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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origins of Korean container logistics and transnational connectivity: War and logistics

Doojoo Baek1

1 Pusan National University

Published: January 2026·Vol. 90, No. 45권 1호·pp. 41-84

DOI: https://doi.org/10.33334/sieas.2026.45.1.41

Abstract

In the historical development of military logistics, the Korean War heralded the rise of the U.S. Army's CONEX system, considered the prototype of containerization. The Vietnam War marked a turning point in the global spread of containerization, achieving a ‘Co-evolution’ in both military and commercial logistics. As a direct participant in both these ‘hot wars’ during the Cold War era, Korea experienced the container logistics revolution. This study aims to clarify Korea's strategic position and transnational connectivity within the historical trajectory of this container logistics revolution. To this end, it analyzes the decolonization of the Pacific, the construction of transnational connectivity by the US empire, the origins of Korean container logistics through wars, and the process of Korea's integration into the transnational connectivity of the US military-industrial complex. The findings reveal that the origins of Korea's container logistics and the establishment of its transnational connectivity were a process of integration into the web of connections of the U.S. military-industrial complex under the U.S.-led global hegemonic strategy. This process was shaped by the interaction and influence of the postwar imperial project of global militarization, the ‘internationalization’ of the militarist developmental state, and Hanjin's ‘imitation learning’ through its participation in the U.S. military's OSP(Offshore procurement) during the wartime.

Keywords:ContainerizationMilitary-industrial complexTransnational connectivityHanjinLogistics infrastructure
Funding: 대한민국 교육부, 한국연구재단 (NRF-2025S1A5B5A16010199)

Ⅰ. 서론

물류혁명은 시간과 공간 제약으로 인한 ‘흐름의 마찰’을 극복하는 것이다. 이는 자본주의 작동의 불규칙성을 매끄럽고 평평하게 연결하는 거대한 전환의 과정이다. 전 세계를 촘촘하게 연결하는 현대사회의 물류는 자본주의 순환 시스템 전반에 부가가치 및 이익 극대화를 목표로 하며 자본축적의 재구성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해왔다. 이러한 거대한 전환은 ‘공간적 조정(spatial fix)’으로 상품, 자본 그리고 생산과정의 이동수준을 높여 자본주의의 고질적인 과잉 축적 문제 해소와 축적의 세계화를 가능케 했다(Chua 2018; 2021; Danyluk 2018). 물류는 자본순환을 가속화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마찰 없는 흐름(frictionless flow)’을 위한 더 빠르고 저렴한 대규모 물류인프라를 구축해야 한다. 물류인프라는 생산과정에 2차적인 요소가 아니라 그 과정 자체에 포함된 핵심적인 요소이다.

세계화는 초국적 인프라의 구축과정이자 결과로 부와 권력의 이동을 반영한다. 역사적으로 바다는 대륙과 대륙, 상이한 문명을 연결해 왔고, 유럽 제국들의 대항해시대에서 보듯, 바다와 해상무역의 주도권은 제국의 지배력과 권력강화를 위한 필수적 조건이었다. 같은 맥락에서 현대 컨테이너 물류 연결망은 부의 이동경로를 나타낸다. 초기 컨테이너 물류혁명은 대서양에서 시작됐지만 베트남전쟁을 기점으로 태평양으로 중심 축이 전환됐다(레빈슨, 2017). 이와 같은 컨테이너 물류혁명과 연결망의 전환은 부의 지리적 집중을 북미-유럽 중심에서, 북미-유럽-동아시아로 이어지는 ‘글로벌 성장 삼각형’으로 재배치했다(White 2019, 86-87). 또한 이 컨테이너 물류혁명은 군사적·상업적 혁명인 동시에 정치적 프로젝트의 일환이었다. 물류혁명의 정치적 의미는 제국의 확장을 촉진할 수 있는 초국적 인프라 구축에 대한 열망을 반영했다(Chua et al. 2018, 619-620). 과거 제국들과 마찬가지로 초국적 물류순환은 단순한 경제적 과정이 아니라 권력이 투영된 세계질서 형성의 중심이 되는 전략적 과제다. 특히, 냉전은 해양강국으로 새롭게 산업화된 국가의 출현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관점을 제공한다(Campling and Colas 2021).

한국은 냉전 시기 대표적인 두 ‘열전(hot war)’의 직접 당사자였다. 공교롭게도 컨테이너화(containerization)의 역사적 과정에서 한국전쟁은 현대 컨테이너화의 원형으로 평가되는 미군 코넥스(CONEX: CONtainer EXpress)의 등장을 알렸으며, 베트남전쟁은 컨테이너화의 세계적 확산에 변곡점이었다(백두주 2025a).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은 역사적으로 물류기술 혁신의 공간이자 ‘인큐베이터’ 역할을 했다. 기존 컨테이너화의 역사는 서유럽과 북미 관점에서 주로 다루어졌으나(Cudahy 2006; 2010; Donovan and Bonney 2006; Ham and Rijsenbrij 2012; Henins 2013; 2016), 최근 일부 연구들이 냉전 시기 동아시아 및 동남아시아 국가와 행위자들의 두드러진 역할을 재조명하면서 냉전의 아시아 지역에 주목하고 있다(백두주 2025a; Chung 2019a; 2019b; Di Moia 2020; 2022). 이 연구들은 동아시아 및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국제무역과 경제협력의 기반이 되는 많은 기술인프라를 동원하고 구현하는데 상당한 역할을 했다는 점을 환기시킨다.

본 연구는 초국적 연결성을 위한 태평양의 컨테이너 물류혁명에 주목한다. 1956년 최초의 현대적 컨테이너 운송 이후 북대서양은 컨테이너화 기술을 위한 ‘실험의 장’이었고, 베트남전쟁은 ‘기술검증의 장’, 그 이후 동아시아 산업화 및 중국의 부상은 환태평양지역을 컨테이너 물류 ‘확산의 장’으로 만들었다. 이 연구의 목적은 이러한 세계 컨테이너 물류혁명의 역사적 경로에 한국의 전략적 위치와 초국적 연결성을 규명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한국이 초국적 컨테이너 물류 연결망에 통합되는 정치·경제적 과정을 추적한다. 한국경제의 성장원인은 다양한 관점에서 논의되어 왔지만 컨테이너 물류의 기여도는 상대적으로 부각되지 못했다. 따라서 본 연구는 한국이 글로벌 통상국가로 발전한 이유를 컨테이너 물류의 기원과 초국적 연결성 구축과정을 통해 새롭게 조명할 것이다. 한국의 압축적 산업화와 세계 경제로의 통합과정은 세계 컨테이너 물류혁명의 흐름에서 벗어났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따라서 한국 컨테이너 물류의 역사적 기원을 탐색하는 연구주제는 초국적 연결성의 궤적을 규명하면서 글로벌 통상국가로의 발전과정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공할 수 있다. 이를 위한 주요 연구내용은 한국 컨테이너화의 기원을 미군주도의 세계 패권전략 및 ‘군산복합체(military-industrial complex)’의 초국적 연결망에 통합·편입과정과 연계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태평양 탈식민지화와 미 제국의 초국적 연결성 구축, 전쟁과 한국 컨테이너 물류의 기원, 한국의 미 군산복합체 초국적 연결성에 통합과정을 분석한다. 이 과정에서 한국 컨테이너화의 세계적 흐름과의 중첩성(overlapping)과 차별적 맥락성(contextuality)도 드러날 것이다.

