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 체제의 호구 제도와 당-사회관계의 역사적 전개
The Historical Development of Socialist Household Registration Systems and Party-Society Relations: The Cases of China and Vietnam
중국과 베트남을 중심으로
** 제1저자.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 박사수료, Sogang University, sun024@sogang.ac.kr
*** 교신저자.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조교수, Sogang University, jhpark82@sogang.ac.kr
*** 교신저자: 박정훈, jhpark82@sogang.ac.kr
DOI: https://doi.org/10.33334/sieas.2026.45.2.1
초록
본 연구는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유산인 호구 제도가 시장화 이후 중국과 베트남에서 상이하게 발전하게 된 배경을 분석한다. 중국의 후커우(戶口)는 1선 도시에서 교육・주거・사회보험・토지재정과 새롭게 결합하며 도시 시민권을 위계화하는 선별 장치로 새롭게 기능하게 된 반면, 베트남의 호커우(hộ khẩu)는 도이머이 이후 점진적으로 완화되어 2020년 거주법 개정으로 종이 등록부가 폐지되고 거주 정보에 근거한 법적 차별이 금지되었다. 본 연구는 이러한 분기를 두 공산당이 혁명기와 토지개혁기에 사회를 조직한 방식의 차이로 설명한다. 중국공산당은 농촌 사회를 행정 범주 안으로 직접 재편하며 국민을 분류하는 권한을 제도화할 수 있었다. 반면, 베트남공산당은 오랜 전쟁과 분단 상황 속에서 마을 공동체와 지방 재량에 의존하며 국가를 수립하였고, 이 과정에서 당이 국민을 호구 제도를 통해 분류하는 행위가 정당한지에 대해 사회가 공개적으로 이의를 제기하고 시정을 요구할 수 있는 여지가 남았다. 본 연구는 양국의 호구 제도 형성 과정의 역사를 비교 분석하고, 상하이와 호치민시 사례를 통해 국가 수준의 분기가 도시 시민권에서 어떻게 구체화되는지를 분석한다.
Abstract
This study examines why household registration systems inherited from socialist planned economies followed divergent trajectories in China and Vietnam after market-oriented reforms. In China, the hukou (戶口) system became increasingly linked to education, housing, social insurance, and land-based urban finance in first-tier cities, functioning as a sorting mechanism that stratifies urban citizenship. In Vietnam, by contrast, the hộ khẩu system was gradually relaxed after Đổi Mới, and the 2020 Law on Residence abolished the paper household registration book while prohibiting discrimination based on residence status. The study explains this divergence by focusing on how the two communist parties organized society during the revolutionary and land reform periods. The Chinese Communist Party directly reorganized rural society into administrative categories, thereby institutionalizing its authority to classify the population. The Vietnamese Communist Party, in contrast, built state authority through prolonged war and national division while relying on village communities and local discretion. This historical formation made it possible for Vietnamese society to challenge the legitimacy of population classification through household registration and to demand institutional correction. Through a comparative-historical analysis, this study traces the formation of the two systems and examines Shanghai and Ho Chi Minh City to show how national-level divergence is translated into distinct forms of urban citizenship.
이 논문은 2024년 대한민국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과제번호: 2024S1A5C2A02046265). 이 논문은 2024년도 서강대학교 교내 연구비 지원에 의한 연구임(과제번호: 202410023.01). 유익한 논평을 해 주신 익명의 심사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Ⅰ. 서론
사회주의 혁명은 본래 노동자와 농민을 위한 평등한 사회를 약속했다. 그러나 중국과 베트남은 도시와 농촌 간 자원을 차등 배분하고, 인구 이동을 통제하기 위해 각각 후커우(戶口)와 호커우(hộ khẩu)라는 거주등록제도를 도입하였다. 베트남의 호커우 제도는 중국의 모델을 직접적으로 참조하여 도입되었기 때문에(Liu and Meng 2019), 두 국가의 호구제도는 기능적으로 유사하였다. 즉, 양국 모두 국가 주도의 빠른 공업화를 달성하기 위해 농촌 잉여 노동력의 도시 유입을 억제하고, 한정된 자원을 도시 공업 부문에 우선적으로 배분하기 위한 도구로 호구 제도를 활용하였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양국은 도농 이중 구조를 구축하였다. 도시 거주자의 고용・식량・주택・의료 등은 중국의 경우 단위(单位) 구조로, 베트남의 경우 국영부문과 같은 직장 단위가 일괄 책임지는 방식으로 관리되었다. 반면 농촌 거주자의 생계는 국가가 직접 보장하지 않고, 중국의 경우 인민공사로, 베트남의 경우 농업합작사와 같은 집단농장 체제하에서 농민 스스로 자급자족하거나 노동 점수제에 의존하는 방식으로 관리되었다(Hardy 2001; London 2014; Wang 2005; Wu and Treiman 2004). 그 결과 도시 거주자는 거주 등록에 연동된 국가 배급망을 통해 식량과 복지 혜택을 보장받은 반면, 농민들은 공업화를 위한 국가의 저가 수매 부담을 떠안아야만 하였다. 나아가 도시 내에서도 대도시 거주자나 국가 핵심 부문 종사자일수록 더 질 좋은 배급을 누리는 위계적인 자원 배분 구조가 형성되었다(Cheng and Selden 1994; Fforde and de Vylder 1996; World Bank and VASS 2016).
그러나 이처럼 형식과 기능 면에서 유사한 출발점을 갖는 양국의 호구 제도는 시장화 이후에는 매우 상이한 발전 양상을 보이고 있다. 베트남은 2020년 거주법 개정을 통해 종이 호커우 등록부 폐지와 거주 정보의 디지털 전환을 법제화하였고, 2023년 1월 1일부터 종이 호커우 등록부의 효력이 종료되었다. 또한 거주 정보에 근거한 법적 차별을 명시적으로 금지하고 있다(National Assembly of Vietnam 2020). 중국에서도 중소도시의 후커우 이전 장벽은 낮아졌지만, 베이징・상하이・선전 등 1선 대도시에서는 적분제라는 더욱 정교한 선별 장치를 통해 후커우가 오히려 강화된 측면이 있다(Chan 2019; Dong and Goodburn 2020; Zhang 외 2019). 즉, 중국 1선 도시에서는 후커우가 도시 자원 배분의 새로운 선별 장치로 새롭게 기능하고 있다.
