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ation and Uses of South Manchuria Railway-Marked Craft Objects (1907-1945) in Korea, with a Focus on Colonial Railway Policy and Operational Spaces
1 Korea Culture Research Institute, Ewha Womans University
DOI: https://doi.org/10.33334/sieas.2026.45.1.169
Abstract
The South Manchuria Railway Company (SMR; 南滿洲鐵道株式會社, hereafter Manchul), established in 1907 immediately after the Russo-Japanese War, was a Japanese state-owned enterprise that symbolized imperial expansionist policy. Until its dissolution in 1945, the company operated railways across Korea and Manchuria while developing a wide range of businesses, including logistics, passenger transport, and tourism. Craft objects bearing the name of the South Manchuria Railway Company (hereafter SMR-inscribed craft objects), produced in the course of these operations, constitute important historical materials that reveal the character of the company and its railway management strategies when examined alongside contemporary visual sources.
In Korea, a wide variety of SMR-inscribed craft objects with both practical and symbolic functions have been preserved. These objects were produced using diverse materials, including ceramics, metalwares made of copper alloys and enameled sheet iron, and glass, with tableware, cooking utensils, and commemorative items accounting for a particularly large proportion. High-quality handcrafted objects made of silver and glass have been identified in first-class dining cars and at the Western-style restaurant Grill in Gyeongseong Station, while commemorative items and pocket watches bear finely executed SMR marks and company inscriptions. Such objects demonstrate that materials and production methods were selectively employed according to the function and spatial context of use.
Following the establishment of the Gyeongseong Railway Administration in 1911, the South Manchuria Railway Company (SMR) assumed responsibility for overall railway operations in Korea, including facility maintenance, logistics, and passenger services. In this process, systems of craft objects used in Japanese railway spaces were introduced into Korea. The types and formal categories of SMR-inscribed craft objects were closely connected to these policy-driven and functional uses. The modes of organization established during this period were subsequently transferred to the Railway Bureau of the Government-General of Korea after the termination of SMR’s entrusted railway management, forming the foundation of the railway-related craft object system in Korea during the 1930s.
By analyzing SMR-inscribed craft objects held in Korean collections within the framework of railway policy and operational space, this study demonstrates that these objects should be understood not as decorative crafts or works of fine art, but as industrial crafts produced and used within the institutional environment of modern railway industry. Through this approach, the paper examines in detail the formation and use of railway-related craft objects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and reconsiders the role of craft in modern industrial society from the perspective of material culture.
Ⅰ. 머리말
19세기 말~20세기 초는 공예의 정체성과 역할의 변화가 일어난 시기이다. 그 이전까지 공예는 사회에서 사용하는 대부분의 물품을 손으로 제작하며 기간산업의 역할을 수행해왔다. 그러나 모터 엔진을 동력으로 하는 기계가 도입되면서 공예의 제작 방식과 기능은 점차 분화하기 시작하였다. 생산 효율과 가격 경쟁력을 갖춘 기계 생산품은 생활용품 제작과 소비 전반에 걸쳐 빠르게 확산, 정착하였다. 더불어 제작품의 목적에 따라 기존의 수공(手工) 방식이 유지되거나 기계 생산품에 수공을 더한 반수공(半手工) 방식이 병용되었다. 생산방식은 공예품에 부여된 목적에 따라 적용되었다. 사회에서 사용되는 물건을 만들어 내는 ‘만듦’을 중심으로 한 산품(産品), 즉 산업품(産業品, 製造品)을 제작하는 공예와 개인과 사회의 문화적, 예술적 세계를 공예품에 조형언어로 구현하는 예술품(藝術品)으로서 공예로 구분되었다. 이 두 성격은 시대와 사회, 그리고 사람과 함께 공존해왔다. 다시 말해 공예품은 이를 제작하거나 주문하는 주체가 어떠한 목적을 부여하느냐에 따라 산업적 성격과 예술적 성격을 내포해 만들어지고 인식되었다(Risatti, 2011, 64-67).1)
이러한 공예의 분화는 기계 산업 도입 이후 새롭게 형성된 현상이라기보다, 그 이전부터 이미 존재해 온 인식 구조에 가깝다. 제작 방식에 있어 손에 의한 제작이냐 또는 기계와 손의 병용 차이가 더해졌을 뿐 공예품을 구현하는 방식 자체는 인간이 설정한 목적과 인식에 따라 선택되었다(Risatti 2011, 109-115; Forsey 2016, 65-66). 그렇기에 산업을 중심으로 한 공예인지, 창작 세계를 위주로 한 예술 중심의 공예인지와 같은 정체성은 제작 주체의 생각과 목적에 따라 조형과 용도가 부여되는 설정이라 할 수 있으며, 두 성격은 하나의 공예품 안에서 공존할 수도 있다. 다만 이러한 제작 목적에 따른 구분은 수공예가 산업의 중심이었던 20세기 이전에 비해 새로운 제작 수단인 기계 산업이 본격화된 19세기 말~20세기 초에 이르러 더욱 뚜렷해지는 모습을 보인다(조선일보 2013/01/01).
본 논문의 연구 대상인 남만주철도주식회사명 공예품(이하 만철명 공예품)은 예술적 조형 언어를 구현하기보다는 필요한 곳에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산품(産品)을 중심으로 구성된 산업공예의 성격이 강한 유물들이다. 이들은 근대기 새롭게 도입된 교통수단인 철도와 이를 운영하기 위해 복합적으로 형성된 제반 사업 및 공간에서 사용되었고 실용품, 창립기념물 등 여러 목적의 물품이 공존한다. 이러한 점에서 만철명 공예품은 범위는 제한적이지만 근대기에 사용된 산업공예품의 한 단면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사례라 할 수 있다.
남만주철도주식회사(南滿洲鐵道株式會社, 이하 만철)는 러일전쟁 직후인 1907년 설립되어 1945년 폐업이 이르기까지 조선과 만주 일대에서 철도를 운영하며 다양한 사업을 전개한 제국주의적 국책 기업이었다. 만철의 주력 산업인 철도는 19세기 말~20세기 초 대량의 물자와 사람을 신속하게 운송할 수 있는 근대적 교통수단이었다. 열강은 전쟁 수행 과정에서 철도의 이러한 이점을 전략적으로 활용하였고, 점령지 확보 이후에는 즉각 철도 부설에 착수하여 식민지에서 수탈한 각종 물산을 운송하고 관련 사업을 전개하는 기반으로 삼았다. 새로운 식민지 대상 국가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철도 부설권이 가장 먼저 확보 대상이 되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만철은 이러한 제국주의적 철도 산업 전개의 첨병 역할을 수행한 기업이었다. 이와 직결된 만철명 공예품은 수공, 반수공, 기계 등으로 제작된 다양한 종류의 유물이 확인되며, 동시대 관련 시각 유물과 함께 만철의 성격과 운영 방향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료적 가치도 지닌다.