Ⅱ. 태평양 탈식민지화와 제국의 초국적 연결성 구축

1. 제국의 전 지구적 군사화와 영구적 전쟁

현대 무역행위와 구조는 제국주의, 착취, 영토 정복의 오랜 역사에 뿌리를 두고 있다. 물류혁명은 자본운영의 패러다임 전환을 의미하는 동시에 수 세기 동안 이어져 온 제국주의적 연결성과 식민화과정의 지속을 의미한다. 물리적 이동의 혁신과 새로운 관심의 중심에는 제국주의적 확장을 촉진할 수 있는 초국적 인프라에 대한 열망이 있었다. 초국적 군사·상업 연결망의 개척과 구축은 영국을 비롯해 과거 제국들인 네덜란드, 포르투칼, 스페인과 전후 미 제국의 핵심적 목표였다1)(Chua et al. 2018, 619-620). 2차대전 당시 미국도 전쟁 수행을 위해 본토에서 수 천마일 떨어진 전장을 보호하고 연결하는 초국적 물류인프라 및 시스템 구축에 집중했다. 이 과정에서 해운~항구~육상 물류인프라의 구축은 필수적 과제였으며, 미군은 2차 대전 이후 전시 산업적 지원, 군사경제와 민간경제의 통합, 적절한 군사 물류시스템, 해외 전초기지 유지와 통제, 병력과 물자의 자유로운 이동을 가능케 하고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극복할 수 있는 물류의 중요성을 절실히 인식했다(Sharder ed. 1997).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는 전후 미국의 제국주의적 야망을 군산복합체에 기반한 영구적인 ‘군도 제국’으로 개념화했다(커밍스 2011). 군도 제국은 해외 기지에 영구히 주둔하는 미군과 광대한 초국적 군사기지 연결망을 의미한다. 미국의 군도는 영토적 존재로 실재하지만, 제대로 된 명칭도 공식적인 국제관계에서 잘 드러나지 않는다. 미국은 과거 제국들처럼 직접적인 식민지를 운영하지 않지만 광범위한 영토적 군도 제국을 통제한다. 냉전 시기 군도 제국은 공산주의 봉쇄, 이어 탈냉전 시대 진입과 함께 ‘깡패(불량) 국가’, 테러와의 전쟁으로 정당화 및 유지됐다. 유럽국가들과 이전 식민지들은 미군 존재를 수용했고 미군은 전후 주둔시설을 ‘자유 세계’에 건설해 나갔다. 1950년대 말까지 미국은 42개국 군사기지 조항을 포함한 8개의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해 100만명 이상의 미군과 그 가족을 해외에 배치했다(Chung 2019a, 36-37). 현재(2021년 기준) 미국은 최소 80개국에 약 750개의 군사기지를 보유하고 있으며 일본이 120개(53,700명)로 최대 규모이고 다음으로 독일 119개(22,900명), 한국 73개(26,400명) 순이다. 미군은 2차 대전 이후 일본 주둔을 시작했고,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한국에 ‘영구 주둔’ 중이다(Hussein and Haddad 2021; Kane 2024, 22-26).

로버트 레이섬(Robert Latham)도 전후 미국 주도의 자유주의적 국제 질서 형성과정에서 해외 확장의 조직적 형태에 주목했다. 이에 따르면 패권국가는 조직적·물질적 자원을 국경 너머에 배치할 수 있는 구성적 존재(constitutive presence)로,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그리고 냉전 시기 적대적 제국인 미국과 소련은 전례 없는 수준으로 국가조직을 초국적으로 확장했다(Latham 1997, 65-70). 이 제국의 ‘외부 국가들(external states)’은 국가 외부 영토에 배치된 국가기관으로 패권국가의 특징을 포착하는데 중요한 척도 중 하나다. 외부 국가는 국가의 경계와 영토를 넘나드는 초국적 기관으로 대표적인 기관이 군사기지다. 시메온 만(Simeon Man)은 미국의 패권전략을 태평양의 탈식민지화와 새로운 제국 그리고 ‘영구적 전쟁’ 수행으로 개념화했다(Man 2018). 이 관점에 의하면,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은 태평양 해외(역외)조달(OSP: Offshore procurement), 인프라 구축, 군사훈련, 민간인 노동자 동원 등 다양한 군사 및 경제활동으로 수행한 영구적 전쟁 중 발생한 ‘열전’이다. 이 제국주의 프로젝트는 초국적 물류인프라 구축을 통해 실행될 수 있었으며 냉전 시기 미 제국은 인프라 권력을 통해 자본주의 지경학적 질서의 문법을 친숙하게 해 그들의 연결망에 ‘자유 세계’를 통합했다(Attewell 2020; 2023). 제국의 전 지구적 군사화는 이 ‘자유 세계’ 정부를 위한 군사원조와 연계해 1950~79년까지 미국은 총 107.3억 달러를 지원했으며2) 극동, 동남아, 중동 등 전략적 국가들이 수혜국이었다(Klare and Arnson 1981, 43).

탈식민지시대 경제적 제국주의는 군사적 강압이라는 교리를 동시에 요구했다. 제국은 ‘전쟁 상태’를 의도적으로 조성하고, 군사적 우위를 통해 제국 중심의 ‘패권적 궤도’에 동맹국들을 편입시켜 세계질서의 지배력을 공고히 했다(Wood 2003). 전후 미국의 압도적 군사우위는 군사비 지출 및 GDP 대비 군사비 비중으로 가늠할 수 있다. 1953년 미국 군사비는 51,516백만 달러로 이는 G7 국가 중 미국을 제외한 G6 국가(독일,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캐나다, 일본)들을 합친 12,992백만 달러보다 세배(296.5%)나 많은 규모다. 미국 군사비는 베트남전쟁 시기 급증해 1969년에는 84,990백만 달러에 이른 반면 같은 시기 나머지 G6 국가들의 군사비는 21,399백만 달러로 큰 격차(297.2%)를 보였다. GDP 대비 군사비 비중은 1953년 미국은 13.6%였지만 G6 국가들은 5.9%로 7.7%p 차이 났고 이 격차는 베트남전쟁 전까지 감소하다 전쟁이 본격화된 이후 다시 증가 추세로 돌아섰다3). 분명한 것은 패권국가의 군사비 및 GDP 대비 군사비 지출비중은 다른 선진국들(G6)을 압도했다는 것이며 이는 경제적 우위와 동시에 군사력을 토대로 한 패권국가의 전형을 보여준다.

제국의 전 지구적 군사화와 확장은 군산복합체(MIC) 형태로 실행됐다. 이 군산복합체는 초기부터 초국적 속성을 내재했으며 전후 미국은 ‘자유 세계’ 구축을 위해 이들의 활동 영역과 범위를 국내는 물론 전 세계로 확장해 나갔다. 미군의 OSP 는 점차 동아시아를 비롯한 신흥국 기업에 분배되기 시작했으며, 미군의 조달계약 시스템은 계약자(기업)에 보호된 시장뿐만 아니라 초국적 공급망과 비즈니스를 동기화하는 방법 그리고 ‘기술이전’을 촉진시켰다(Campling and Colas 2021; Chung 2019a, 45-46). 짐 글래스만(Jim Glassman)의 초국적 계급동맹인 ‘태평양 지배계급’ 개념은 한국 컨테이너화의 기원을 탐색하는데 중요한 시각을 제공한다(Glassman, 2018). 이 개념은 미국 자본주의의 세계적 팽창, 태평양 연안 국가들의 세계경제 통합과 부상, 초국적 자본가·정치 엘리트들의 출현과 지배과정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이 논의에 따르면, 태평양 정치·군사적 연결망은 미국 주도의 정치·군사적 전략 속에서 아시아 신흥국들이 편입되는 맥락에 주목해야 하며 이 권역의 ‘군사전략과 개발전략의 이중주’가 주조한 과정이자 결과이다4). 핵심은 이들 대부분 국가들이 미 군산복합체의 OSP 지출로부터 혜택을 받았으며 이러한 군사자본(military capital)이 지역경제에 미치는 동학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동아시아 기적’은 미 군산복합체와 태평양 지배계급 출현이라는 지리-정치경제적 요인에 의해 가능했으며 특히 OSP 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즉 미국의 OSP 가 없었다면 성공적 발전국가의 복제가능성도 없다(Glassman and Choi 2014). OSP 계약은 발전국가 기업들에게 사실상 보장된 시장기회와 ‘횡재 수익’을 제공해 더 개방된 글로벌 시장에 진출하기도 전에 빠르게 규모의 경제를 달성하고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게 했다.

2. 전쟁과 군산복합체

역사적으로 민간기업은 ‘국가의 대리인’으로 전쟁과 군대 유지를 위한 자원을 공급해 왔다(Shrader 1999, 1). 특정 물류 및 기술업무는 민간 계약업체들에 의존해 왔고 이러한 경향은 세계대전과 냉전 기간 내내 계속됐다. 1차 세계대전의 전쟁 동원과정은 미국사회의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을 모호하게 만들면서 민간기업을 전쟁 협력 파트너로 끌어들였다. 당시 국가와 자본가로 구성된 ‘전쟁산업위원회(War Industries Board)’는 생산관리, 구매를 통해 ‘산업의 힘’을 전쟁에 동원했다(Kidwell 2005). 이러한 동원과정이 계속된 결과, 민간 계약업체와 정규군 비율은 1차 세계대전 시 1:20에서 2차 세계대전 1:7, 베트남전쟁 수행 중에는 1:6으로 민간업체 비중이 점차 높아졌으며, 1980년대 영미식 신자유주의 기조는 이러한 흐름을 더욱 촉진해 군사력의 아웃소싱을 더욱 선호했다(Erbel and Kinsey 2015, 3-4).