2025년 기준 중국의 농민공은 처음으로 3억 명을 넘어설 만큼(国家统计局 2026), 도시의 생산과 일상을 떠받치는 거대한 노동력이 되었지만, 후커우는 여전히 이들을 도시 시민과 특히 복지 접근성 차원에서 제도적으로 분리하는 기능을 한다. 이러한 차등적인 성격은 ‘국민등급제도(国民等级制度)’로도 설명될 수 있다(이민자 2001, 65). 다만 2026년 5월 발표된 중국 국무원의 의견은 취업한 지역 기준의 직공 사회보험 호적 제한을 철폐하는 등 상주인구 대상의 복지 접근성을 다소 완화하는 조치를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国务院 2026), 중국의 후커우도 점차 완화되고 있는 추세라고 볼 여지도 있다. 그러나 여전히 공급이 부족한 서비스에 대해서는 적분제와 같은 차등 공급을 허용하고, 인재 유치 정책을 기본공공서비스와 구분하여 운영하도록 함으로써, 1선 도시의 선별적 접근 구조 자체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으므로(国务院 2026), 본질적인 호구 제도 폐지와는 아직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유사한 일당 사회주의 체제에서 도입된 양국의 호구 제도는 상이한 경로로 발전하고 있으며, 이러한 차이는 오늘날 양국 대도시에서 구체적으로 어떠한 차이로 나타나고 있는가?
기존의 비교 연구는 양국 호구 제도의 현상적인 차이를 분석하는 데 그치거나(Lin and Mao 2022; Siu and Unger 2020), 차이의 원인을 토지 소유 구조나 재정 제도와 같은 제도적 변수에서 찾고자 하였다. 이 가운데 가장 진전된 연구는 Ruan(2024)으로, 토지 소유 체계의 차이를 양국 호구 제도 분기의 핵심 원인으로 제시한다. 즉, 중국은 이원적 토지 체계와 토지 재정이 결합되어 호구 제도를 유지할 유인이 강한 반면, 베트남은 일원적 국유 체계이기 때문에 호구 제도를 유지해서 이익을 보는 이익 집단이 적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왜 양국의 토지 소유 체계 자체가 다르게 형성되었는지 그리고 왜 토지재정이라는 동일한 압력 아래에서도 중국 내에서 1선 도시만 선별 장치를 유지하는지는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다.
이는 사회주의 일당체제 내에서도 유사한 제도가 어떻게 한쪽에서는 점진적인 시민권 통합으로, 다른 한쪽에서는 새로운 계층화의 정교화로 발전하게 되었는지를 동일한 이론 틀로 다룰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호구 제도가 국민을 농민과 도시민으로 나누어 권리를 차등 배분하는 장치였다는 점(Chan 2019; Cheng and Selden 1994)에서 본 연구는 분기의 원인을 국가가 국민을 나누고 그 구분에 따라 권리를 차등적으로 배분할 수 있는 권한과 이러한 구분이 정당한지에 대해 사회가 공개적으로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가의 문제, 즉 ‘분류 권한’이 어떻게 형성되고 보호 혹은 도전되었는가의 문제로 거슬러 올라가 분석하고자 한다.
본 연구의 핵심 주장은 양국의 호구 제도의 분기가 혁명기와 국가건설기에 형성된 당-사회 조직 방식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중국에서는 농민 사회를 당-국가의 행정 범주 안으로 직접 재편한 반면, 베트남에서는 당-국가 체제 형성이 기존 마을 공동체, 지역 네트워크, 전선 조직, 가족 관계, 지방 집행 재량 등에 의존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이러한 차이는 분류 권한이 사회적인 도전으로부터 얼마나 보호되었는가를 결정하는 정치적 조건을 다르게 만들었다. 중국에서는 분류 권한이 내부 행정 절차를 통해 행사되고 그 정당성에 대한 사회적 도전이 다시 분류를 통해 처리되는 구조가 형성된 반면, 베트남에서는 분류 권한의 정당성이 공개적 시정과 사회적 협상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이러한 차이가 중국의 후커우를 1선 도시의 자원 배분과 결합한 선별적 시민권 장치로 새롭게 기능하게 한 반면, 베트남의 호커우는 중국식의 강한 제도 결합으로 고착되지 않은 채 시장화 이후 점진적인 약화의 길로 들어서게 만든 주된 분기로 작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즉, 혁명기 당-사회 관계의 차이가 국가의 분류 권한이 사회적으로 쟁점화될 수 있었는지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고, 이러한 차이는 다시 양국의 호구 제도가 상이하게 발전하게 된 주된 요인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본 연구는 레닌주의 일당 체제, 사회주의 계획경제, 시장화 개혁이라는 유사점을 공유하는 중국과 베트남에서 왜 같은 기원을 갖는 거주등록제도인 호구 제도가 양국에서 서로 다르게 발전하게 되었는지를 비교 역사 분석 방법을 통해 분석하고자 한다. 다만 양국의 자료 접근 수준에는 불균형이 존재한다. 중국 자료는 주로 국무원과 상하이시의 정책 문건 및 중국어와 영어로 작성된 2차 문헌을 활용하였다. 베트남 자료는 베트남어 확인의 제약이 있었기에, 이를 보완하고자 베트남 국회가 공포한 법률의 공식 영문본을 1차 근거로 삼고, 이를 영어권의 2차 문헌과 교차 확인하는 방식으로 연구의 신뢰성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본 연구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II장에서는 선행연구를 검토하고 이론틀을 제시한다. III장에서는 혁명기와 토지개혁기에 양국 당-사회 관계와 주민 분류의 정치적 토대가 형성 및 분기되는 과정을 비교하고, 이어 이러한 차이가 호구 제도 도입 이후 현재까지 시기별로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살펴본다. IV장에서는 상하이와 호치민시 사례를 통해 국가 수준의 분기가 도시 행정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분석한다. V장에서는 연구 결과를 요약하고 함의를 논의한다.
