 기관뿐 아니라 사업에 재원을 제공한 한국 정부에도 설명과 대응을 요구하였다. 그 결과 필리핀에서는 철거유예와 이주정책 개선에 관한 제도적 대응이 이루어졌으며, 한국에서도 이주계획과 이주지 생활 여건에 대한 조사와 점검이 이루어졌다. 이는 비자발적 이주가 협력국 내부의 행정 문제로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사업에 재원과 정책적 지원을 제공한 공여국 역시 응답해야 할 개발협력의 문제로 다루어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주민들의 요구가 협력국과 공여국이라는 두 층위에서 책무성을 작동하게 했다는 점은 사우스레일 사례가 갖는 중요한 의미이다. 이 과정에서 주민들의 조직화된 요구와 다양한 책무성 경로, 시민사회의 초국적 중간자 역할은 상호 보완적으로 작용하였다. 주민들의 조직화된 요구가 없었다면 비자발적 이주 문제는 사업 집행 과정에서 발생한 개별적 갈등으로 남았을 가능성이 크다. 협력국과 공여국 시민사회의 연대는 주민들이 직접 접근하기 어려운 제도적 공간과 연결하고, 주민의 피해와 요구를 공론화함으로써 책무성 요구의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그러나 책무성의 작동이 곧 주민의 권리 회복을 의미한 것은 아니었다. 주민들의 조직화된 요구에 따라 일부 정책 조정과 제도적 대응이 이루어졌지만, 이주지 완공 이전의 철거 보류 원칙과 생활 여건 개선 조치는 충분히 이행되지 않았다. 주민들은 원거리 이주 이후에도 생계 불안과 열악한 정착 여건을 경험하였으며, 일부는 다시 도심으로 돌아오기도 하였다(Jung 2014; 최나래 2011). 이는 주민들의 조직화된 요구가 제도적 반응을 촉발하더라도, 그 요구를 지속적인 정책 이행과 피해구제로 연결할 응답 능력이 뒷받침되지 않을 경우 책무성은 부분적인 수준에 머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한계는 세 가지 요인과 관련된다. 첫째, 사우스레일 사업은 협력국과 공여국의 여러 정부기관과 원조기관, 기업이 참여한 다층적 구조로 추진되었으며, 이로 인해 주민 보호와 피해회복에 대한 응답 책임이 분산되었다. 둘째, 필리핀에서 철도 현대화는 국가 발전을 위한 핵심 사업으로 추진되었으며, 사업 추진을 우선시하는 정책 기조 속에서 주민 보호를 위한 법과 절차가 존재하였음에도 충분히 이행되지 않았고, 적절한 이주지와 생활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재정적 뒷받침도 제한적이었다. 셋째, 한국의 사업 심사와 원조 체계에서는 경제적・기술적 타당성에 비해 대규모 이주가 주민의 삶과 권리에 미칠 사회적 영향이 충분히 검토되지 않았다. 또한, 당시에는 이러한 위험을 사전에 예방하고 피해 주민의 요구를 시정과 구제로 연결할 환경・사회 세이프가드와 책무성 장치도 충분히 마련되지 않았다.

오늘날의 제도가 당시 적용된다면, 비공식거주민의 규모와 생활실태, 비자발적 이주가 주거와 생계에 미칠 영향을 사업 심사 단계에서 주요한 사회적 위험으로 검토될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이주계획의 수립과 이행 과정에서 주민에 대한 정보제공과 협의, 이주지 기반시설과 생계회복 대책이 지속적으로 점검되고, 주민들이 공여국 기관에 직접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절차도 활용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공여국의 역할은 세이프가드를 통한 위험 점검과 이의제기 절차 마련에 그쳐서는 안 된다. 대규모 인프라 사업에서 비자발적 이주가 예상되는 경우, 공여국은 협력국 정부가 적절한 이주지와 기반시설, 생계 회복 대책을 실제로 마련할 수 있는 재정・행정 역량을 갖추고 있는지도 함께 검토해야 한다. 필요한 경우 이주대책의 수립과 집행, 기반시설 구축과 사후 관리를 사업의 부수적 비용이 아닌 사업의 필수 구성요소로 포함하고 이를 지원할 재원과 기술적 지원을 연계할 필요가 있다. 이는 이주 문제를 협력국 정부의 책임으로만 남겨두지 않고, 공여국 역시 사업의 사회적 영향을 예방하고 완화하는 데 책임 있게 관여해야 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비자발적 이주를 수반하는 대규모 인프라 개발협력에서는 세이프가드의 제도화, 주민의 문제 제기 통로, 협력국의 이행역량에 대한 지원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주민의 요구가 협력국과 공여국의 정책 과정에서 실질적으로 진입할 수 있어야 하며, 그 요구가 사업 조정과 시정조치, 피해구제로 이어질 수 있도록 공여기관의 응답 책임과 집행 역량도 강화되어야 한다. 결국 국제개발협력에서 주민 권리 보호를 위한 책무성은 조직화된 요구, 다양한 책무성 경로, 초국적 중간자의 역할, 그리고 이에 실질적으로 응답할 수 있는 제도적 응답 능력이 함께 작동할 때 비로소 실현될 수 있다.

후속 연구에서는 두 가지 방향의 비교 분석이 필요하다. 첫째, 시민사회의 자율적 조직화가 제한되거나 주민들의 집합적 요구가 차단되는 권위주의적 맥락에서도 책무성이 작동할 수 있는지, 그리고 이러한 조건에서 초국적 중간자가 조직화된 요구의 부재를 어느정도 보완하고 공여국의 제도적 응답을 촉진할 수 있는지를 비교할 필요가 있다. 둘째, 본 연구에서 확인된 세 가지의 제약 요인들이 다른 유형의 개발협력 사업에서도 유사하게 작동하는 지를 사례를 확장하여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비교 연구는 국제개발협력에서 주민의 요구가 실질적인 제도적 응답과 권리 보호로 이어지기 위한 조건을 보다 체계적으로 규명하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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