그렇다면, 미군이 군사력의 민영화(privatization)를 추진한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 자유주의적 접근으로 시장이 군대보다 군사공급망 서비스를 제공하는데 더 효율적이라는 관점이다. 둘째, 기능주의적 접근은 현대 무기시스템의 정교화에 따라 군대가 소규모 핵심역량 군대로 변모해 많은 지원 기능인력을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셋째, 정치적 비용 계산 측면에서도 정부는 작전에 투입하는 병력 수를 제한해 위험 및 민감한 지정학적 상황을 피하고 대중적 지지 얻기 유리했다. 넷째, 전쟁 비용 지불방식에서 국가는 ‘평화시간(peacetime)’을 가정하여 국방 자금을 조달하기 때문에 상비군을 줄여 기본 예산이나 평시 예산을 절감할 수 있었다(Erbel and Kinsey 2015, 5-8). 마지막으로 시장의 영역을 확장해 특정 국내 산업을 육성하는 효과도 있다. 특히 전략적인 유치산업의 경우 국가가 보호된 시장을 제공해 산업경쟁력 확보에 도움을 줄 수 있었다. 미군은 물류혁명 없이 전쟁 수행을 위한 군사혁명도 없다는 결론 하에 민영화를 지속적으로 추진했으며(Moore 2017, 7-8), 우선적인 군사력의 민영화 분야는 물류영역이다.

미 군산복합체는 두 차례 세계대전 기간에 형성된 민군 파트너십을 기반으로 한국전쟁을 수행했다. 미 육군은 전쟁기간 동안 15억 2천만 달러의 계약비용 지출과 한국 및 일본 노동자 24만 5천명 등 상당수의 현지 민간인력을 고용했다(Kidwell 2005, 15). 전쟁 중 민간인력의 활용은 미 육군의 인력절감 효과를 가져왔으며 만약 한국 노동력이 없었다면 미군은 보급 라인에 전투부대 전체 사단을 배치해야 했다. 베트남 전쟁 시 미군은 군사력의 민영화를 더욱 확대했다. 정치적으로는 미국 존슨대통령이 예비군 동원 거부로 계약 노동력과 기타 민간서비스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졌다. 전쟁지원을 위해 35개 미국기업이 배치됐고, 4개 민간업체로 구성된 컨소시엄인 BRI-BRJ 는 운영 정점 시기 남베트남 내 50개 지역에서 5만 2천명 이상의 민간인력을 고용했다(Kidwell 2005, 16). 이들 민간기업들은 주로 물류, 건설, 기지운영, 석유공급, 높은 기술 시스템 유지보수 및 기술지원 업무를 담당했다(Sharder 1999, 7-8).

표 1

표 1 베트남전쟁 시 미군 계약업체의 민간인 고용 현황(1967~69년)

연도지역미국제3국베트남합계
1967년
(12월)
I CTZ7582,56616,72120,045
캄람만7633,2268,53912,528
사이공3,5012,99635,71742,214
퀴논3736488,9189,944
전국8,58813,439134,522156,549
1968년
(12월)
I CTZ1,7214,97024,15130,842
캄란만8362,77810,32913,943
사이공3,2632,43232,91538,610
퀴논4602,6678,43811,565
전국11,00418,175141,628170,807
1969년
(9월)
I CTZ1,6894,98925,84532,520
캄란만8682,46110,45513,784
사이공2,9592,26325,12130,343
퀴논5212,7268,28011,527
전국9,91817,573146,929174,420

*주: I CTZ(Corps Tractical Zone)는 4개 군 전술구역 중 하나로 남베트남 최북단 지역에서 북베트남 접경지역을 담당함. ICTZ는 다낭을 포함한 5개의 성으로 구성되었으며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임. 출처: Military Assistance Command, Vietnam(1969) 데이터를 토대로 작성.

은 베트남전쟁 시 미군 계약업체의 민간인 고용현황을 나타낸 것이다. 베트남군사원조사령부 통계(Military Assistance Command, Vietnam 1969)에 따르면, 미군 계약업체에 고용된 민간인 고용인원은 1967년 12월 기준 총 156,549명이며 국가별 구성은 미국인 8,588명(5.5%), 제3국인 13,439명(8.6%), 베트남인 134,522명(85.9%)으로 현지인이 가장 많지만 한국과 필리핀인을 포함한 제3국인이 미국인보다 많다. 1969년 9월에는 총 민간인 고용인 수는 174,420명으로 11.4% 증가했으며 국가별로는 미국인 15.5%, 제3국인 30.8%, 현지인 9.2% 늘어나 제3국인 증가율이 가장 높았다. 전쟁 당시 한국의 기술자 인력은 미 민간군사기업과 현지 진출 국내기업에 취업 및 파견됐다. 전쟁 기간(1965~72년) 베트남에 진출한 기술인력은 29개 미 민간군사기업에 15,722명, 60개 국내 회사에 9,559명 등 총 25,331명(출국자 기준)이었으며, 주요 기업별 한국인 취업자 수는 미국 PHLL CO 가 4,519명을 고용해 가장 큰 규모였고, 다음으로 RMK-BRJ(3,581명), VINNELL(3,490명) 순이다. 국내 업체는 주로 물류와 건설기업의 고용 규모가 컸다. 퀴논항을 운영했던 물류기업 한진상사가 3,475명, 다낭항의 물류를 담당했던 통운경남이 1,996명으로 가장 많았다(국방군사연구소 1996, 277).5)

한국기업의 베트남전쟁 대규모 참여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우선, 참여가 가능했던 것은 미군 민영화 전략의 결과다. 당시 미 국방장관(1961~68년) 로버트 맥나마라(Robert Mc Namara)는 민간시스템 분석가들을 중심으로 방위물자 조달시스템의 합리화를 위해 민간기업의 효율성을 군대에 도입하기 위해 전방위적으로 노력했다(Deavel 1999, 8-9). 1961년 군사물류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설립된 물류관리연구소(LMI)도 이러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냉전 기간 미군의 군사정책은 비용억제 압력에 의해 큰 영향을 받았고, ‘영구적 전쟁’의 장은 미군의 초국적 물류기술의 확산을 위한 핵심장소였다(Chung 2019a). 다른 한 편, 이와 같은 한국기업들의 베트남전쟁 대규모 참여는 미국 군산복합체의 초국적 연결망에 편입 및 통합되었다는 의미이고 ‘태평양 지배계급’의 하위 파트너 기능을 수행한 것이다.

Ⅲ. 전쟁과 한국 컨테이너 물류의 기원

1. 한국전쟁과 컨테이너의 원형: 코넥스

2차 세계대전은 전례 없는 군사물류의 긴급성과 대규모 화물수요를 발생시켰다. 방대한 양의 군수품을 여러 대륙과 전선으로 이동시켜야 했고 군사적 성공은 전 세계 전장을 잇는 초국적 물류인프라와 연결망 구축에 달려 있었다. 미군은 초국적 연결망 내 흐름의 마찰을 제어하기 위해 긴급한 해결책이 필요했다. 1944년 미군은 교통군단위원회(Transportation Crops Board), 이후 1950년 포트 유스티스(Fort Eustis) 교통위원회를 중심으로 물류기술 개발 노력에 전력을 다했다. 위원회의 운영시험 기관인 교통연구개발기관(TRADS)은 코넥스를 비롯한 혁신적 물류개념과 장비 개발 및 테스트를 실행했다(King, et al. 2001, 295-296)6. 코넥스는 군사 물류기술 진화의 결과물로, 이 기술개발에 영감을 준 이전 기술은 화물‘단위화(unitization)’ 기술로서 물류의 팔레트화(palletization)와 리프트 밴(lift van)이다. 19~20세기 초 도입된 팔레트화는 모듈화, 기계화, 효율성의 원칙 적용으로 ‘복합(intermodal) 운송’의 호환성을 높여 컨테이너화의 필수적 토대를 마련했다. 리프트 밴은 내부 보강재가 있는 강화목재로 만든 재사용이 가능한 상자로 환승지점에서 재포장 없는 문전서비스(door to door) 원칙을 구현했다 (Casaca 2025). 1~2차 세계대전 중 리프트 밴은 군수물자 공급망에 필수적인 요소로 입증됐지만 기술표준화의 부재와 모드별 독립적 개발로 모달 환승지점의 마찰현상은 여전히 과제로 남았다.

1947년 육군은 밀폐된 단위 배송의 가능성을 확인하기 위해 23개 실험용 타입의 코넥스를 구입했으며 이 실험의 성공적 결과는 이후 군사물류에서 코넥스의 확산에 크게 기여했다(Dapartment of Army 1977; Olson and Scrokgin 1974; Ham and Rijsenbrij 2012, 8). 미 육군의 투자 이외에도 해병대는 두 개의 표준 크기 탑재상자를 개발했고, 공군은 항공기에서 팔레트 화물을 처리하기 위해 463-L 시스템을 도입했다 (Heiser 1991; Konopik and Young 1965). 미군은 미국 본토와 유럽사령부 간 코넥스 운송의 효율성과 효과성이 입증되자 1953년부터 코넥스 서비스 확장 프로그램을 실행했으며 그 결과, 1954년 공군의 컨테이너 프로그램 요청 후 ‘공동 코넥스 통제국(JCCA)’을 설립·운영하기 시작했다. 미군 당국은 개선된 코넥스 설계 및 테스트로 밀폐형, 방수형, 냉장형, 접이식 컨테이너 등을 지속적으로 연구하며 실용화에 나섰(Bykofsky 1958). 이와 같은 미군의 코넥스 개발노력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현장 실증화’에 성공했다. 전쟁 초기 폭발적인 물류수요, 물류연결망 거점 간 인프라의 불균형 및 표준화의 부재(Chung, 2019b)7로 흐름의 마찰이 심화됐지만 미군의 표준화된 코넥스는 이러한 문제 해결에 상당히 공헌했다.