Ⅱ. 선행연구검토와 이론틀
1. 중국과 베트남 호구 제도 연구의 동향과 한계
기존 연구는 시장화 이전 호구를 사회주의 산업화 전략의 핵심 도구로 분석한다(Cheng and Selden 1994; Solinger 1999; Chan 2019). 양국 모두 중공업 중심의 급속한 산업화를 위해 도시 노동력과 고용・식량・주택 등을 계획적으로 배분하고 농민을 농촌에 묶어 농산물의 저가 공급을 유지하고자 하였다. 다만 도시 자원을 배분하는 구체적인 기구는 양국 간 다소 차이가 있다. 중국에서는 단위(单位)를 통해 도시민의 복지 전반을 포괄적으로 관리하였다면(Wang 2005; Wu and Treiman 2004), 베트남 북부에서는 국가 부문에 종사하는 도시 노동자에게 배급표(tem phiếu)와 양곡 통장에 기초한 보조 배급(bao cấp)을 거주 등록과 연동해 제공하는 방식으로 관리하였다(Fforde and de Vylder 1996; Hardy 2001; World Bank and VASS 2016). 이처럼 베트남에서는 도시 배급 체계가 북부 지역에 한정되었고, 남부 지역에 대한 사회주의식 자원 배분은 1975년 통일 이후에야 도입되어 짧은 기간만 시행되었다(Dang 2010). 그럼에도 호구는 도시에 자원을 우선 배분하는 과제와 농민을 농촌에 묶어 두는 과제를 동시에 수행하도록 설계되어, 등록 지역 밖에서의 교육・의료・식량 배급 등의 접근을 제한하고, 농업과 비농업이라는 신분 구분에 따라 농촌 인구와 도시 인구를 제도적으로 분리하였다.
계획경제 시기 유사한 기능을 수행하던 양국의 호구 제도는 특히 시장경제로 전환하면서 대별되기 시작하였다고 볼 수 있다. 중국에서는 단위제와 식량 배급제 해체 이후 후커우의 본래 기능이 약화되었음에도, 후커우가 토지재정과 도시 복지와 새롭게 결합하면서 도시 자본의 새로운 축적 도구로 기능하게 되었다(Chan and Wei 2019; Ruan 2024). 베이징・상하이・선전 등 1선 도시에서 시행되고 있는 적분제(积分制)는 거주 기간・사회보험 납부・학력을 점수화한 선별 장치로서 여전히 엄격하게 작동하며, 중국 내에서도 사회 불평등의 핵심 원인으로 비판이 제기되고 있으나, 제도의 폐지로까지 이어지지는 않고 있다(Chan 2019; Wang 2005). 2026년 5월 국무원이 발표한 「상주지 기본공공서비스 제공 추진에 관한 실시의견」(国发〔2026〕11号)은 취업한 지역에서의 직공 사회보험의 호적 제한을 전면 철폐하고 거주증 소지자의 의료보험 가입과 자녀의 교육 접근을 상주지 기준으로 확대하였다. 다만 공급이 부족한 의료와 교육 등 방면에서는 적분제와 같은 차등 공급을 허용하고 인재유치를 기본공공서비스와 명시적으로 구분하도록 규정함으로써, 1선 도시의 선별적 접근 구조는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国务院 2026).
베트남에서도 도이머이 이후 계획경제 시대의 산물인 호커우가 시장화 이후 생계 자원과의 직접적인 연관성이 줄어들게 되면서 본래 제도의 목적이 약화되었지만(Hardy 2001), 중국과 달리 호커우는 시장화 이후 토지재정이나 도시 복지와 같은 새로운 제도와 다시 결합하지 못한 채, 생계 자원과의 연결이 끊기면서 점진적으로 약화되어 법적 폐지에 이르렀다. 2006년 거주법은 호커우의 거주 형태에 따른 호커우의 4개 범주(KT1~KT4)를 영구 거주와 임시 거주 2개로 축소하였고(World Bank and VASS 2016), 2020년 거주법 개정에서는 종이 등록부를 폐지하였다. 이를 완전한 폐지로 볼지 디지털화로 볼지에 대한 논쟁은 있으나(Lin and Mao 2022), 공식 등급 구조의 해체와 이주 노동자의 복지 접근성 개선이라는 점에서, 베트남의 개혁은 중국에 비해 전면적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베트남식 개혁은 사회적 압력을 법적 개혁으로 흡수하는 베트남공산당의 대응 양식과도 맞물려 있다. 1997년 타이빈성 농민 시위에 대해 1998년 「풀뿌리 민주주의 규정」으로 주민의 정책 참여 절차를 제도화한 사례(Nguyen 2016; Truong and Trinh 2024), 2015년 포우위엔(Pou Yuen) 공장 파업에 대해 국회 결의를 통해 연금 정책 자체를 입법적으로 수정한 사례(Chan and Hui 2023) 등은 베트남공산당이 사회적 압력을 법적 개혁으로 흡수해 온 방식을 보여주며, 이러한 흐름이 호커우의 약화 및 폐지 과정에서도 드러났다고 해석할 수 있다.
중국과 베트남의 호구 제도를 각각 다룬 기존 연구에서도 중점을 두는 점이 다르다. 중국 후커우 연구는 시장화 이후에도 후커우가 노동시장과 사회보장을 분절하여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양상(Duckett 2020; Solinger 1999)과, 지방정부의 토지재정 의존이 실효성 있는 후커우 개혁을 어떻게 억제하는지(Ruan 2024) 등에 초점을 둔다. 반면 베트남 호커우 연구는 도이머이 이후 호커우의 법적 구속력이 어떻게 약화되었으며(Hardy 2001), 이주민들이 비공식적 경로를 통해 제한된 사회 서비스 접근을 어떻게 보완하고 제도를 우회해 왔는가에 주목한다(World Bank and VASS 2016). 즉, 동일한 기원의 호구 제도를 다루면서도 중국 연구는 제도가 현재까지 어떻게 지속되고 있는지에 주목한다면, 베트남 연구는 호커우의 생계 자원과의 직접적인 연결 고리가 단절됨에 따른 점진적인 약화 양상에 초점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양국을 직접 비교한 연구는 양국 지역학 학문 공동체가 분절되어 발전해 온 탓에 여전히 제한적이다(Malesky and London 2014). Kerkvliet and Selden(1998)이 양국의 농업 정책의 변동을 직접 비교한 이후 비교 연구의 필요성이 꾸준히 제기되어 왔지만, 호구 제도를 본격적으로 비교한 연구는 소수에 그친다. Lin and Mao(2022)는 양국 호구 제도의 역사적 변천을 비교하며, 유사한 기원을 가진 제도가 시장화 이후 이주노동자의 복지 접근 방식을 어떻게 다르게 제약하는지를 현상적 측면에서 비교 분석하였다. Siu and Unger(2020)는 중국 광둥성과 베트남 호치민시의 이주노동자를 직접 인터뷰하여 양국 호구 제도의 차이가 가족 형태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였다. 중국의 이주노동자는 자녀 교육권 제한으로 인해 분리된 가구(split households)와 순환 이주를 반복하는 반면, 베트남 이주노동자는 지방정부의 유연한 운용으로 온전한 가구(intact households)를 유지하며 정착하는 경향이 있음을 보였다. 다만 이들 연구는 분기의 양상을 풍부하게 보여주는 데 초점을 두며, 그 원인에 대한 본격적 분석으로까지 나아가지는 않는다.