만철은 설립 초부터 일본 철도국-조선총독부 철도국과의 긴밀한 협력을 통해 조선의 여객, 물류, 군수 등 철도 운영의 기본 체계를 구축해 갔다. 이러한 운영 구조 속에서 만철명 공예품은 용도와 사용 공간에 따라 형성되었다. 이전부터 사용되던 일상의 물품에 기차라는 당시의 첨단 운송수단과 제반 공간이 결합되면서 이들은 철도 운영을 위한 물품으로서 정체성을 부여받았고, 특정 산업 영역에서 사용하는 산업공예품으로서의 역할을 내포하게 되었다. 소모성이 높은 물품의 경우 생산 효율을 중시한 기계 생산품을 쓰거나 수공 및 반수공 방식이라 하더라도 다루기 편하고 경량화 된 재료를 위주로 제작, 소비하였다. 또 창립기념이나 선물을 위한 상징적인 물품은 정교한 기법을 쓴 수공예품을 사용하기도 했다. 이처럼 철도와 그 제반 시설 및 공간 속에서 형성되고 정착한 만철명 공예품에는 실용성과 상징성이 함께 공존하며, 이는 국내 소장 유물에서도 동일하게 확인된다.
따라서 만철명 공예품을 고찰하기 위해서는 만철이 운영되던 시기의 철도를 중심으로 한 역사적 맥락과 이예 연계된 자료 분석이 필수적이다. 미술사학계에서는 일제강점기 철도 사업의 한 축인 관광과 관련된 연구가 다수 축적되었으며 엽서, 사진, 접시, 신선로, 과자기 등 관광기념품에 대한 연구는 내선일체 정책과 관광 풍조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성과를 제시하였다(곽동경 2019; 김세린 2021; 김예린 2023; 남도현 2016; 박빛나라 2023; 박희연 2010; 윤채원 2019; 정서희 2021; 정지희 2019; 한단아 2020). 또 공예사를 중심으로 만주 지역 요업과 만주국 황실 공예품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져 조선과 만주를 점령한 일본의 산업 침탈과 표상의 활용 방식이 규명되었다(김은경 2024; 정지희 2024). 이러한 연구 성과는 본 연구의 분석에 있어 중요한 토대를 제공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 핵심 전략 교통수단이자 다양한 공간과 공예품, 시각 자료 형성의 기반이 된 철도 자체를 중심으로 한 미술사적 연구는 관련 유물이 적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축적되지 못한 상태이다.
본 연구는 이러한 선행 연구를 토대로 사용 주체가 설정한 목적에 따라 제작, 소비된 산업 공예품의 사례로서 국내 소장 만철명 공예품을 분석하여 형성 배경과 성격을 고찰하고자 한다. 나아가 제작 및 소비 주체가 설정한 목적인 19세기 말~20세기 초 전략적으로 운영된 만철의 철도 산업 방향이 공예품의 형성과 제작, 소비 양상에 있어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검토하고자 한다. 한편 만철은 동아시아 전역에서 활동한 기업으로 관련 유물의 분포가 광범위하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분석 대상을 국내 소장품으로 한정하고 그 중에서도 만철 마크나 명문이 명확히 확인되는 만철명 유물만 검토 대상으로 삼고자 한다.
Ⅱ. 남만주철도주식회사의 조선 철도 운영과 공예품 형성
철도 관련 공예품은 본사, 관리국, 역사, 객차, 화차 등 철도 운영을 구성하는 각 시설과 이로부터 파생된 상업공간, 식당, 호텔 등의 공간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19세기 중반 이후 본격화 된 철도 운영은 용도가 명확히 구분된 공간에서 각 공간에 필요한 물품을 배치하는 체계를 전제로 구성되었고 관련 물품의 제작과 소비는 철도의 운영 구조 및 제반 산업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특히 만철은 조선 철도 운영 과정에서 본사와 관리 조직, 여객과 화물 운송, 군수 및 부대 사업을 포괄하는 운영 체계를 구축하였고 이에 따라 각 기능과 공간에 대응하는 물품을 필요에 따라 제작, 구입, 사용하였다. 본 장에서는 국내 소장 만철명 공예품의 형성 배경을 파악하기 위해 만철의 설립과 조선 철도 운영 과정이 어떠한 구조로 이루어졌는지를 살펴보고 이러한 운영 체계가 공예품의 제작과 사용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고찰하고자 한다.
1. 남만주철도주식회사 설립 배경과 제국주의적 철도 전략
1906년 설립된 만철은 단순한 철도 운영 회사가 아니었다. 만철은 1905년 러일전쟁(1904-1905) 승전 후 일본이 같은 해 9월 체결한 포츠머스 조약을 통해 러시아로부터 양도받은 동청철도(東清鐵道, 만주리–하얼빈–동녕을 잇는 총 연장 약 1,500km) 가운데 남만주 지선의 운영을 담당하고 만주 지역 철도의 상업적 운영과 이에 수반하는 제반 사업을 수행하기 위해 설립된 국책기업이었다井上勇一(1990, 96-101).2
공식적으로 만철이 인수, 운영한 노선은 동청철도 본선 중 장춘을 중심으로 한 남부구간으로, 이는 러일전쟁을 통해 확보한 철도망을 전후 식민지 경영 기반으로 지속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조치였다.2
그러나 만철의 설립은 러일전쟁 이후 즉흥적 결정이 아닌 전쟁 이전부터 준비된 대륙 진출 전략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일본은 러일전쟁 개전 직후인 1904년 5월 육군 참모차장 고다마 겐타로(児玉源太郎: 1852-1906)의 주도로 영국 동인도회사에 대한 전면적인 재조사에 착수했다. 이 조사는 영국이 동인도회사를 통해 점령지에서 수탈한 물산을 철도망으로 통제, 운송한 방식과 이를 통해 식민지 경영을 유지한 구조를 분석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일본은 향후 이를 만주와 대한제국에서의 철도 운영 전략에 적용하고자 했다清原康正 외(1991, 9-14).