초기 코넥스의 성공적인 실증결과, 미 육군은 주한 유엔군 지원을 위해 12,498개의 코넥스를 구입해 활용했다. 코넥스가 완전히 표준화된 시기는 대략 1952년으로 알려진다(Di Moia 2020). 표준화된 코넥스가 전장에 투입되면서 한국전쟁 초기 공존했던 벌크 물류방식을 점차 대체해 갔다. 한국전쟁 중 사용된 코넥스는 미 군사물류 혁신의 상징이자 현대 컨테이너 물류의 원칙들이 대부분 적용된 원형이다. 재질은 강철 용접 패널로 제작해 내후성이 보장되고 표준규격은 길이 8피트, 너비 6.5피트, 높이 6.5피트로 최대 9천 파운드를 취급할 수 있었다. 취급품목은 탄약, 의료품, 식량 등 거의 모든 군수품으로 2단 적재가 가능해 적층성 문제도 일부 해결했다. 코넥스 설계의 핵심은 ‘한번 포장으로 여러 번 이동’ 원칙을 반영한 멀티모달(multimodal) 기능과 단위화다. 코넥스의 사용은 운송시간 단축, 흐름의 예측성 및 복합운송, 호환성 그리고 재사용성을 높였다(Bykofsky 1958; Cargo-partner; Casaca 2025; Olson and Scrokgin 1974). 한국전쟁 종전까지 미군은 10만개 이상의 코넥스를 배치해 당시 세계에서 가장 광범위하고 정교한 컨테이너 물류시스템을 구축했고 이는 현대 글로벌 컨테이너 물류의 원형으로 통합물류시스템 원칙(표준화, 모듈화, 복합운송, 기계화된 취급)의 실전 적용을 입증했다. 그러나 코넥스가 표준 컨테이너의 장점을 제공하긴 했지만 브레이크-벌크 선박을 통한 운송 등으로 인해 여전히 긴 회전시간이 필요했다.

코넥스는 전쟁기간 동안 태평양을 횡단하는 초국적 군사물류 연결망을 구축했다. 이 강철상자는 군용 또는 민간 트럭, 평판형(flatbed) 트레일러 및 곤돌라 레일카(gondola rail car)를 통해 운송되었다. 초국적 이동경로는 미국 내 창고~서부 샌프란시스코항~MARINEX(Marine Express, 고속항해선박)~일본 요코하마~부산항(인천항)을 거쳐 주로 철도를 통해 전장으로 옮겨졌다(King, et al. 2001, 308; Ham and Rijsenbrij 2012, 8). 미국 서부는 2차 세계대전 동원에 따라 급속히 발전했으며 샌프란시스코와 시애틀을 비롯한 여러 항구가 존재했다. 일본에는 요코하마, 고베, 모지(Moji)에 미군시설이 집중돼 훌륭한 항구가 발달했다. 이 두 노드의 거대한 미군 군사물류 연결망은 부산항으로 이어져 한국전쟁 수행을 위한 초국적 물류 인프라로 작동했다.

현대 컨테이너 원형으로서 코넥스의 의의는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코넥스는 미군이 군사물류를 표준화하려는 최초의 시도로 한국전쟁에서 실증 이후 제국의 전 지구적 군사화를 가능케 하는 물류인프라 기능을 수행했다. 미군이 태평양 ‘군도 제국’ 또는 ‘외부 국가’ 건설로 영구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물류문제 해결이 필수적 과제였으나, 코넥스는 이러한 문제해결에 중요한 수단이었다. 둘째, 현대 컨테이너 원형인 코넥스는 부산항을 비롯한 아시아 항구들에서 실행돼 세계 컨테이너화 역사적 궤적에서 동아시아의 위치를 재정립하는 근거이다. 기술혁신 주체는 미군이고 한국은 혁신기술의 실증을 위한 공간이었다. 그 결과 전쟁을 기점으로 한국은 군도 제국 연결망의 중심 중 하나로 부상했다. 셋째, 전시 코넥스는 미군의 군사물류 초국적 연결망 구축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면서 군수물자를 전장으로 전달하는 시간의 단축, 빠른 속도, 규모 및 범위를 확장하면서 전쟁 전략을 주도했다. 넷째, 이 혁신적 군사물류 기술은 부산항을 중심으로 한국을 미군의 초국적 군사물류 연결망에 통합시켰다. 미군이 주도한 전쟁 당시 물류인프라의 표준화는 전후 미국과 다른 ‘자유 세계’를 연결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고 영구전쟁을 위한 해외 군사기지는 냉전 시기 미 제국의 힘을 공고히 하는데 기여했다.

2. 베트남전쟁과 태평양횡단 군사물류의 컨테이너화

1965년 미국의 베트남전쟁 개입이 본격화되면서 전장의 항구들은 심각한 물류적체에 직면했다. 전쟁 초기 미국 대륙에는 10개의 1급 항구에서 최대한 빠르게 남베트남으로 전쟁물자를 보냈지만 베트남군사원조사령부에는 2급 항구 4곳(다낭, 퀴논, 캄란, 사이공)만 존재했고 철도와 도로는 대부분 파괴되었거나 일부 도로들은 적들의 통제 하에 있어 주요 항구에서 화물을 받아 다시 작은 선박으로 다른 항구로 이동했다. 항구, 도로, 장비 등 부족한 군사물류 인프라는 흐름 속도를 현저히 낮췄다(Aaron and Baker 2020; Heiser 1972; Mercogliano 2019). 미군을 지원하는 군사엔지니어는 1950년대 중반 소수의 고문(advisors)을 시작으로 1965년 미군 지상부대와 함께 대규모로 베트남에 투입됐다. 이들의 임무는 군사작전 수행을 위한 인프라 구축이었고 이를 위해 상당수의 ‘민간 계약업체’를 동원했다(Chung 2019a; Trass 2010, 125-129).

전쟁 초기 베트남으로 향하는 군수물자의 대부분은 브레이크-벌크 화물 형태로 운송되었지만 미군의 태평양횡단 컨테이너 운송은 낯선 것이 아니었다. 1965년 미군은 약 10만개의 코넥스를 보유했고, 1967년까지 10만개를 추가로 확보했지만, 전장에서 이 상자는 물류기능뿐만 아니라 다양한 용도로 사용돼 3/4이상이 재사용되지 못했다(Cargo-partner). 코넥스는 전장에서 임시대피소, 전술 지휘소, 구호소, 주방과 식당, PX, 우편물 교환소, 창고 심지어 방어 구조물의 임시보강재로까지 사용됐다. 당시 미군은 코넥스의 다기능성을 두고 사실과 ‘금과 맞먹는 가치’를 갖는 소모품으로 평가했을 정도다. 그러나 핵심은 표준화된 복합운송 도구로 상당한 효율성을 발휘했다는 점이다. 베트남전쟁 당시 미 육군물자사령부(U.S. Army Material Command) 사령관 프랭크 베송(Frank S. Besson, Jr.)은 1966년 베트남전쟁 물류운영을 시찰한 후 코넥스의 효율성을 군사물류 목적달성이 입증된 수단이자 가장 중요하고 필수적인 전투 응용품으로 극찬했다9(Besson and Collins 1966).

시랜드사(Sea-Land)를 설립한 말콤 맥린(Malcolm Mc Lean)은 컨테이너 물류혁명의 아이콘으로 불린다. 그의 주요 문제의식은 마찰없는 물류의 흐름, 즉 중단없는 해운~항구~육상운송을 잇는 복합운송의 실현이었다. 이 혁신가의 노력은 1956년 Ideal-X 호와 10년 후 대서양을 횡단한 풀컨테이너선 페어랜드호로 이어졌다. 시랜드사는 끊임없는 기술혁신 노력으로 국제 컨테이너 무역의 선도자로 부상했고, 컨테이너 확산의 결정적 국면은 베트남전쟁에서 미 군사물류의 컨테이너화를 이루면서부터이다. 말콤 맥린은 물류적체를 해소하고자 했던 트럭 기사의 효율성 본능에 따라 컨테이너 물류를 개척한 결과 세계무역을 해방시킨 역사적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레빈슨 2017, 36; Broeze 2002; The Elmer A. Sperry Award 1991, 2). 시랜드사는 베트남전쟁 당시 상업용 컨테이너 혁신을 군사물류화한 미군의 민간계약업체이다. 미군과 시랜드사는 1967년 3월 컨테이너 7척으로 미국서부와 남베트남을 연결하는 운항서비스를 제공하고 7천만 달러를 받는 계약을 체결했다(백두주 2025b, 52-53; 레빈슨 2017, 329; 332). 계약 내용에는 현대적 컨테이너 물류의 특성이 거의 모두 반영돼 그동안 시랜드사의 기술혁신 결과물들이 베트남 전장에 집약됐음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시랜드사가 미군에 제시한 계약조건은 코넥스의 불완전성을 해소하기 충분했으며, 미국 서부 창고부터 베트남 전장에 이르는 ‘태평양횡단 연결망의 컨테이너화’를 가능케 했다. 이는 한국전쟁에서 시작된 코넥스가 시랜드사의 현대적 컨테이너화로 한 단계 진화했다는 의미다.