분기의 원인을 본격적으로 다룬 연구는 Ruan(2024)이 있다. Ruan(2024)은 양국 호구 분기의 핵심을 토지 소유 체계의 차이에서 찾는다. 중국의 이원적 토지 체계, 즉 도시는 국유소유이지만 농촌은 집체소유인 이원적 토지 체계는 지방정부가 농촌 토지를 저가에 수용 및 매각하는 토지재정 구조를 형성하여 호구를 유지할 강한 경제적 유인을 형성할 수 있었다. 반면, 베트남의 일원적 국유 체계에서는 이러한 유인이 없어 호구 개혁이 상대적으로 용이하였다고 분석한다. 그러나 Ruan(2024)의 토지재정 변수는 양국 토지 체계 자체가 왜 다르게 형성되었는지, 그리고 같은 토지재정 압력 아래에서도 왜 중국에서는 1선 도시에서만 선별 장치가 강화되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는 한계를 갖는다.
2. 양국 정치 체제 및 국가-사회 관계 비교 연구의 함의
중국의 후커우와 베트남의 호커우는 모두 사회주의권의 거주등록제도에서 영향을 받았다. 중국의 후커우는 소련식 프로피스카(пропи́ска)1)의 영향을, 베트남의 호커우는 국가가 체제 안정을 위해 인구의 규모와 이동을 비롯한 사회 전반에 직접 관여하는 중국식 사회주의 모델의 영향을 받았다(Chan 2019; Pizzi and Hu 2022; Hardy 2001; Liu and Meng 2019). 양국 모두 외부에서 자본을 끌어올 식민지가 없었던 탓에 공업화 재원을 농업 잉여에서 구해야 하였다(Chan and Wei 2019; Cheng and Selden 1994). 호구 제도가 농민을 자원 배분의 위계에서 가장 아래에 두었다는 점은 곧 양국 공산당이 농민이 다수인 사회를 어떻게 조직하고, 그 요구에 어떻게 반응했는가의 문제와도 직결된다고 볼 수 있다. 아래에서는 양국이 사회적 요구를 정책에 반영하는 방식의 차이를 노동쟁의(Chan and Hui 2023), 재정 재분배(Malesky 외 2011), 엘리트 파벌(Trinh 2021), 그리고 그 역사적 기원(Truong 2020)순으로 영역별로 검토한다.
Chan and Hui(2023)는 2014년 중국 위에위엔(裕元, Yue Yuen) 공장과 2015년 베트남 포우위엔(Pou Yuen) 공장에서 발생한 대규모 연금 파업에 대한 양국 정부의 대응을 비교한다. 중국 정부는 노동자의 요구를 법 집행 수준에서 부분적으로 수용하는 데 그친 반면, 베트남 정부는 국회 결의를 통해 연금 정책 자체를 수정하는 입법적인 양보를 단행하였다. 저자들은 베트남 정부가 노동자의 연금 요구에 더 수용적이었던 원인을 두 가지에서 찾는다. 하나는 베트남의 더 강한 재분배 지향이고, 다른 하나는 상대적으로 덜 통제적인 정치 체제, 즉 더 넓고 다양한 통치 연합과 지도부를 둘러싼 정치적 경쟁으로 권력이 분산된 구조이다. 분산된 권력 구조가 더 강한 재분배 지향을 떠받쳐 국가가 파업 노동자의 요구를 입법적으로 수용하도록 압박하였다는 것이다(Chan and Hui 2023). 이러한 노동쟁의 대응의 차이는 이후 양국 호구 개혁의 방향 차이와도 연관될 수 있다.
재정 재분배 영역에서도 유사한 차이가 나타난다. Malesky 외(2011)은 양국의 지역 간 재분배 격차를 정치권력 구조의 차이로 설명한다. 베트남은 중앙위원회를 중심으로 권력이 비교적 분산되어 있고, 가난한 지방 대표를 포함한 광범위한 연합체가 정책 결정에 참여하기 때문에 국내총생산의 약 6%를 균등화 전입금으로 지출한다. 반면 정치국 상무위원회를 중심으로 권력이 집중된 중국은 같은 지표가 국내총생산의 약 2%에 그친다. 따라서 베트남의 분권적 정치 구조는 가난한 지역의 요구가 정책 집행 과정에 반영될 제도적 여지가 상대적으로 더 크다고 볼 수 있다.
엘리트 정치의 내부 역학에서도 같은 양상이 확인된다. Trinh(2021)은 중국의 파벌이 지연, 직업 경력, 후견 관계와 같은 배경 중심의 네트워크에 상대적으로 강하게 묶여 있는 반면, 베트남의 파벌은 정책 선호와 이데올로기적 입장에 따라 보다 유동적으로 이합집산한다고 주장한다. 배경 중심으로 고착된 중국의 파벌 구조에서는 정책 결정이 특정 기득권 네트워크의 이익을 방어하는 방향으로 기울기 쉬운 반면, 정책과 이념을 따라 재편되는 베트남의 파벌 구조에서는 더 다양한 이해관계를 수용하도록 강제되어 보다 응답적인 정책이 산출되기 쉽다. 이러한 차이는 베트남의 호커우 개혁이 중국보다 전면적으로 전개된 배경을 이해하는 데에도 함의를 갖는다.
이상의 연구들은 호구 제도 자체를 직접 다루지는 않지만, 노동, 재정, 토지, 엘리트 정치의 여러 영역에서 중국과 베트남이 사회적 요구를 정책에 반영하는 방식이 달랐음을 보여준다. 이는 양국의 정치 체제와 국가-사회 관계의 차이가 호구 제도 분기에도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을 시사한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왜 베트남이 더 분권적 체제와 응답적인 국가-사회 관계를 갖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양국 정치 체제의 기원을 다룬 역사제도주의적 관점에서 분석한 연구에서 살펴볼 수 있다.