동시에 일본은 전쟁 수행을 위해 야전철도제리부(野戦鉄道提理部)를 설치하고 철도를 군인과 군수물자의 주요 수송로로 적극 활용하였다(그림 1

한편 러일전쟁 종전 이후 일본 정부는 만주와 조선에서의 활동을 지속하기 위한 항구적인 운영 주체를 마련하고자 했다. 이에 1905년 1월부터 일본 교통성 내부에서 만주 지역에서의 활동 방향과 철도 운영 주체에 대한 논의를 본격화했다原田勝正(1991, 22-25). 그 결과 1906년 6월 천황 칙령 제142호를 통해 남만주철도주식회사 설립이 공식 고시되었다. 같은 해 11월에는 회사 정관이 확정되었고, 만철은 일본과 대한제국 통감부에 회사 등록을 동시 진행하였다. 이후 1907년 2월 만철이 정식 창립 되었고, 4월부터 철도 운영을 개시하였다이군호(2004, 159). 1911년 조선총독부 고시와 『조선은행회사기요(朝鮮銀行會社要錄)』 1921년 문서에는 ‘남만주철도(株)’의 설립 및 등록일이 1906년 11월 26일로 기록 되어 있다근현대회사조합자료 1921; 조선총독부 관보 1911/10/24; 南満洲鉄道株式会社ニ関スル件 明治39/6/7/勅令第142호). 만철의 공예품을 구분하는 주요 지표 중 하나인 만철명 마크도 1907년 결정되어 1945년까지 사용했다이군호(2004, 158-159).
만철은 설립 초부터 전쟁기 확보한 철도 노선을 일반 철도와 군사 철도로 통합 운영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동청철도 남부 노선과 경의선을 포함한 주요 노선은 평시에 상업 철도로 운영되었으나 전시에는 즉시 야전 철도로 전환하는 것을 전제로 관리되었다이군호(2004, 159). 이와 같은 운영 방식은 철도를 단순한 교통수단이 아닌 군사, 물류, 행정 기능을 동시에 수행하는 핵심 인프라로 인식한 결과였다. 아울러 만철은 철도 운영에 그치지 않고 식민지 경영 전반을 뒷받침하기 위한 조사 및 연구 조직과 부대시설을 단계적으로 확충하였다. 1907년에는 조사부(調査部, 이하 만철조사부)를 설치해 조선과 만주의 지리, 산업, 자원, 문물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였고, 1908년에는 동아경제조사국(東亞經濟調査局)을 설치해 조사 범위를 확대하였다. 같은 해 중국 대련에는 야마토호텔과 만철 중앙시험소를 설립하였으며 1911년에는 조선경성관리국을 설치해 조선 철도 운영을 전담하는 행정 체계를 구축하였다小林英夫(2004, 33-52). 이러한 조직과 시설은 만철이 철도 운영을 중심으로 하되 연구 조사, 숙박, 시험, 행정 기능을 포괄하는 종합 운영 체계로 확장되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만철은 러일전쟁을 계기로 확보한 철도망을 기반으로 조선과 만주를 연결하는 철도 관리 체계를 구축하고 이를 식민지 경영 전반에 활용하기 위해 운영된 국책 기업이었다. 철도를 중심으로 형성된 이러한 운영 구조는 이후 각 기능과 공간에 필요한 물품의 제작과 사용을 필연적으로 수반하였고, 만철명 공예품 형성의 중요한 요건이 되었다.
2. 조선 철도 운영 체제 정착과 공예품 형성
만철은 1911년 경성에 경성관리국을 설치한 이후 1945년까지 위탁 운영기를 포함해 조선 철도 사업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였다. 경성관리국 설치는 만철이 조선 내에서 독자적인 행정과 운영 체계를 갖추는 분기점이 되었으며, 이후 조선총독부 철도국과의 권한 조정, 노선 정비, 시설 확충, 관광 사업 추진 등 조선 철도 운영 전반에 관여하는 기반이 되었다.
이러한 운영체계 정착은 철도 공간과 그에 수반되는 물품의 제작과 사용을 제도적으로 요구하는 조건을 형성하였고, 이는 만철명 공예품이 조선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배경이 되었다.
1) 경성관리국 설치(1911~1916)와 조선 철도 사업의 초기 추진
만철은 1911년 경성에 관리국을 설치하면서 1916년까지 조선 철도 사업의 초기 단계를 추진하였다. 이 시기는 조선 철도 운영 체제가 정착된 시점이자 만철명 공예품의 형성과 조형적 유형이 초기 형태를 갖추는 시기에 해당한다. 또한 이후 조선 관광과 연계된 시각, 공예 유물이 형성되는 기반이 마련된 시기이기도 하다.
일본의 조선 철도 경영은 을사늑약(乙巳勒約, 1905) 강제 체결 이후 본격화되었다. 1868년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은 조선과 만주를 장기적인 침략 대상으로 설정하고 정치, 군사적 전략을 수립해왔는데 철도는 이러한 전략을 실행하기 위한 핵심 수단이었다. 조선은 1894년 갑오개혁 과정에서 의정부 공무아문 산하 철도국을 설치하고 철도 부설을 시도하였다(고종실록 1894/6/28). 그러나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이후 외교권과 치안권, 철도 운영권까지 일본에게 피탈당하면서 조선의 철도 체계는 일본의 제국주의적 팽창 및 식민지 정책 안에서 재편되었다.
을사늑약 이후 조선 철도 운영 주체는 통감부(1906-1909) - 일본 철 도원(1909-1910) - 조선총독부 철도국(1910-1917) - 남만주철도주식회사(만철, 1917-1925) - 조선총독부 철도국(1925-1945)으로 단계적으로 변경되었다(이용상 외 2013, 152). 만철은 1911년 경성관리국 설치 이후 조선 철도 운영에 본격적으로 관여하였고, 일본 정부는 이 시기부터 만철의 관할 부처를 체신국에서 척식국으로 변경해 만철을 철도 운영에 국한된 조직이 아닌 식민지 경영을 담당하는 국책 기관으로서의 성격을 강화하였다(박장배 2009, 151-153).
경성관리국 설치 이후 만철의 사업은 크게 두 방향으로 추진되었다. 첫 번째는 철도 기간 시설 정비와 노선 개편이었다. 만철은 용산에 철도기지를 조성해 공장과 관사 등을 건립하고, 러일전쟁기부터 운용된 경의선과 중국 안봉선 구간의 철로를 정비하였다. 이 노선은 일반 열차와 야전 열차가 함께 운행되는 핵심 노선이었으나 궤폭이 국제 표준보다 좁아 운행의 제약이 존재했다. 이에 만철은 궤폭을 1,435mm 로 표준화하고 조선과 만주를 직접 연결하는 교각인 압록강 철교를 완공하였다. 이후 이 시기에 착수된 노선 정비와 개편은 1925년까지 호남선, 경원선 개량과 함경선, 진해선, 평양 탄광선 등의 신설로 이어졌다(이용상 외 2013, 153-154).