1967년 8월 시랜드 소유의 컨테이너선(SS 비엔빌호)가 미국 서부항구에서 컨테이너 225개를 싣고 베트남 다낭항에 최초로 도착했고 단 15시간만에 모든 하역을 완료했다. 당시 미군해상수송지원단 다낭 공보실은 미 국방부와 민간 해운사 간 ‘새로운 시대’ 협력의 시작으로 평가했다(Forrest 2017, 100-101). 시랜드사는 1967년 11월부터 미군의 전략 항구인 캄란만에도 컨테이너 서비스를 시작했다10. 전시 시랜드사가 처리한 물동량 관련 통계에 따르면(Ham and Rijsenbrij, 2012, 25), 계약된 컨테이너 7척으로 전체 화물의 10%를 처리했고 나머지 화물처리를 위해서 250척의 일반 화물선이 동원됐다. 이 주장은 다소 설득력이 떨어져 보이지만 시랜드사가 베트남행 화물 10%를 처리하는 데 전체 선체의 2%로 운송할 수 있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베트남 ‘컨테이너 항구’들은 세계 최초로 대규모 컨테이너 작업이 실행되는 혁신 공간이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남베트남 항구들은 갠트리 크레인을 비롯한 가장 현대적인 물류 및 컨테이너 장비를 구축했고 미국과 베트남 전문가들은 물류계획, 공급, 그리고 유지·보수 계획을 전문적으로 수행했다. 또한 미국 전문가에는 자동화된 데이터 처리 하드웨어 전문가와 전략 통신전문가도 포함돼 있었다. 물류시스템은 점차 자동화되었고 이후 베트남 주둔 미군 전체로 점차 확산되어 갔다(Fuson 1994, 109-132; 142-148). 베트남전쟁은 “물류와 제국주의를 결합한 실험실”로 태평양횡단 물류는 “미 제국의 핵심적 생명줄”로 기능했다. 미군은 군수물자와 병력의 태평양횡단 흐름을 효율화 및 가시성을 높이기 위해 초국적 물류인프라를 구축해 나갔(Attewell 2020, 909). 베트남 활동 감소로 인해 1970년 1분기(회계연도 기준) 미군 수출화물은 450만톤에서 1972년 4분기에는 260만톤으로 42.2% 감소했지만 같은 기간 컨테이너 화물 비율은 25%에서 46% 이상 증가했다.

1973년 1,080만톤의 화물 중 51.9%인 약 560만톤이 컨테이너 화물로, 1970년 선적된 1,770만톤 중 430만톤(24.3%)이 컨테이너 화물이었던 것과 대조적이다. 1972년 항만처리 비용은 1억 3,280만 달러 중 컨테이너 물동량은 1,590만 달러로 약 12%에 불과했지만 컨테이너 물동량은 전체 화물 톤수 중 46%인 500만톤을 차지(Olson and Scrokgin 1974, 135-137)해 베트남전쟁 중 미 군사물류의 컨테이너화가 빠르게 진화했음을 알 수 있다11.

시랜드사의 이러한 혁신은 몇 가지 함의를 갖는다. 우선 시랜드의 ‘횡재 수익’은 대규모 자본투자에 대한 불확실성으로 컨테이너화를 주저하던 기업가들에게도 혁신 수용을 자극했다. 한국 컨테이너 물류의 선구자인 한진 조중훈회장이 대표적이다. 다음으로 미군은 다른 지역 화물을 운송하는 계약자들에 사이에 컨테이너화를 촉진해 유럽으로 선적한 화물 절반이 1970년까지 컨테이너 운송으로 전환됐다. 또한 미군의 물류수요는 전 세계 국가의 컨테이너 인프라 구축 및 표준화 조치에 영향을 미쳤(Chung 2019a, 45). 마지막으로 시랜드사의 혁신은 상업적 컨테이너 연결망 구축과 확대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미군물류와 상업물류가 혼합된 미국서부~베트남~일본·아시아 신흥국 간 ‘컨테이너 삼각무역’으로 아시아는 새로운 기회를 맞이했으며 이후 환태평양 중심의 컨테이너 무역이 급격히 부상했다(백두주 2025b, 61-68).

Ⅳ. 한국의 미 군산복합체 초국적 연결망에 통합과 컨테이너화

1. 베트남전쟁과 군사주의적 발전국가 그리고 한진

(1) 군사주의적 ‘발전국가의 국제화’

한국의 군사주의적(militarist) 발전국가는 물류기업 한진을 비롯한 재벌들을 수출주도 경제의 최전선으로 끌어 올리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국가는 재벌의 충성도를 대가로 관대한 대출 및 보증을 통해 사실상 채무 불이행을 제로화했고, 정부의 경제개발계획을 기꺼이 수행하고자 하는 기업들과 일종의 ‘위험 파트너십(risk partnership)’을 맺었다(Kim 2006, 218; Schober 2021, 16-17). 한국의 재벌들은 ‘브라운 각서(Brown Memorandum)’로 열린 특별 조달 개방에 따른 OSP 기회에 힘입어 베트남에 진출할 수 있었고, 이를 기점으로 미 군산복합체와 태평양 지배계급 동맹에 주요 행위자로 본격적으로 참여했다. 이러한 과정은 한국의 국가와 대기업들이 초국적 계급(지배)동맹으로 편입됐다는 의미이자 국가가 비경쟁적 수단을 기업들에 제도적으로 보장해주는 일종의 ‘지대추구의 정치경제’(Krueger 1974)의 사례다. 냉전의 지정학과 정치경제학은 한진을 비롯한 한국 재벌들이 미 군산복합체에 편입 및 초국적 계급형성 과정에 깊이 융합되는 배경이었다. 이는 한국의 독특하고 거대한 산업전환 과정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Glassman 2018, 352-353; Glassman and Choi 2014). 따라서 ‘브라운 각서’는 군사주의적 발전국가가 단순한 영토 내 행위자라는 ‘영토의 덫(territorial trap)’을 넘어 초국적 지배계급과 연결되는 ‘국가(권력)의 국제화’(Glassman 1999)를 실행하는 계기였다.

베트남전쟁은 외부로 보이지 않는 막대한 수익과 미국의 대규모 원조로 이루어진 ‘풍요의 땅(cornucopia)’이었을 뿐만 아니라 국제경제 불씨를 시험하는 새로운 산업의 인큐베이터였다(Woo 1991, 97). 이 전쟁은 아시아 경제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한국 대기업 성장이 시작된 사건적 장소이다. 표 2

표 2 월남으로부터의 외화획득(단위: 백만 달러, %)

구분1966년1967년1968년1969년1970년1971년1972년소계
무역수출13.95.73.811.913.414.313.376.3
물품군납9.914.530.823.624.321.215.0139.3
소계23.820.234.635.537.735.528.3215.6
무역 외용역 및 건설1.240.249.037.548.834.812.3232.1
장병 송금13.230.034.431.526.224.718.3178.3
기술자 송금9.134.333.643.126.915.33.9166.2
파월지원 경비8.84.610.815.213.912.065.3
소계34.8113.3121.6122.9114.188.746.5641.9
합계58.6133.5156.2158.5151.8124.274.9857.6
국가 재화용역수입 대비 비중(%)12.920.817.713.811.07.73.412.5
국가 무역외수입 대비 비중(%)28.743.339.632.230.625.713.429.1

출처: 국방군사연구소(1996). 󰡔월남파병과 국가발전󰡕 pp. 282-283 수치를 토대로 재작성.

는 베트남전쟁에서 한국이 벌어들인 외화획득액이다. 외화획득액은 한국기업들의 본격적인 현지 진출이 시작된 1966년 58.6백만 달러에서 1967년 133.5백만 달러로 증가했다. 1969년에는 최고액인 158.5백만 달러에 달했으며 그 이후에는 점차 감소해 1972년 74.9백만 달러로 줄었다. 이 기간 총 외화획득액은 857.6백만 달러였고 한국군의 완전 철수 시기인 1973년까지 금액을 합치면 약 9억 달러에 이른다. 이 금액을 국가 전체 수입과 비교하면 1966~72년까지 수입(收入)은 전체 재화 및 용역 수입의 평균 12.5%, 무역 외 수입의 29.1%로 엄청난 규모였다(국방군사연구소 1996, 282-283). 이러한 막대한 외화수익은 군사주의적 발전국가의 성장토대가 되었으며 전쟁에 참여한 재벌들의 전략산업 육성을 위한 씨앗이었다.