Chan 외(1999)는 중국과 베트남이 사회주의 혁명, 레닌주의 정당, 계획경제, 시장화 개혁이라는 공통의 출발점을 공유하면서도 경제 전환, 농업 구조, 정치 변화, 노동체제 등 여러 영역에서 서로 다른 개혁 경로를 발전시켰다고 분석한다. 이 연구는 제도적 유사성이 곧 동일한 정책 결과로 이어지지 않으며, 같은 사회주의 체제 내부에서도 국가와 사회가 상호작용하는 방식에 따라 개혁의 방향이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본 연구의 출발점과 맞닿아 있다. 그러나 시장개혁 전반의 분야별 차이를 폭넓게 비교하는 데 초점을 두며 호구 제도를 다루지는 않는다. 본 연구는 이러한 비교 문제의식을 호구 제도 개혁의 분기라는 구체적 사례에 적용한다.
Truong(2020)은 중국과 베트남의 토지 수용 문제에 대한 권위주의적 응답성(responsiveness)의 차이를 혁명기 당-국가 형성 과정에서 찾는다. 중국 공산당은 국가 건설 이전에 이미 강한 조직 규율과 동원 능력을 갖춘 당으로 성장하였고, 이후 국가기관과 사회를 당의 헤게모니 아래 편입시키는 방식으로 국가를 세웠다. 그 결과 중국에서는 사회적 요구가 제도적으로 흡수되기보다 사후적이고 임시적인 방식으로 관리되는 경향이 강화되었다. 반면 베트남 공산당은 혁명과 국가 건설 과정에서 다양한 세력과 사회 집단을 포섭하고 타협해야 했으며, 이 과정에서 당-국가 내부의 권력 분산과 사회 요구의 제도적 반영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크게 발전하였다.
Truong(2020)이 권위주의적 응답성의 차이를 혁명기 당-국가 형성 방식에서 찾은 점은 당-사회관계의 역사적 기원을 출발점으로 삼는 본 연구의 문제의식과도 가깝게 맞닿아 있다. 다만 Truong(2020)이 제시하는 ‘응답성’은 국가가 광범위한 사회적 요구 전반에 얼마나 부응하는지를 묻는 포괄적인 성격을 띤다. 반면 호구 제도는 국가가 국민을 농민과 비농민으로 나누고 구조적 불평등을 제도화하는 본질적인 분류 행위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호구 제도의 분기를 다루는 본 연구에서는 국가가 단순히 사회적 요구에 반응하는가를 넘어, 국가의 차별적 분류 행위 자체가 사회적으로 정당성을 인정받고 있는지, 더 나아가 그러한 정당성이 사회적으로 쟁점화될 수 있는지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이에 본 연구는 Truong(2020)의 혁명기 당-국가 형성 경로를 이론적 출발점으로 삼되, 분석의 초점을 포괄적인 ‘응답성’에서 ‘국민을 분류하는 행위의 정당성을 둘러싼 국가와 사회의 정치적 역학’으로 좁혀 호구 제도 비교 분석으로 확장하고자 한다.
3. 이론틀
호구는 출생시 부모의 호구에 따라 정해지고, 어떤 지역의 호구를 지녔는지에 따라 교육 및 의료 등 복지 수준이 달라진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구조적 불평등을 동반한다. 따라서 호구 제도가 얼마나 강하게, 얼마나 오래 작동하는가 여부는 국가가 국민을 나누고 그에 따라 권리를 차등 배분하는 행위가 사회적으로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지 여부와도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본 연구는 이러한 권력을 ‘분류 권한(classification authority)’으로 개념화한다. 앞서 살펴본 선행연구에서 확인한 베트남이 중국에 비해 더 높은 응답성을 갖는다는 특징은 호구 제도 영역에서는 분류 권한의 정당성이 사회적으로 쟁점화되어 시정될 수 있는가로도 해석할 수 있다. 본 연구는 이러한 분류 권한에 대한 쟁점화 가능 여부가 양국 호구 제도의 경로 분기를 좌우한 주요한 요인이라고 주장한다.
분류 권한은 국가능력(state capacity)이나 시민권 체계(citizenship regime)와 구별된다. 국가능력이 주민을 등록하고 파악하는 행정 역량을 가리킨다면, 분류 권한은 그 분류 자체의 정당성에 관한 것이다. 중국과 베트남은 모두 계급 범주에 기초한 토지개혁을 대중적 폭력을 동반하며 관철하였다는 점에서 국민을 분류하고 동원할 행정 역량을 일정 수준 갖추고 있었다. 따라서 양국의 분기는 국가능력보다는 그러한 능력이 행사된 방식에서 사회적으로 검증 과정을 거칠 수 있는지 여부에서 비롯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한편 시민권 체계가 누가 어떤 권리를 갖는지의 결과적 분포, 가령 상하이 적분제의 위계나 과거 베트남 호커우 등급제에서 보이는 시민권의 차등 자체를 가리킨다면, 분류 권한은 그러한 결과에 선행하는 정치적 조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본 연구는 양국이 일당 권위주의 체제를 수립하기 직전인 공산당 혁명기와 토지개혁기에 형성된 분류 권한의 쟁점화 가능 여부가 시장화 이후까지 자기강화적으로 이어져 오늘날의 상이한 국면을 낳았다고 주장한다. 중국에서는 당이 주민을 분류하는 행위가 혁명 질서의 정당한 권력으로 자리 잡았고, 이러한 분류에 대한 문제 제기마저 다시 당의 분류로 처리되면서 분류 권한에 사회적 견제가 가해지기 어려운 환경이 굳어지게 되었다(Dutton 1992; Moise 1983; Wang 2005). 반면 베트남에서는 1956년 토지개혁의 오분류를 당이 공개적으로 시정해야 하였고(Moise 1983; Szalontai 2005), 남부에서는 북부식 계급 분류가 애초에 뿌리내리지 못함으로써(Dang 2010), 국가의 분류가 사회적 문제 제기와 시정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선례가 형성되었다. 분류의 정당성이 한쪽에서는 논쟁 밖에 놓이고 다른 쪽에서는 협상의 대상이 된 이러한 차이는 이후 호구 제도가 도입 및 운용되는 정치적 토대의 차이를 낳았다고 볼 수 있다. 구체적인 형성 과정은 Ⅲ장에서 다룬다.