두 번째는 철도를 기반으로한 조선 관광 사업 추진이었다. 만철은 경성관리국 설치 직후부터 조선총독부 철도국과 공동으로 관광 사업을 수립했다. 일본은 이미 대한제국의 외교권과 치안권을 모두 빼앗은 1905~1907년 사이 조선의 명소와 유적, 경관, 풍속을 소개하는 사진첩을 발행하고 시모노세키-부산 간 관부연락선을 연계한 관광 루트를 구상하였다(그림 3

일본에게 관광 사업은 근대국가로서의 성과를 대내외에 가시적으로 홍보할 수 있는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1853년 미국에 의한 강제 개항 후 체결한 불평등 조약을 딛고 청일전쟁(1894-1895)과 러일전쟁(1904-1905)을 거치며 막대한 전쟁비용을 지출한 일본은 전쟁의 성과를 효과적으로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猪木正道 1995, 73-84). 특히 당시 추진하고 있는 정책의 방향이 국익에 옳은 것인지 의구심을 품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猪木正道 1995, 85-86). 그렇기에 어찌보면 을사늑약 이후 만철의 주도로 추진된 조선 관광 개발은 이러한 요구에 부합하는 정책이었다. 이후 1920-30년대 본격화되는 조선 관광 붐과 관광 기념품, 물산 관련 공예품, 관광지 삽화와 사진의 형성은 이 시기에 구축된 철도 운영과 관광 사업의 기반 위에서 전개되었다.
2) 조선 철도 위탁 경영기(1917~1925) 운영 공간의 확장과 공예품의 다종화
1917년 일본 내각은 조선 철도 운영을 만철에 위탁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는 행정 효율을 위한 조치라기보다 조선과 만주를 하나의 교통, 물류 권역으로 통합하려는 제국주의적 철도 정책의 연장선에서 이루어진 결정이었다. 이 시기 만철은 조선 철도 운영을 담당하는 동시에 관광 사업과 부대 산업을 병행하며 철도 운영 공간 전반에서 사용하는 공예품과 시각 자료의 제작 기반을 본격적으로 확대하였다.
1916년 전후 일본 육군참모본부는 조선의 지정학적, 군사적 가치를 재검토하고 만철의 조선 위탁 경영이 향후 만주 침략을 준비하는 데 필수적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일본 정부 역시 조선과 만주를 국유철도망의 일부로 통합 운영하는 것이 정책적으로 합리적이라 보았다. 이러한 판단은 만철이 이미 궤폭 통일과 여객, 화물 직통 노선 개통을 통해 조선-만주 간 철도 연계를 강화하던 시점과 맞물려있다(배은선 외 2014, 299).
이에 따라 1917년 3월 일본 정부는 만철의 조선 철도 위탁 경영 방침을 확정하고 관련 칙령을 공표하였다. 위탁은 조선총독부와 만철 간의 계약 방식으로 이루어졌으며, 조선총독부 철도국은 국유철도 건설 계획과 민간 철도 관리를 담당하고 만철은 국유철도 운용과 관광 및 부대 사업을 전담하였다(배은선 외 2014, 297). 만철은 1925년 위탁 경영 계 협약이 종료될 때까지 철도 시설 확충과 노선 정비를 지속하는 한편 금강산 관광, 월미도 해수온천 등 철도를 기반으로 한 관광 상품을 개발하였다.
그래서인지 현전하는 사진, 지도, 엽서, 광고 등 시각 유물 상당수가 이 시기 만철에서 제작한 것들이며(그림 5

만철은 주요 역사 신축과 개수에도 직접 관여하였다. 대표적인 사례가 경성역(현 서울역)이었다. 경성역은 1900년(광무4) 경인선 개통 당시 건립된 남대문역으로 출발하여 1923년 경성역으로 명칭이 변경되었고, 1925년 현재의 구 서울역 역사로 신축, 이전하였다. 새로 건립된 경성역은 1층에 대합실과 역무공간을 2층에 철도국 직영 고급 양식당(그릴), 다방, 귀빈 대기실 등을 배치한 구조로 도쿄역과 유사한 공간 구성을 갖추고 있었다(小林英夫 2008, 42-44). Ⅳ장에서 후술하겠지만, 서울역 그릴에서 사용된 식기류 가운데 만철 마크가 확인되는 사례가 다수 존재하는 이유도 이러한 운영 구조와 직접적으로 연관된다 (그림 7
1924년 이후 조선총독부는 내치 안정과 산업 개발을 중심으로 정책 노선을 전환하였고 동시에 일본의 만주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만철은 활동의 중심을 점차 만주로 이동시켰다. 이에 따라 1925년 만철은 조선-만주 간 열차 운행과 물류 협력을 유지하는 조건으로 조선 철도 위탁 경영 계약을 해지하였다(배은선 외 2014, 298-300). 그러나 이후에도 만철은 일부 노선 운영과 부대 물자 공급을 통해 조선 철도와 지속적으로 연계 사업을 수행하였다.
이처럼 만철은 1911년 경성관리국 설치 이후 1945년까지 조선 철도 운영의 여러 단계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였다. 이러한 운영 과정과 일본의 전시체제가 1930년대 말에 전환된 사실을 함께 고려하면, 국내에 현전하는 만철명 공예품과 관련 시각 자료의 제작 시기는 대체로 1911년부터 1930년대 말 사이로 한정해 볼 수 있다.
Ⅲ. 만철명 공예품의 성격: 열차와 공간 운영을 중심으로
현재 만철명 마크와 회사 명문이 시문된 공예품은 한국, 일본, 중국을 중심으로 전한다. 이 지역들은 만철 본사와 지부가 위치했던 공간일 뿐 아니라 만주사변(1931)과 중일전쟁(1937-1945) 시기 관동군 이동과 물자 수송을 담당한 핵심 철도 노선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만철의 운행 노선은 평시에는 여객과 물자 이동을 담당하고 전시에는 야전 철도로 기능하는 구조를 지녔다. 이러한 이중적 운영 환경은 철도 공간에 사용된 각종 공예품의 성격과 제작 조건을 규정하는 중요한 전제가 되었다.
만철은 조선총독부 철도국과 협업 및 위탁운영기(1911-1925년)에 이미 철도 운영에 필요한 공예품 수급 체계를 상당 부분 정비하였다. 이 시기 유물은 대체로 일본산 비율이 높지만 1920년대 이후 만철이 중국 대련 본사를 중심으로 계열사를 확대하면서 공예품 생산 구조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유리기, 법랑금속기, 도자기를 비롯한 다양한 물품들이 중국 내 계열사에서 자체 생산되기 시작하였고, 특히 도자기류는 계열사인 대련요업(大连窯業)의 제작 비중이 점차 증가하였다. 만철 산하 중앙시험소 내 요업과에서는 재료 및 공법 연구가 병행되었다(김은경, 2024, 109-110). 이러한 체계 안에서 생산된 공예품은 본사와 역사, 객차에 사용하는 한편 일반 판매를 통한 만철의 경제적인 부대 수익에도 기여하였다(小林英夫, 2004, 114-115).