베트남전쟁 시 미군과 계약에서 한국기업들은 ‘브라운 각서’에 의해 특혜 조치를 받았다. 물류분야에서는 한진과 통운경남 계약과정의 ‘한국인 채용’ 특혜가 대표적이다. 미군과 수의계약에서 한국 노동력 대신 베트남 인력을 활용하면 계약금액이 낮아질 수 있었으나 한국기업들은 대부분 한국인을 고용했고 미군은 이를 허용했다. 1968년 제3국민(TCNs) 임금조사에 따르면, 통운경남 한국 노동자는 연간 1만 달러, 한진 노동자들은 연간 7천 달러 이상의 임금을 받았다. 미군 계약담당자가 가격을 낮게 협상하려면 한국 계약자는 비용을 줄여야 하고, 동일한 이익을 보장받기 위해서는 베트남인을 고용해야 했으나 이 특혜 조치로 수의계약이 그대로 진행됐다(Military Assistance Command, Vietnam 1969). 1960년대 후반 OSP 와 군사원조프로그램(MAP)은 한국 총자본 형성의 40~60%를 차지해 한국 산업의 ‘이륙’을 촉진하는 데 기여했다. OSP 는 특정 기업에 보조금, 보호된 시장기회를 제공했고 이보다 더 주목할 점은 ‘선진기술을 학습 및 개발’하고 ‘기술고도화’ 과정에 가시적인 방식으로 크게 기여한 것이다(Glassman and Choi 2014, 1175). 당시 정부도 월남파병에 상당한 정치·경제적 의미를 부여했다. 특히 국제적 지위 향상 및 안보강화 등의 정치적 성과와 더불어 월남전 특수경기와 ‘기술혁신 및 국내 산업에 대한 자극’ 등 경제적 성과를 강조했다(국가기록원 2009, 105-110).

(2) 한진과 미군의 ‘촉매적 관계’

한진은 1950년대 재벌로 가는 마지막 열차에 합류해 한진만큼 국가 및 미군과 친밀감으로 혜택받은 기업은 없었다(조중훈 1994; Woo 1992, 68). 미군은 베트남전쟁 당시 코넥스와 시랜드사의 상업용 컨테이너로 이른바 ‘군사물류의 적시(just-in-time)’시스템을 완성해 나갔다. 한진은 세계적 해운사 및 물류회사로 초국적 지리-정치경제 연결망과 군산복합체가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한진의 가장 중요한 초국적 연결고리는 미국, 특히 미 군산복합체와 관계다. 한국전쟁 후 미군과의 계약으로 초기 자산을 축적했고, 베트남 전시 물류 용역계약은 한진을 재벌로 성장시켰다(Jones and Sakong 1980, 358-361). 한진은 ‘냉전 국가’인 한국과 미국의 후원 아래 유치산업을 효과적으로 발전시키면서 베트남 전장에서 ‘성년’을 보냈다. 미군과의 ‘촉매적 관계(catalysing relationship)’는 한진의 사업다각화와 초국적 연결성 구축에 기초가 되었으며 한국경제의 전반적인 수출 역동성을 강화하는데 기여했다(Glassman 2018, 353-355). 미국의 베트남전쟁 확대와 한국정부의 베트남파병은 한진과 같은 한국기업들에게는 ‘경제적 신의 선물’이었다. 한진은 미군을 통해 얻은 이익과 ‘연결(connection)’을 통해 이후 복합물류기술을 접했고 세계적 컨테이너 해운사로 성장하는 토대를 마련했다(Chung 2019a). 만약 한진이 미 군산복합체 연결망에 통합되지 못했다면 글로벌 물류 대기업으로의 성장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한진의 베트남진출은 미 제국의 패권전략 및 ‘아시아 정책과 표리관계’를 반영한 것이자 당시 한미 양국의 특수성에 기인한 것이다(윤충로 2008, 103-104). 또한 한진은 미군으로부터 ‘특혜조치’를 받긴 했지만 미 군사물류 민명화의 흐름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베트남전쟁 당시 민간기업의 참여는 미군-미군사기업(계약업체)-베트남/제3국 하청업체로 이어지는 전형적인 다단계 하청구조를 보였지만 한진과 미군의 계약방식은 예외적이었다. 한국의 파월기술자들도 미 계약업체에 직접 고용된 노동자와 재하청 계약업체에 고용된 노동자가 다수였다. 그러나 한진의 계약방식은 주월미군사령부와 직접 용역계약을 체결하는 ‘초청받는’ 수의계약(invited contract)이었다. 1966년 3월에 체결된 계약내용(790만달러)에는 쌍방 이행보증금 300만달러, 3개월 안에 소요장비 완비 등이 포함됐다. 180만 달러 규모의 장비가 필요했던 한진은 정부의 지불보증, 호의적인 은행대출을 통해 조달했다. 한진은 미국이 요구하는 최신 표준화된 장비를 완비하기 위해 미국과 일본업체들과 협력했으며, 정부는 한진을 위해 600만달러에 달하는 지급보증을 제공했다(정순태 2005; 조중건 2005, 107-109; 이한구 2024). 베트남진출과정에서 정부의 한진 지원과 후원은 파격적이었다. 미군은 한국의 작은 은행들의 보증을 믿지 못해 정부차원을 보증을 요구했으나 계약을 위한 정부보증은 한진회장의 요청으로 대통령이 담당 관료에 직접 지시하여 성사됐다. 이후에도 대금지불을 위한 신용장 연장도 경제부총리, 재무장관, 한국은행 이사회가 직접 나서는 등 발전국가의 전방위적인 지원은 베트남진출을 위한 한진의 제도적·물적 토대를 제공했다(조중건 2005, 121-124; 조중훈 1996, 64-65).

한진상사는 1966년 3월 주월미군과 직접 용역계약을 체결한 후 5월부터 퀴논항에서 하역 및 육운업무를 시작했으며 1971년 12월 계약만료로 최종 철수했다. 미 국방부 회계연도에 따르면, 한진의 베트남사업 실적은 1966년 5월~71년 12월까지 총 116,463천 달러에 달했다(표 3

표 3 한진(상사)의 월남 사업실적(단위: 달러, %)

계약기간66.5~67.567.5~68.668.7~69.669.7~70.670.7~71.671.7~71.12합계
계약금액(달러)8,532,00033,884,56828,634,60022,997,45615,998,4606,416,101116,463,101
증감율(%)-297.1-15.5-19.7-30.4-59.9-
전체 대비 비중(%)7.329.124.619.713.75.5100.0

자료: 한진그룹(미간). 『한진 50년사』 p. 73. 출처: 윤충로(2008) p. 104 자료를 토대로 수정·보완.

참조). 당시 한국은행 가용 외화 총액이 수천만 달러에 불과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금액이었다. 1967년 정점 이후 1968년부터는 감소 추세로 돌아서 1969년 후반은 베트남 주둔 미군의 부분적 철수와 군비절감 정책이 강화되어 계약금액은 대폭 줄었다. 이 ‘횡재 수익’은 향후 한국 국적의 초국적 컨테이너선사인 한진해운 설립의 핵심 자산이 되었다.

2. 컨테이너화 혁신의 경험과 ‘모방 학습’: 시랜드사와 한진

미군 OSP 계약은 민간 계약업체에 미국 국제개발처(USAID) 및 회계감사원(GAO)와 같은 기관에서 제시하는 사양에 맞는 장비를 요구했다. 이는 결과적으로 계약업체가 초기 비용이 들더라도 첨단기술을 연구하고 작업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Glassman and Choi 2014).

한진 조회장과 관계자들은 군사물류 용역계약을 수행했던 퀴논항에서 시랜드사를 마주했으며 이 기회는 전쟁 이후 한진과 시랜드사 간 협력체제를 구축하는 결정적 계기였다. 한진이 미군과 계약 전인 1966년 6월 조회장은 퀴논항에서 벌어지는 시랜드사의 컨테이너 하역작업을 직접 경험했다. 대형 크레인이 30~40톤 컨테이너 하나를 하역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단 2분에 불과했으며 기계화된 장비로 하역된 컨테이너는 별도의 작업 없이 트럭에 실려 미군 부대로 이동했다. 이 경이적인 복합운송 컨테이너 물류시스템은 하역비용을 기존 방식 대비 1/20로 줄였고, 항구 정박기간도 7일에서 15시간으로 단축시켰다(이임광 2015, 205-206). 이 순간을 경험한 한진 조회장은 본인의 자서전에 당시 컨테이너 물류혁명의 충격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folklift), LST 작업을 위한 R/T 지게차, 부두작업용 지게차, 자체 바지선 및 예인선 등이다. 이를 통해 한진은 월 15만톤을 처리할 수 이는 물류장비(MHE)를 보유하게 됐다(Department of Army 1969).