이러한 토대 위에서 분류 권한의 정당성이 쟁점화되기 어려웠던 중국에서는 시장화 이후 단위제와 배급제가 폐지된 뒤에도 호구가 토지재정・의료・교육・주거 같은 새로운 자원과 다시 연계되며 선별적 도시 시민권 장치로 재편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반면 분류의 정당성이 처음부터 협상의 대상이었던 베트남에서는 호커우가 자원 배분의 배타적 기제로 굳어지지 못한 채, 시장화 이후 본래의 사회주의적 배급 기능마저 잃으며 점진적으로 약화되었다. 이상의 논의를 <표 1>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표 1> 당-사회 관계와 호구 제도의 경로 분기
| 중국 | 베트남 | |
|---|---|---|
| ① 당-사회 관계 | 당 → 사회 | 사회 ↔ 당 |
| ② 분류 권한의 정당성 | 분류의 정당성을 논의하기 어려움 | 분류의 정당성 논점화 가능, 항의에 따른 당의 공개 시정 |
| ③ 제도 결합 | 호구가 단위제 및 배급제와 촘촘하게 결합 | 호구가 자원과 느슨하게 결합 |
| ④ 시장화 이후 귀결 | 교육・복지・토지재정과 연계 → 적분제로 존속 | 생계자원과 분리 → 종이 호커우 폐지 |
Ⅲ. 분류 권한의 형성과 재생산: 혁명기에서 시장화까지
본 장은 양국 호구 제도의 구조적 분기를 가져온 원인을 제도가 공식적으로 도입되기 이전인 혁명기와 토지개혁기의 당-사회 관계에서 찾는다. 분류 권한이 사회적 쟁점이 될 수 있었는지가 어떻게 분기되었는지를 혁명기 당-농민 관계의 형성, 토지개혁기 분류의 검증과 봉쇄, 그리고 시장화 이행기의 재생산이라는 세 국면에 걸쳐 분석한다.
1. 혁명기 활동 조건과 당-농민 관계의 형성
(1) 중국: 위로부터의 직접 개편
본 절은 중국공산당이 혁명기 화북 근거지에서 농촌 사회를 동원한 방식을 분석한다. 이 시기 중국공산당의 농민 동원은 기존 촌락 질서를 활용하면서도 그 질서의 분류 기준 자체를 당이 새롭게 설계한 계급 범주로 대체하였다는 특징을 지닌다. 농민들의 파편적이고 지연 중심적이던 불만은 당이 부여한 ‘지주 대 빈농’이라는 일원적 계급 범주 안에서 재정의되었고, 누가 어떤 계급에 속하는지를 규정하는 권한은 당이 독점하였다. 이러한 위로부터의 직접 개편이 어떻게 가능하였는지, 그리고 그것이 이후 중국에서 국가의 주민 분류가 사회적 견제 없이 관철되는 토대를 어떻게 놓았는지를 이 절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이러한 동원 방식이 가능했던 배경에는 공산당이 화북에 구축한 안정된 근거지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당시 국민당 정부는 해안 도시와 양자강 이남 경제 중심지를 중심으로 군사력을 배치하였고,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국민당 군이 화북에서 후퇴하면서, 농촌 내륙 지역은 일본군의 통제가 미치지 못하는 공백 지대로 남게 되었다. 당시 일본군은 주요 도시를 ‘점’으로, 그리고 이를 잇는 철도와 도로를 ‘선’으로 놓고 이러한 점과 선을 따라서만 장악하였을 뿐, 제한된 병력으로 그사이에 펼쳐진 광대한 농촌까지는 장악하지 못하였다. 중국공산당은 이러한 공백 지대를 파고들어 화북 농촌을 중심으로 비교적 안정된 근거지를 구축할 수 있었다(黄道炫 2018; Moise 1983). 옌안(延安)을 중심으로 한 섬감녕 변구와 진찰기・진기로예 등 화북 근거지에서 당은 기존 향신(乡绅)과 보갑(保甲) 체제가 담당하던 촌락 행정을 당 조직으로 재편하였다. 또한 소득 수준에 따라 세금 부담을 차등화한 누진적 세제 개편인 합리부담(合理负担)을 실시하고, 호조조(互助组)와 같은 농가 협동 조직을 조직하여 농촌의 생산과 동원을 편성할 수 있었다2)(黄道炫 2018). 마을 단위까지 간부를 배치하고 인구와 자원을 파악하는 이러한 행정망은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전부터 이미 준국가적 성격을 띠었다(Dutton 1992). 이처럼 화북 지역에서 형성된 하향식 행정망 구축 방식이 이후 중국 전역으로 확장하여 농촌 행정의 표준 모델의 토대가 되었다(Moise 1983).
이러한 행정망이 농민과 당의 관계를 어떻게 형성하였는가는 이후 중국 전역에서 시행된 호구 제도가 안정적으로 시행될 수 있었던 맥락을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하다. 唐海华(2017)는 이 시기 화북 근거지 공산당의 동원 방식을 마을 전체에 세금・식량・병력 부담을 할당하는 자원 징수 활동인 촌장동원(村庄动员)과 지주의 소작료와 이자를 강제로 낮추는 감조감식(减租减息) 운동을 통해 농민에게 물질적 이익을 제공하는 계급동원(阶级动员)으로 나누어 분석한다. 중국공산당의 공식적 입장은 계급동원이 촌장동원의 선행 조건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농민에게 먼저 감조감식을 통한 실질적 이익을 제공해야만 농민이 세금 납부나 병력 동원에 자발적으로 응할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항일전쟁 대부분 시기에 당의 가장 시급한 과제는 전쟁 수행에 필요한 식량과 병력의 확보였으므로, 실제로는 자원 징수를 위한 촌장동원이 항상 우선시되었고, 계급동원의 강도는 당이 처한 정치적, 군사적 상황에 따라 전략적으로 조절되었다. 예를 들어, 항일통일전선의 유지를 위해 국민당 및 지주 세력과의 협력이 필요한 시기에는 감조감식이 의도적으로 억제되었고, 일본군의 군사적 압력이 완화되거나 반공 위기가 고조되어 농민의 적극적 지지를 확보해야 할 때에는 선택적으로 강화되었다. 결국 계급동원은 농민의 이익을 위한 독립적 정책이 아닌 자원 동원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종속적 수단으로 기능하였다(唐海华 2017). 이처럼 계급동원이 당의 전략적 필요에 따라 조절된 구조는 당이 농민을 분류하고 그 분류에 따라 권리와 의무를 배분하는 권한이 농민의 동의나 사회적 검증 없이 당의 판단에 따라 행사될 수 있었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방식의 동원은 공산당이 이미 존재하던 마을 행정에 대한 불만을 계급투쟁의 언어로 다시 조직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고 볼 수 있다. 공산당이 들어오기 전부터 화북 농민들은 이미 강한 불만을 갖고 있었다. 다만 이러한 불만은 지주에 대한 계급적 적대라기보다는 마을 단위의 부담 배분이 불공정하다는 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당시 농촌에서는 탄파(摊派)라 불리던 관행, 즉 세금, 노역 등의 각종 부담을 지방 관리나 마을 유지들이 각 가구에 자의적으로 배분하는 방식이 일반적이었고, 이 과정에서 누가 무엇을 얼마나 부담하는지가 자의적으로 결정되며 부패가 만연하였다. 중국공산당은 이 기존의 불만을 계급투쟁의 언어로 다시 풀어내고, 이렇게 재정의된 범주를 당이 직접 통제하는 방식으로 농민을 동원하였다.