만철명 공예품은 운영 노선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만철이 운영한 노선은 총 85개로 대부분 중국에 집중되어 있으며, 조선 내 노선은 주로 조선총독부 관할에 속했다. 반면 조선과 만주를 잇는 주요 노선들은 조선총독부 철도국과 만철이 공동 운영하였다. 국내에 전하는 만철 유물 상당수는 이러한 공동 운행 노선의 일등차 또는 식당차에서 사용한 물품으로 판단된다. 대표적인 루트는 일본 시모노세키-관부연락선-부산-부산잔교역(釜山棧橋驛)-경성역(京城驛)을 거쳐 만주로 이어지는 급행 광역 노선으로 1920-30년대 일본 내에서 인기 있는 관광 노선 중 하나였다. 만주국 건국 이후에는 수도 신경(장춘)도 이 노선에 포함되었다.
선의 주요 출발, 도착지로 편입되었다. 히카리(ひかり), 노조미(のぞみ) 등 직통 열차는 1911년 압록강 철교 개통 이후 조선과 만주를 잇는 핵심 노선으로 운행을 시작하여 관광, 군사, 산업 물자의 수송을 목적으로 1945년까지 운행을 지속했다(小牟田哲彦, 2015, 131-133).
열차 구성 역시 공예품 형성에 사용 방식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열차들은 일반 객차 외에도 침대칸, 식당칸, 전망실을 갖추었고 기관차는 다수가 만철제 차량을 사용했다. 객차는 조선총독부 철도국 제작 차량을 병용하였으며 화차는 용도별로 유개차, 수조차, 석유조차, 냉장차 등이 있었다.
차, 가축차 등으로 세분화되었다(小牟田哲彦, 2015, 123-124). 장거리 이동을 전제로 한 조선–만주 노선에서는 객차 내 물품 역시 반복 사용과 내구성을 고려하여 제작되었다. 조선-만주 간 장거리 노선은 이동시간이 길고 이용 계층이 비교적 명확했기에 객차 내 물품은 장시간 사용과 반복, 세척, 소모 등 사용 및 관리와 관련한 가능성을 전제로 구성되었다. 특히 일등차와 식당차는 일반 객차와 구분되는 공간으로 상류층 승객과 관광객 등 이용 수요층에 한정적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수요층 구조는 역사 내 있는 그릴과 같은 양식당이나 그 외 부대시설과 유사한 성격을 지닌다. 따라서 이러한 공간들은 제한된 수요층을 대상으로 일정 수준 이상의 서비스 환경을 제공해야 했다. 이에 만철명 공예품 중에는 이러한 공간에서 사용된 것으로 여겨지는 은기를 중심으로 한 금속기와 유리기 등 당시 고급 재료로 제작된 물품들이 함께 전해진다. 이러한 유물들은 만철명 공예품이 단순한 소모품이 아닌 사용하는 공간의 성격과 특징에 따라 물품이 구분 제작, 소비되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만철명 공예품의 재질과 제작 방식은 사용 환경과도 밀접한 연관을 지니고 있다. 도자기와 유리기류는 일정 수준 이상의 내구성을 확보하면서도 대량 생산과 규격화가 가능하였고, 금속기는 파손 위험이 적고 관리가 용이하다는 점에서 객차 내 옷걸이, 자물쇠와 같은 소형 비품부터 식기나 조리기구까지 다양한 형태로 폭넓게 사용되었다.
이는 예술을 목적으로 하는 공예품에서와 같은 창작 세계를 기반으로 한 경험과 조형에 정체성을 내포한 결과물과는 분명 다른 지점이다. 일상에서 사용되던 생활 물품이 기차와 역사 등 공간이라는 성격이 명확한 사용처를 만나면서 이에 필요한 이동성과 휴대성, 반복 사용이라는 환경적 요소가 지속적으로 반영해 형성, 개량, 정형화 된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용도와 용처에 따라 편의성과 실용성을 고려해 선택된 재료와 수공예, 대량생산을 포함한 공정과 기법으로 제작된 만철명 공예품의 주요 제작 요소를 보여준다. 이러한 요소는 산업공예적 성격을 분명히 보여주는 지점이기도 하다. 특히 금속기는 구리합금재와 표면에 주석을 입힌 양철, 얇은 철판에 유약을 시유해 가벼우면서도 물에 강하고 도색, 무늬 시문 등이 용이한 양철제 법랑기가 빈번하게 사용되고 유물도 다수 남아있는 것이 이러한 제작 경향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다.
한편 현전하는 유물들은 Ⅱ장에서 살펴본 정책적 기반과도 긴밀하게 연결된다. 만철은 조선총독부와의 위탁 운영이 해지된 이후에도 조선-만주 간 열차의 공동 운영과 물자 공급에 지속적으로 관여하였으며, 공예품 제작 및 유통, 소비 체계 역시 유지하였다. 출발지와 도착지에서 만철과 조선총독부 철도국은 객차 내 물품과 시설을 공동으로 정비하고 공급하였다(배은선 외, 2014, 300). 이로 인해 식기와 장식품 등 공예품의 기종과 규격, 형식 등이 일정 부분 맞춰 공유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이유에서인지 만철 관련 공예품은 한국과 중국에 서로 유사한 스타일로 혼재한다.
이처럼 만철의 운행 노선과 열차 및 제반 공간의 운영 구조는 공예품의 제작 및 소비 환경과 사용 맥락을 관통하는 핵심 요건이었다. 만철명 공예품은 특정 노선과 공간, 이용 목적에 따라 제작 배치된 물품으로서 철도 운영이라는 산업적 구조 속에서 기능과 상징을 동시에 수행하였다.