나는 컨테이너화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66년 월남 퀴논항에서 철도의 기관차만한 큰 궤짝을 잔뜩 실은 미국 화물선 한 척이 정박해 있는 것을 본 뒤부터였다. 이러한 광경은 내가 젊은 시절 배를 타고 동남아를 항해하면서도 본 적이 없었던 것이었다. 무게가 무려 40톤이나 되는 큰 컨테이너 상자들을 갠트리 크레인이라는 특수 크레인이 2분에 한 개씩 척척 부두 위에 내려놓은 것이었다. 열두 사람이 달라붙어 한 시간 동안 열심히 작업해야 겨우 그만한 화물을 하역할 수 있을 때였다. 나는 이 하역작업을 두 시간 이상 지켜보면서 이것이 ‘해상운송 혁명이구나’하고 생각했다. 그것은 내게 커다란 자극이었다. 세상이 변해가고 있었던 것이다(조중훈 1996, 172).

위와 같은 혁신 경험은 조회장과 한진 관계자들을 크게 자극했고, 결과적으로 한국 컨테이너화의 추진 기점이 되었다. 1966년 퀴논에서 글로벌 컨테이너 물류혁명을 직접 경험한 조회장은 귀국 후 해운사 설립에 착수해 1967년 7월 대진해운을 설립했다. 대진해운은 일본 조선소에 컨테이너선 2척을 주문했고, 1972년 9월 이중 한 척을 인도받아 부산~일본 고베항로에 투입했다. 이 선박이 국내 해운 역사상 최초의 컨테이너선인 ‘인왕호(188TEU, 3,459톤급)’이다(박영출 2004; 이임광 2015, 209-210). 한진과 시랜드사의 공식적인 협력은 1968년 한진-시랜드사 기술용역계약 체결부터이다(Chung 2019a, 44). 한진은 시랜드사가 제공한 기술, 베트남전쟁에서 벌어들인 수익과 경험을 활용해 컨테이너 선단을 구축해 나갔다. 그 결과 1970년 1월 한진은 시랜드사와 한국 총대리점 계약을 체결했다. 1970년 3월 2일 시랜드사 컨테이너선 피츠버그호가 부산항 입항하면서 컨테이너 하역작업이 시작됐으며 한진은 시랜드사의 혁신을 ‘모방 학습(imitation learning)’하면서 컨테이너선 전용선사 설립에 나섰다. 이를 위해서는 시랜드사의 경영노하우가 절대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에, 한진은 시랜드사 관련 부서에 우수 직원을 집중 배치해 해운기술, 컨테이너 운영, 영업 및 마케팅 노하우를 습득했다. 일반 해운사와 달리 컨테이너 전용선사 설립은 대규모 자금 동원과 기술수준, 초국적 인프라가 필요했다. 한진은 베트남전쟁 이후 약 10여년 만에 1977년 한국의 대표적인 컨테이너 해운사인 한진해운을 창립했다. 원래 1978년 설립을 계획했으나 1977년초 조회장과 박정희대통령 면담 직후 “대통령의 간곡한 권유”로 그해 5월에 조기 설립을 완료했다(조중훈 1996, 179). 설립 직후 한진해운은 18,000톤급 컨테이너 전용선 4척을 국내 조선업체에 발주했고 설립과정은 시랜드사 총대리점에서 근무하면서 노하우를 축적한 직원들이 주도한 것으로 알려졌다(박영출 2004).

초국적 기업으로 성장했던 컨테이너 전용선사 한진해운의 설립 요인은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첫째, 한진은 미 군산복합체의 초국적 연결망에 통합된 결과 엄청난 ‘횡재 수익’을 올렸고, 전쟁이라는 보호된 시장을 확보했다. 이는 한진해운을 설립하는 물적 토대가 되었으며, 특히 미군은 한국전쟁 이후 베트남전쟁까지 한진의 자산형성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두 번째 요인은 당시 글로벌 컨테이너 물류혁명을 주도한 시랜드사의 글로벌 혁신을 ‘모방 학습’한 결과다. 1966년 베트남 전장에서부터 이어진 한진과 시랜드사의 마주침과 연결성 구축은 한진에 컨테이너 물류의 기술, 운영 노하우를 이전하는데 기여했다. 또한 한진은 신규 투자에 대한 부담을 줄이기 위해 시랜드사가 보유한 세계 주요 항구의 시설과 장비 등 초국적 인프라를 공유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셋째, 발전국가의 강력한 물류계획 및 정책실행도 중요한 이유다. 이 시기 정부는 ‘해운조선 제1차 종합계획’을 수립해 제4차 경제개발계획(1977~81년) 내 수출상품의 40%를 국적 선박으로 수송하겠다는 계획을 수립했다(조중훈 1994). 정부가 한진의 컨테이너선사 설립을 강력히 권고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마지막 요인은 1970년대 한국 수출이 매년 40% 이상 폭발적 성장을 기록 중에 있어 충분한 컨테이너 물류 수요가 예상됐기 때문이다. 한진해운은 한국 수출기업이 소비재를 생산하면 컨테이너선을 통해 이 상품들을 전 세계로 운송해 발전국가의 수출주도 경제성장을 촉진했다.

3. 한국 컨테이너화와 초국적 연결성

컨테이너 화물이 한국에 처음 입항하기 시작한 것은 1968년이다(Di Moia 2018, 232). 그러나 컨테이너 전용선이 아니라 혼적(mixed loading) 상태였고 본격적인 입항은 한진과 대한통운을 비롯한 국내 물류사들이 부산항과 인천항에 컨테이너 전용선 입항을 위해 초국적 외국선사들과 계약을 추진하면서부터이다. 1960년대말~70년대 초 국내와 연결을 추진한 초국적 선사들은 시랜드사(미국), 맷슨(Matson, 미국), APL(미국), K-Line(일본), 1972년 이후 O-Line(대만), YS Line(일본), CF 샤프(미국) 등이다(매일경제 1972/09/23). 1960년대 중반 국제적으로 확산된 컨테이너 물류모델은 여전히 주류적 형태는 아니었지만 상황이 급변하고 있었으며 베트남전쟁이라는 지정학적 요인은 이를 가속화했다. 부산항이 컨테이너를 처리하기 시작한 1968년은 시랜드사가 베트남전쟁 관련 방대한 양의 화물을 운반하며 미국 서부 항구(시애틀, 오클랜드, 샌프란시스코)와 태평양지역(베트남, 요코하마) 항구를 연결했고, 이를 지원하기 위한 대형 갠트리 크레인, 개선된 컨테이너 처리 및 보관시설 인프라 비용이 많이 들었지만 투자 위험을 감수하는 선도적 기업과 항구들이 출현한 시기였다(백두주 2022, 60-61).

한국의 초국적 컨테이너 물류 연결망은 한-일 피더(feeder)서비스로 시작됐다. 1968년 시랜드사는 터미널 운영 및 육로 운송을 처리하기 위해 일본 미쓰이(Mitsui)사와 협력체제를 구축했다. 이후 1968년 요코하마에서 미국 서부항구를 연결하는 정식 정기선 서비스가 이루어졌으며 곧이어 한국과 일본의 피더 물류서비스 연결망이 짜여졌다(Cudahy 2006). 일본은 1967년 요코하마 컨테이너 부두 완공과 국제컨테이너터미널공사법 제정 그리고 항만개발공사(PDA)를 설립해 본격적인 컨테이너 물류혁명에 선도적으로 합류하며 태평양횡단 컨테이너 물류 연결망을 직조(weaving)해 갔다(Black 2022, 86-87; 레빈슨 2017, 338-342). 반면 한국은 초국적 물류인프라의 미비, 즉 컨테이너 전용부두의 부재로 초국적 선사들의 모선 직기항이 불가능했다. 1970년 3월 시랜드사 피더선인 피츠버그호가 부산항에 접안 후 10월에는 US Line 이 아메리칸 마드호를 투입하여 한일간 컨테이너 서비스를 개시했다. 국적선사의 한일 항로 투입은 1972년 대진해운의 인왕호를 시작으로 고려해운, 조양상선 등이 한국~일본, 한국~홍콩 등 근해 구간 피더서비스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국내 최초의 기간항로에 투입된 풀컨테이너선은 1976년 9월 태평양 항로에 배선된 대한해운공사의 코리안 리더호(722FEU 급)로 대만 OOCL 사와 공동운항에 나섰다. 공동운항의 이유는 코리안 리더호가 독자적으로 초국적 컨테이너 물류 연결망을 구축하기에는 자본, 시장, 인프라 모두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주요 기항지는 카오슝~홍콩~고베~요코하마~로스엔젤레스~샌프란시스코~뉴욕~볼티모어~찰스톤으로, 아시아 신흥공업국(NICs)들과 세계 최대 상품소비처인 미국 서부 및 동부지역을 연결했다(한진해운 60년사 편찬위원회 2010b, 83-84).