화북 농촌의 사회구조도 이 점을 뒷받침한다. 화북 농촌은 순수 소작농 비율이 낮고 영세자영농이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구조였다(Huang 1985).3) 자영농은 감조감식 정책의 직접적인 수혜자가 아니므로 운동에 참여할 유인이 적었고, 따라서 지주에 대한 공유된 불만을 기반으로 농민을 조직하기가 어려웠다. 또한 농민의 일차적 연대 단위는 계급이라기보다는 마을이었다. 1944년 활현(滑县)에서 공산당 간부들이 인근 11개 마을의 소작농과 고용농을 모아 투쟁대회를 조직했을 때, 농민들 사이에서 다른 마을 사람이 우리 마을의 재산을 나누려 한다는 반발이 나타난 것은 이를 잘 보여준다(唐海华 2017). 즉 농민의 정치적 상상력은 처음부터 계급 단위로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촌락 공동체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결국 화북 농촌에는 계급투쟁의 자발적 기초가 결여되어 있었기에, 기존의 완고한 촌락 장벽을 허물고 당 중심의 동원을 관철하기 위해서는 당에 의한 인위적이고 하향적인 계급 범주화가 구조적인 필수 조건이었다.
따라서 감조감식 역시 농민의 자발적 계급투쟁이라기보다는 당 간부가 지주에게 압력을 행사하여 소작료 인하를 이끌어내는 은사감조(恩赐减租)의 형태로 전개되었다(唐海华 2017; 黄道炫 2018). 감조감식은 농민에게 일정한 물질적 이익을 제공하는 정책이었지만, 이러한 이익은 오직 당-국가의 매개를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었다. 농민들은 감조감식의 이익을 원하면서도 지주의 보복과 기존 사회관계의 파괴를 두려워하였다. 일부 지역에서 겉으로는 감조가 이루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기존 관계가 유지되는 ‘명감암불감(明减暗不减)’의 묵계가 나타난 것도 이 때문이다(唐海华 2017). 이 시기 농민의 계급 인식 자체도 당의 조직 활동을 통해 형성되었으며, 착취 경험에 대한 집단 기억의 언어화와 정치화는 당이 주도하는 고발대회와 투쟁대회를 통해 이루어졌다. 李金铮(2006)은 화북 항전 근거지 농민이 가졌던 착취를 당했다는 의식(被剥削感)과 계급의식의 형성 과정을 분석하며, 농민이 처음부터 계급적 적대 의식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으며, 당의 조직 활동과 고발대회(诉苦)를 통해 자신의 처지를 계급 범주로 재해석하게 되었음을 보인다.
이러한 사례들은 농민 동원이 당이 기존 불만을 재범주화하고 그 범주에 따라 조직한 하향식 동원의 결과였으며, 농민이 당의 매개 없이 독자적으로 이익을 주장하는 집단적 방식과는 달랐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처럼 화북에서 시작된 동원 패턴은 국가가 주민을 분류하고 그 분류에 따라 권리와 의무를 배분하는 권한을 혁명 질서의 정당한 일부로 자리 잡게 한 핵심적인 선행 국면으로 작동하였다고 볼 수 있다. 당은 기존 마을・친족・생계 관계를 완전히 해체하지는 못했지만, 이를 국가가 기록하고 관리할 수 있는 행정적 관할하에 포섭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후술할 베트남의 당과 기존 사회와의 관계와 달랐다.
(2) 베트남: 기존 사회관계를 매개로 한 동원
베트남 공산주의 운동이 농촌 사회에 기반을 형성한 조건은 중국공산당처럼 안정된 근거지에서 촌락 단위 행정망을 장기간 구축할 수 없었다는 점에서 매우 다르다. 베트남공산당은 프랑스 식민 지배, 일본 점령, 남북 분단, 남부 반공 정권과의 대립이라는 연이은 정치적・군사적 압력에 놓여 있었다(Moise 1983; Truong 2020). 1930년 응에띤 소비에트 운동과 1940년 남끼 봉기는 일찍부터 대중적 기반이 존재했음을 보여주지만, 모두 프랑스 식민 당국에 의해 단기간에 진압되어 당 조직과 지도부가 매우 큰 타격을 입었다(Moise 1983). 이러한 활동 조건의 불안정성은 베트남공산당으로 하여금 안정된 근거지에 의존한 행정망 구축을 어렵게 하였으며, 기존 마을 공동체, 종교 네트워크, 지역 엘리트와 같은 기존 사회관계에 의존하는 방식으로 농촌 기반을 형성하게 하였다고 볼 수 있다.