Ⅳ. 국내 소장 만철명 공예품의 유형과 특징
전술한 바와 같이 만철명 유물은 만철 본사 소재지인 중국, 만철 경성관리국이 있었던 한국, 만철 도쿄지부가 있었던 일본을 중심으로 확인된다. 국내에 전하는 유물은 서울역사박물관, 한국철도공사 철도박물관,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서울시립대학교 박물관, 국립민속박물관, 용산역사박물관,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문화역 서울 284) 등에서 확인되며, 서울역사박물관과 한국철도공사 철도박물관에 가장 많은 유물을 보유하고 있다. 일본 국립공문서관 소장 만철 및 조선총독부 철도국 관련 문서에는 일본에서 제작되어 조선에 공급한 철도 및 제반 공간 소요 물품과 만철 조선 지부에서 사용할 공 예품의 발주 기록이 남아 있는데 현존 문서를 기준 가장 이른 사례는 1911년(메이지 44)부터 확인된다(朝鮮鉄道用品資金会計 1911-1945). 제작지는 일본 도쿄, 오사카 등지의 은기, 유리, 금속, 도자 제작소가 포함되어 있으며, 일본도기회사(日本陶器會社)와 같은 대규모 공방에서 제작된 도자기류도 적지 않다. 일본의 만주 침탈이 공식화 된 것은 1931년 만주사변 이후지만 철도를 기반으로 한 군사, 산업 조사 및 기반 구축은 그 이전부터 만철 산하 조사부를 중심으로 단계적으로 진행되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중국 만주 지역의 만철명 공예품 역시 만주국 건국 이전인 1920년대 전후부터 확인된다(그림 13

만철은 설립 초기부터 직영 계열사 제작과 외주 제작을 병행하였다. 특히 일등칸 용품, 식당차 고급 식기, 창립기념품과 같은 고급 공예품은 외주 제작 비중이 높았으며, 객차 내부와 역사에서 시설물로 사용하거나 역무원이 사용한 물품들은 기차를 제작했던 용산 철도공장 등 열차 제작 공장 등에서 함께 제작된 사례들도 존재한다(
그러나 1937년 중일전쟁과 1939년 태평양전쟁 체제로 접어들면서 만철은 운영 전반을 전시체제로 전환하였고 운영 역시 이에 맞춰 이루어졌다. 그 결과 전시에 직접 필요하지 않은 고급 식기와 수공예품의 외주 제작은 중단되었고, 자체 생산 역시 최소한의 물량으로 축소되었다(
본 장에서는 이러한 시대적, 제도적 배경을 전제로 국내에 소장된 만철명 공예품의 유형과 특징을 사례를 통하여 분석하고, 나아가 만철 마크와 명문의 표기 방식, 시문 기법을 통해 당시 만철명 공예품에 적용된 공예 기법과 제작 체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1. 유물의 종류와 특징
현재 국내에는 다양한 재질과 용도로 제작된 만철명 공예품이 전한다. 재질은 도자, 금속, 유리, 목제, 가죽으로 구분되며 이 가운데 도자기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다음으로 금속기, 유리제품이 뒤를 잇는다. 도자기는 대부분 식기류이며 금속기는 식기, 시설물, 장식품 뿐 아니라 일반 및 군용으로 사용했던 휴대용 양철제 버너, 회중시계 등 가장 폭넓은 기종이 확인된다. 유리는 식기와 기념품의 비율이 높다. 제작국은 일본, 미국, 영국 등이 다수를 이루며 조선에서 제작된 유물은 만철 용산철도공장에서 객차 내부 설치용으로 제작한 동합금제 손 잡이, 고리, 자물쇠, 장식물 등이 소수 확인된다.
용도별로는 객차 내 시설물, 조리기구, 식기, 기념품, 조명구, 문방구류, 장식품 등으로 나뉘며 이 가운데 식기와 조리기구, 기념품의 비중이 높다(그림 16

1) 식기
유물 중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식기는 도자, 금속, 유리 공예품을 중심으로 확인된다. 만철은 관리국 내 구내식당, 여행객을 위한 역사 내 직영 식당, 객차의 식당칸 등에서 다양한 식기를 사용하였다. 국내 소장 객차용 식기는 그림 18
재질별로 보면 금속공예품으로는 은제 양식기와 양철 법랑기로 만든 컵 등이 있다. 은제 양식기는 대부분 단조기법으로 만든 수공예품으로 일등칸과 식당칸, 역사 내 고급 양식당에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중 사용처가 비교적 명확하게 확인되는 사례는 경성역 양식당 ‘그릴’ 관련 유물이 있다. 그릴은 만철 주도로 건립해 1925년까지 직영으로 운영된 경성역사 내 고급 양식당으로 현전하는 일부 유물에서는 만철 마크가 분명하게 확인된다(그림 19
양철법랑기는 20세기 초부터 성행한 금속 신소재 중 하나로 얇은 철판 표면에 주석 안료를 입혀 습기에 강하고 가벼우며 내구성이 뛰어나다. 또 도자기의 청화나 철화처럼 문양을 그려 표면을 장식하기 용이해 식기 뿐 아니라 조리도구와 여러 생활용품에 널리 적용되었다. 식기에서 양철법랑기는 대체로 컵, 쟁반 등의 기종에서 나타나며 그 중 흰색 배경에 가운데에 코발트블루로 만철마크를 시문한 유물이 높은 비율을 보인다. 소스병은 투명 및 색유리 모두 확인되며 몰드 캐스팅 기법으로 제작되었다(그림 20

식기 유물 가운데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 것은 도자기이다. 양식과 일식 관련 식기가 모두 나타나며 일본식 청유자와 백자, 흑유로 제작된 물품이 다수를 차지한다. 기종은 양념종지, 컵, 커피잔, 주전자, 각종 규격의 접시와 술잔, 반찬통, 밥그릇 등이 있다(그림 22

이러한 만철명 공예품의 식기 유물은 양식과 일식을 모두 제공하기 위한 목적으로 제작, 사용된 것으로 보이며 이를 통해 당시 역사 내 식당이나 객차 식당칸에서 제공된 음식의 성격과 서비스 유형을 짐작할 수 있다. 식기 유물은 철도 운영 공간과 이용자 계층에 따라 서로 다른 식음료 서비스 환경이 설정되었고 이에 맞는 기종과 재질을 선택해 사용했음을 보여준다. 양식과 일식 식기를 병용한 구성은 역사 내 식당과 객차 식당칸에서 제공된 음식과 서비스가 복합적인 성격을 지녔음을 시사하며, 은제, 도자, 유리 등 재질의 차이는 사용 공간과 이용 대상에 따라 구분해 사용한 사실과 연결된다. 특히 일등칸과 고급 식당에서 사용된 정교한 은제 식기와 도자 식기는 실용성을 전제로 하면서도 일정 수준의 조형성과 완성도를 유지하고자 한 의도가 엿보인다. 이러한 점에서 식기류는 일상적 사용을 목적으로 한 산업 공예품이면서도 철도라는 근대적 제도 공간 안에서 요구된 서비스의 질과 이미지를 물질적으로 구현한 실용 공예품이라 이해할 수 있다.