그림 1

한국 컨테이너 물동량 변화 추이(1968~75년)
Figure 1 한국 컨테이너 물동량 변화 추이(1968~75년)
은 1968년 최초 컨테이너 처리시점부터 베트남전쟁이 최종 종결된 1975년까지 한국의 컨테이너 물동량의 변화추이를 보여준다. 해운항만청의 공식적인 컨테이너 물동량 통계는 1969년부터 확인되지만 통계수치는 현행 TEU(20ft 1개) 기준이 아니라 개수로 측정해 그 이후 통계치와 연속성이 다소 떨어진다. 컨테이너 개수에는 20ft, 35ft, 40ft 가 포함되며 35ft 컨테이너는 시랜드사가 주로 사용했던 규격이다. 기존 문헌에서는 한국의 첫 컨테이너 화물 처리시점을 1968년으로 추정하긴 했으나 구체적인 수치는 확인된 바 없었다. 따라서 현재 구체적인 파악할 수 있는 근거는 당시 언론기사에 인용 보도된 수치가 유일해 보인다. 이를 근거로 종합해보면, 1968년 컨테이너 806개로 시작해 1975년에는 184,450개로, 같은 기간 컨테이너 화물처리 톤수도 10,438톤에서 3,672,333톤으로 짧은 기간 매우 큰 폭으로 증가했다(매일경제 1972/09/23; 해운항만청 1978). 이와 같은 물동량 수치는 한국이 세계적 수준의 컨테이너 물류혁명 흐름에 적극적으로 편입되어 갔음을 확인시켜 준다.

한국 컨테이너 물류의 기원과 초국적 연결성 구축은 한국전쟁 당시 컨테이너의 원형인 ‘표준화’된 코넥스의 활용에서 찾을 수 있다. 베트남전쟁까지 코넥스가 사용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강철박스는 ‘제국의 군도’를 연결하는 신경체계의 혈구로서 비교적 장기간 사용됐다. 다시 말하면, 한국은 현대 컨테이너 원형이 세계 최초로 표준화되고 실증된 물류혁신의 공간이었다. 코넥스 이후 상업용 컨테이너의 군사물류화는 1966년 미국서부 오클랜드항과 미군이 주둔했던 일본 오키나와가 그 시작점이다. 1967년 시랜드사가 미군과 베트남전쟁 수행을 위한 군사물류 컨테이너 운송은 미국서부~요코하마~베트남을 연결했고, 이 시기 한진은 시랜드사가 주도하던 컨테이너 물류혁명의 핵심 공간 내에서 혁신을 경험하고 학습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받았다. 1968년 일본과 한국의 상업 컨테이너 물류 피더 연결망이 구축된 이후 홍콩, 대만 등 동아시아, 싱가포르와 동남아시아 일부 국가들이 이 태평양횡단 컨테이너 물류 연결망에 편입됐다. 이른바 아시아 네 마리 용이 이룬 ‘동아시아의 기적’은 이러한 초국적 연결성의 구축과정과 연계해 평가될 수 있다. 특히 한국은 군사적·상업적 컨테이너 물류의 초국적 연결성 구축에 결정적 계기가 된 냉전 기간 두 열전을 모두 경험한 국가이다. 이 과정은 군사적 컨테이너 물류의 상업화와 상업적 컨테이너 물류의 군사화가 혼재·융합되면서 ‘공진화’를 가능케 했고, 한국은 베트남전쟁 이후 컨테이너 물류혁명의 변곡점을 지나면서 상업적 컨테이너 물류의 전면적 확산과 이 초국적 인프라 연결망에 편입·통합됐다.

Ⅴ. 결론

한국 컨테이너 물류의 기원과 초국적 연결성 구축은 미군주도의 세계 패권전략 하에서 미 군산복합체의 연결망에 통합되는 과정이었다.

이 과정은 전후 제국의 전 지구적 군사화 프로젝트, 군사주의적 ‘발전 국가의 국제화’ 그리고 전시 미군 OSP 에 참여한 한진의 ‘모방 혁신’이 상호작용하면서 영향을 주고받으며 형성된 것이다. 본 연구의 결과 및 함의는 다음과 같다.

우선 국제정치·군사적 측면에서, 전후 미국은 군사복합체에 기반한 ‘군도 제국’을 건설하여 초국적 물류인프라와 해외 군사기지 연결망을 직조해 나갔다. 군도 제국은 패권국가의 외부 국가 건설의 결과였으며 이는 태평양의 탈식민지화와 새로운 제국의 영구적 전쟁 수행 과정의 일환이었다. 제국의 전 지구적 군사화 프로젝트는 압도적인 군사적 우위를 통해 패권적 궤도에 동맹국들을 편입시켰고 군산복합체 활동영역과 범위의 확대, 자유세계 정부를 위한 군사원조도 지배력 강화를 위한 주요 수단이었다. 특히 미군 군사력의 민영화와 그에 따른 OSP 는 자유세계 계약기업들에게 보호된 시장, 초국적 공급망과 비즈니스의 동기화 방법 그리고 최신 기술이전을 촉진하는 기회를 제공했다. 한진을 비롯한 한국기업들의 전시 OSP 참여는 미 군산복합체의 초국적 연결망에 편입·통합되어 ‘하위 파트너’ 역할과 기능을 수행했다는 의미다. 그동안 많은 컨테이너화 연구들이 그 기원을 주로 상업적 수준에서 찾았다면, 이 연구는 국제정치·군사적 영향에 주목한 점이 차별적이다.

다음으로, 한국은 냉전 시기의 ‘두 열전’을 수행한 국가로 세계 컨테이너 물류혁명의 원형인 코넥스 출현 및 활용이 본격화된 한국전쟁, 현대적 컨테이너화 확산의 변곡점이었던 베트남전쟁을 경험했다. 미군은 한국전쟁에서 이미 비교적 정교한 코넥스(컨테이너) 물류시스템을 구축했고 이 시스템은 현대 컨테이너화의 핵심적 원칙이 적용된 사례이다. 세계 최초의 상업용 물류의 컨테이너화를 추진했던 시랜드사는 미 군사력의 민영화로 OSP 에 참여한 군산복합체의 초국적 ‘혁신’ 주체였고 그 결과 전시 태평양횡단 군사물류의 현대적 컨테이너화를 가능케 했다. 이는 상업 컨테이너의 군사물류화, 군사물류의 상업화가 동 시에 이루어진 ‘공진화(Co-evolution)’ 과정이었다. 이로써 베트남 전장의 항구들은 세계 최초로 대규모 컨테이너 작업이 실행되는 ‘혁신 공간’이 됐다. 따라서 한국은 현대 컨테이너의 원형 만들어진 장소이자 그 이후 전쟁과 물류기술 혁신의 장을 경험한 국가로 컨테이너화의 역사와 미군의 초국적 군사물류 연결망 형성과정에서 중요한 위상을 갖는다.

마지막으로, 한국 재벌들은 미군주도의 세계 패권전략과 군사주의적 발전국가의 국제화 결과인 ‘브라운 각서’로 열린 특별 조달개방으로 미군 OSP 에 참여하면서 미 군산복합체의 초국적 연결망에 통합됐다. 베트남전쟁을 통한 막대한 외화수익은 발전국가의 ‘계획적’ 경제성장을 위한 물적 토대였던 동시에 한국 재벌들의 전략산업 육성의 핵심 자산이었다. 특히 한진은 미군과의 ‘촉매적 관계’로 성장을 거듭했고 미군과의 연결과 이익으로 이후 세계적인 컨테이너 해운사로 도약하는 기반을 마련했다. 이 과정에서 한진은 군사주의적 발전국가의 파격적인 후원을 받는 ‘위험의 파트너십’을 맺었다. 초국적 미 군사물류 연결망에 편입된 한진은 컨테이너 물류혁명을 직접 경험했고, 시랜드 사 혁신의 ‘모방 학습’과 협력체제 형성은 한국 컨테이너 물류의 초국적 연결성 구축을 위한 결정적 계기로 작용했다. 한국 컨테이너화의 출발점은 베트남전쟁 시기를 포함한 글로벌 컨테이너 물류혁명 시기와 일치한다. 컨테이너화 핵심적 원리가 해상과 육상을 잇는 복합운송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 시기 이후 한국의 각 운송수단별 진화과정 연구가 중요하다. 따라서 향후 연구과제는 본 연구에서 규명한 역사적 기원을 바탕으로 한국 컨테이너 물류 시스템의 진화과정을 입체적으로 추적하는 것이다. 이는 한국이 성공적 글로벌 통상국가 진입, 글로벌 가치사슬 참여 및 세계경제로 통합의 동학을 규명하는 의미있는 연구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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