2) 조리도구
조리도구는 유물의 수는 많지 않으나 비교적 다양한 기종이 확인된다. 금속과 도자로 제작된 유물이 중심을 이루며 착즙기, 강판, 국자, 깔대기, 계량컵, 곡물이나 밀가루를 뜰 때 사용한 손삽 등이 확인된다.
이 가운데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내구성이 뛰어나고 무게가 가벼운 양철제 금속기이다. 구연부의 굴림 처리와 프레싱 흔적을 통해 형태는 기계로 제작하고, 착색이나 시문과 같은 후작업은 수작업으로 처리한 반수공 방식의 물품이 다수 확인된다. 이는 조리도구가 계량, 혼합, 교반 등 음식을 만드는 과정에서 반복적이면서도 역동적인 사용이 요구되며, 조리 후 세척 역시 빈번하게 이루어진다는 점을 고려 경량이면서도 내구성이 우수한 양철 제품이 선호되었음을 보여준다(그림 24

이러한 조리도구의 구성과 적용된 제작 기법, 재질적 특징은 국내 소장 유물 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의 동일한 성격의 공예품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양상이다. 조리도구 유물은 만철의 철도 운영 공간에서 요구된 실질적인 사용 조건을 충족하기 위해 재질과 제작방식이 선택되었음을 보여준다. 반복적인 사용과 세척, 이동과 보관을 전제로 한 조리 환경 속에서 경량성과 내구성을 갖춘 양철제 금속기와 수분에 강한 도자 조리도구가 병용된 점은 장식적 성격보다는 기능적 효율과 실용성을 우선하여 제작, 사용되었음을 시사한다. 이와 같은 조리도구의 성격은 이후 살펴볼 기념품과 대비되는 모습이라고도 할 수 있으며, 만철명 공예품 내부에서도 용도와 사용 맥락에 따라 형태와 표면 처리, 시문 기법 등이 달리 적용되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3) 기념품
기념품은 전체 유물 가운데 유리 제품의 비중이 가장 높으며 화병과 와인잔 등 만철 창립 10주년을 기념하여 제작한 물품이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한다. 일본 국립공문서관 만철 경성관리국 공급 관련 재무 문서에 따르면 1914년부터 1916년까지 3년간 총 180여 점의 유리기를 일본 오사카에서 주문한 사실이 확인된다(朝鮮鉄道用品資金会計 1914-1916).
당시 오사카는 유리 산업이 활발했던 지역이었으나 구체적인 제작 공방은 문헌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이 시기 주문한 유리기 일부는 국내에 전하는 기념품과 유사한 계열의 물품이었을 가능성이 있다(그림 26

기념품 중 국내에 현전하는 <만철명 은제 회중시계> 역시 만철에서 기념품으로 주었던 물품이다. 만철은 근속기간이 길거나 공로가 있고 관계를 지속해야 하는 인사들에게 답례로 정교하게 수공 제작한 회중시계를 주었다(原田勝正 1981, 150-152). 일본과 중국에 소장된 만철명 은제 회중시계 유물을 참고하면 1910년대~20년대는 미국 월섬사(Waltham.Co) 제품이, 1930년대에는 일본 세이코사 제품이 확인된다. 반면 국내 소재 유물은 현재 월섬사 제품만 확인된다(그림 28
월섬사는 1850년 창립한 미국 시계회사로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수공 회중시계로 명성을 얻었으며 1차 세계대전기(1914-1918)에는 군용 손목시계와 회중시계 형태의 나침반을 미군에 공급하기도 했다. 국내에서 확인되는 20세기 초 철도 관련 월섬사 회중시계는 은제, 동합금제로 나뉜다. 동합금제는 전차 운전사와 역무원이 사용한 사례가 많고 은제 시계는 기념품으로 확인된다11. 현전하는 국내 소장 만철명 은제 회중시계는 1890년대에서 1920년대까지 생산된 금, 은제 수제품 라인이다. 이를 만철 경성관리국 존속 시기와 연결하면 유물의 제작연대는 1910년대에서 1920년대로 추정할 수 있다(Waltham.Co Webpage).
기념품 유물은 만철이 철도 운영의 실무적 영역을 넘어 기업의 정체성과 위상을 대내외적으로 표상할 필요가 있었던 지점에서 제작, 활용된 물품들로 이해할 수 있다. 창립 기념 유리기와 은제 회중시계는 특정 계기나 인물을 대상으로 선사하기 위한 목적으로 제작된 것으로 일상적 사용을 전제로 한 식기나 조리기구와는 다른 표상성을 우선적으로 고려했음을 보여준다. 특히 유리와 은과 같은 당시 고가의 재료 선택과 명문 및 기념 연도의 명확한 표기는 만철의 제도적 성격과 기업 이미지를 물질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시각적 장치로 기능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만철명 기념품은 실용성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으면서도 표상과 기념이라는 목적에 따라 재질과 제작 방식이 선택된 공예품이라 이해할 수 있다.
2. 만철 마크 및 회사명 표기 유형과 시문기법
만철명 유물에서는 세 가지 표기 방식이 확인된다. 첫 번째는 만철 마크만을 시문한 경우, 두 번째는 회사명만을 기입한 경우, 세 번째는 마크와 회사명을 병기한 경우이다. 만철 마크는 재질과 기형의 특성에 따라 음각, 양각, 전사, 그리기나 쓰기와 같은 회화적 수법 등 다양한 방식으로 시문되었다.
먼저 글자 표기는 대체로 붓으로 쓴 것과 유사한 필치로 표현되었으며, ‘남만주철도주식회사(南滿洲鐵道株式會社)’, ‘만철(滿鐵)’, ‘만철회사(滿鐵會社)’ 등의 형태로 기입되었다. 또 기술연구소와 같은 만철 내 세부 기관을 병기한 사례도 확인된다. 그리고 직인을 찍은 것과 유사한 방식으로 회사명을 표현한 계량컵도 존재한다. 아울러 전사로 마크를 찍고 그 아래 회사명을 적은 사례도 존재한다.
만철 마크는 1907년에 지정된 이래 한국, 중국, 일본에서 공통적으로 적용되었기 때문에 마크만으로 특정 유물이 경성관리국에서 사용된 것인지 여부를 단정하기는 어렵다. 다만 마크의 제정 연대를 통해 마크가 있는 유물들이 모두 1907년대 이후 제작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마크가 시문된 유물은 전체 유물 중 가장 큰 비율을 차지한다. 금속과 유리에서는 주로 선각이나 프레스로 방식으로 마크를 시문하였다. 이 경우 생산 단계에서 마크를 함께 시문하거나 이미 완성된 기성품에 스탬프로 마크 프레스를 하는 공법이 활용되었다. 또 일부 은제공예품에서는 만철 마크와 함께 만철의 영어 약어인 SMR(South Manchuria Railway)을 선각으로 병기한 사례도 보인다. 도자기에서는 서울시립 대학교 박물관 소장 <주전자>와 같이 몰드캐스팅 기법으로 제작할 때 마크까지 몰드에 반영하여 성형한 사례도 있다. 도자 유물의 마크는 음각, 양각 두 형태로 나타나며 함께 구성되는 문양이나 명문도 동일한 기법으로 시문되는 경우가 많다.
전사기법을 활용한 마크 시문은 양철법랑기와 도자기에서 두드러진다. 이 경우 안료나 유약을 이용해 마크를 그리거나 찍는 방식이 사용되었으며, 일본 수출용 도자에서 확인되는 형지 접회 기법이 가장 많이 나타난다. 이 밖에도 동판전사나 고무인을 활용한 사례도 있었다윤소라 2013, 72-73. 이러한 유형의 유물에서는 문양을 직접 그려서 표현한 것이 많았으며, 출토 유물 역시 대부분 이 유형에 속한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서울 동대문운동장 축구장 폐기층에서 출토된 컵을 들 수 있다.
대표적인 마크, 명문 시문 유형12을 정리하면 표 1
표 1 만철명 유물의 마크 및 명칭 시문 기법과 유형
| 마크 시문12 | 회사명 시문13 | 마크, 회사명 병용 | |||
|---|---|---|---|---|---|
| 선각 | 스탬프 프레스 | 전사 | 전체명칭시문 | 축약명칭시문 | |
| <은제스푼>, 20세기 초,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 문화역 서울 284 | <잉크병>, 20세기 초, 서울역사박물관 | <백자잔>, 20세기 초, 서울 동대문운동장 출토 | <사기컵>, 20세기 초, 서울역사박물관 | <사기컵>, 20세기 초, 서울역사박물관 | <차주전자>, 20세기 초, 서울시립대학교 박물관 |
Ⅴ. 맺음말
새로운 문물의 확산은 본래의 기능적 목적을 넘어 그 시대의 정치, 사회, 경제, 문화적 맥락을 반영하는 복합적인 의미를 지닌다. 만철명 공예품 역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는 철도 산업의 도입과 확장 과정 속에서 기술, 시설, 정책 등의 상호작용하며 형성된 공예적 산물이라 할 수 있다. 본 연구는 이러한 관점에서 만철명 공예품의 개별 기물의 조형성에 국한하지 않고 철도라는 근대적 산업 체계와 운영 공간 속에서 형성, 사용된 물질문화로서 분석하고자 하였다.
일본은 러일전쟁을 기점으로 조선 철도를 군사적, 정책적 수단으로 적극 활용하였다. 일본의 팽창정책과 조선의 지정학적 위치는 일본이 조선 철도에 집중적으로 개입하게 된 배경이 되었으며 만철은 그 최전선에서 활동했다. 1911년 경성관리국 설치 이후 만철은 시설 정비와 물류 운송, 관광 및 여객사업, 식음료 공간과 숙박 시설 운영 등 다양한 영역의 사업을 전개하였고, 이 과정에서 일본 철도 공간에서 사용되던 공예품의 구성 체계도 함께 조선에 도입되었다. 본 논문에서 분석한 만철명 공예품의 기종과 형식은 이러한 정책적, 기능적 활용과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다. 이 시기 형성된 공예품의 형태와 구성은 만철의 조선 철도 위탁 경영 종료 이후 조선총독부 철도국에 자연스럽게 이관되었고, 1930년대 일본이 식민지 정책의 성과를 대내외적으로 홍보하기 위해 추진한 조선 철도 관광의 공예품 체계로 이어졌다. 이후 만주국 성립과 함께 이러한 구성 방식은 중국 내 만철 노선까지 확대 적용되었다. 만철명 공예품은 이와 같은 흐름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물적 자료라 할 수 있다.
한편 만철명 공예품은 목적과 사용 공간에 따라 재질과 구성 방식이 비교적 명확하게 구분된다. 실용성이 강조된 식기와 조리도구에는 내구성이 높고 대량 생산이 가능한 도자기와 양철제 법랑기가 사용되었고, 각종 시설물에는 경도가 높고 내구성이 좋은 철과 동합금이 폭넓게 활용되었다. 반면 역사 내 고급 양식당이나 객차의 식당칸과 같이 실용성과 표상성이 함께 요구되는 공간에서는 은제와 유리제 수공예품이 배치되었고 도자기 또한 일본도기회사나 동양도기회사와 같은 고급 생산처 제품이 주를 이루었다. 더불어 창립 기념품이나 표창과 같이 상징성이 요구되는 공예품에는 의도적으로 마크와 명문을 선명하게 새기고 정교한 조형성을 더함으로써 만철의 정체성과 기업 이미지를 시각적으로 드러내고자 하였다.
이처럼 만철명 공예품은 실용성과 표상성을 내재한 복합적 성격을 지니며 재질 선택과 제작 방식, 시문 기법을 통해 철도라는 근대적 제도 공간의 성격을 물질적으로 구현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만철명 공예품은 장식 공예나 순수 미술의 범주라기보다 근대 철도 산업이라는 제도적 환경 속에서 제작 주체의 뚜렷한 목적을 반영해 생산, 사용된 산업공예품의 성격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즉, 만철명 공예품은 기능 수행을 전제로 하면서도 제도와 권력, 기업 이미지를 함께 표상한 공예품으로 근대 산업 사회에서 공예가 수행한 산업적 역할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아울러 만철명 공예품은 1920년대 후반에서 1930년대 활성화된 조선 철도 관광 관련 유물의 형성과 전개 과정을 이해하는 중요한 기초자료이기도 하다. 만철은 조선 철도 위탁 운영 기간 동안 만주 진출을 염두에 둔 다양한 사업을 전개하는 한편, 조선총독부 철도국과 협력하여 관광 노선 개발과 여행 상품 구성을 주도하였다. 이는 단순한 상업적 활동이라기보다는 러일전쟁 이후 지속된 일본 국내의 불만 여론을 완화하고 식민 지배의 성과를 대내외에 선전하기 위한 정책적 전략의 일환이었다. 현재 국내에 남아 있는 일제강점기 철도 관련 공예품은 조선총독부 철도국 물품이 가장 큰 비율을 차지하지만 1911년부터 1925년 사이 만철이 조선 철도 체계와 철도 관련 공예품 형성에 미친 직접적 영향을 고려해보면 만철명 공예품에 대한 연구는 분명 필요하다. 향후 본 연구가 철도 관련 공예품을 포함한 일제강점기 공예 연구의 범위와 내용 확장에 있어 기초 자료로서 조금이나마 기여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