베트남 농촌의 사회구조 역시 위로부터의 일률적 동원을 어렵게 만드는 조건이었다. “왕의 법은 마을의 관습을 이기지 못한다(phép vua thua lệ làng)”는 속담이 보여주듯, 베트남에서 마을(làng)은 단순한 행정 말단 단위 이상의 자체 규약과 관행으로 움직이는, 즉 친족, 관습, 공동 규약 등을 중심으로 작동하는 생활 공동체였다. Nguyen(2016)은 베트남 농촌에서 마을과 코뮌이 각각 생활 공동체와 국가 행정단위로 구분되면서도 실제 통치에서는 병존해 왔다고 설명한다. 특히 향약(hương ước)은 제례, 분쟁 조정, 토지 이용, 공동체 의무 등 마을 내부의 생활 규범을 정하는 장치였고, 국가법과 병존하는 지방 규범으로 기능하였다(Nguyen 2016). 따라서 베트남의 당-국가 건설은 농촌 사회를 국가가 설정한 행정 범주 안으로 일방적으로 흡수하는 방식이라기보다는 마을 공동체와 지방 관행을 통해서 전개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베트남 농촌은 남북이 구조적으로 매우 이질적이었다는 점도 중요하다. Dao and Molle(2000)에 따르면, 북부 홍하 삼각주는 일찍부터 사람들이 한 지역에 자리 잡고 대대로 살아온 정주 농경지대로, 외부인의 유입은 제한되고 내부 결속력은 높은 폐쇄적 공동체가 발전하였다. 이들은 높은 공유지 비율(약 26%)을 바탕으로 강한 자치권을 행사하는 자급 경제를 영위하였다. 반면, 남부 메콩 삼각주는 17세기 이후 식민지 시기를 거치며 사적 토지소유와 쌀 수출형 농업이 발달하면서 도시나 외부 지역에 거주하는 부재 대지주와 토착 소작농 간의 대립 체제가 일반화된 개방형 농촌사회로 발전하였다. 남부 농촌은 운하를 따라 가구가 길게 분산된 느슨한 사회구조를 보였으며, 공유지가 3% 미만에 불과할 정도로 사적 토지소유권과 시장 지향형 상업 농업이 일찍부터 발달하였다. 19세기 토지대장 분석에서도 메콩 삼각주의 지니 계수는 0.6–0.8로 홍하 삼각주의 0.4–0.6보다 높았다(Dao and Molle 2000). 이처럼 남북 간 토지 불평등과 공동체 구조의 차이는 이미 초기부터 컸고, 향후 베트남 정권이 단일한 계급분류 체계나 동원 모델을 전국적으로 관철하는 데 제약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이처럼 베트남 농촌의 뚜렷한 지역적 이질성과 독자적인 마을 규범이 있던 환경에서 호치민과 인도차이나공산당은 1941년 비엣민(Việt Minh, 베트남독립동맹회)을 결성하였다.4) 비엣민은 공산주의자들이 주도하되 민족 독립이라는 당면 목표 아래 자영농, 지식인, 종교 세력, 소수민족, 지역 공동체 등을 포괄한 민족통일전선 조직이었다. 베트남 공산주의자들은 혁명 초기 중국식의 급진적 계급 노선을 전면에 내세우기보다 민족해방이라는 포괄적 명분 아래 비엣민 조직과 협력하면서 농촌에 정치적 기반을 넓혔다. 다만 1954년 제네바 협정에 따른 남북 분단 이후 북부와 남부의 양상은 동일하지 않았다. 북부에서는 1953~56년 중국 모델에 기초한 급진적 계급 노선의 토지개혁이 전면화되어 포용적 노선보다 급진파가 우세해졌다(Moise 1983; Szalontai 2005). 그러나 이러한 급진적 분류의 과잉이 광범위한 오분류와 사회적 반발을 낳아 1956년 공개 시정으로 귀결되었다는 점에서, 북부의 사례는 포용성의 지속이라기 보다는, 분류의 급진화가 사회적 검증을 거쳐 시정되는 과정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 과정은 다음 절에서 상세히 다룬다.
반면 남부에서는 공식 행정기구가 부재한 가운데 통일전선과 지하 조직에 의존하는 포용적 동원 양상이 오히려 심화되었다. 1954년 분단으로 남부가 반공 정권의 관할 아래 놓이면서 남부의 공산주의자들은 공식 행정기구 없이 지하 조직으로 활동해야 하였고, 농민을 등록하거나 제재할 공식 수단이 부족한 상태에서 조직의 생존 자체를 농민의 은닉과 협조, 그리고 까오다이(Cao Đài)・호아하오(Hòa Hảo)・가톨릭 등 종교 공동체와의 타협적 연대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조건에서 형성된 당-농민 관계는 Kerkvliet(2005)이 분석한 ‘일상의 정치(everyday politics)’ 틀에서도 잘 드러난다. 농민은 동원의 객체에 머무르지 않고 비순응・소극적 거부・비공식 협상을 통해 정책의 형성과 집행에 개입할 여지를 남겼으며, 당은 마을 권력자・종교 지도자・친족 네트워크와 끊임없이 협상하고 타협하며 정책을 관철해야 하였다. 항불 전쟁기 비엣민이 기존 촌락 엘리트를 해체하기보다 민족통일전선 안으로 포섭한 우회 전략은 이를 잘 보여준다.
정리하자면, 베트남의 당-국가 건설은 사회를 행정 범주 안에 직접 편입하기보다 기존 사회세력을 동원과 통치의 매개로 활용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마을 공동체・친족 집단・종교 공동체・지역 네트워크는 당의 명령만으로 해체되지 않은 채 주민의 일상과 자원 접근, 사회적 신뢰를 매개하는 단위로 지속적으로 작동하였다. 이러한 토대는 이후 호커우가 도입되더라도 국가가 설정한 구분이 지역사회・지방 관료・이주민의 대응 속에서 조정될 수 있는 정치적 조건을 이루었으며, 이는 후술할 토지개혁기 분류의 정당성을 둘러싼 대응에서도 나타난다.
2. 분류 권한의 검증과 봉쇄: 토지개혁과 그 이후
(1) 중국: 분류 권한의 집중과 비판의 봉쇄
화북에서 형성된 당이 주민을 행정 범주로 재편하고 외부에서 파견된 간부가 분류와 동원을 위로부터 집행하는 방식은 건국 직후 화남과 화중의 신해방구에서 더 급진적인 형태로 반복되었다. 화남은 화북과 달리 소작률이 높고 지주-소작 관계가 더 발달한 지역이었으므로 표면적으로는 계급투쟁이 더 쉽게 조직될 수 있는 지역처럼 보이지만, 실제 토지개혁은 농민의 자생적 계급투쟁이 아닌 외부에서 파견된 공작대가 단기간에 마을에 들어가 주민을 분류하고 토지를 재분배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공작대는 당-국가의 집행 기구였으므로, 누가 지주이고 누가 빈농인지, 누가 처벌 대상이고 누가 혁명적 주체인지를 결정하는 최종 권한은 당에 귀속되었다. 정리하자면, 화북에서는 자영농 중심의 사회구조 때문에 계급투쟁의 사회적 기반이 약했고, 화남에서는 소작 관계가 발달하였음에도 농민이 스스로 조직화할 시간과 정치적 공간이 부족하였다. 결과적으로 중국 전역에서 농민이 분류 작업의 독자적 주체로 등장할 수 있는 공간은 제한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분류 과정에서 발생한 폭력과 오분류에 대한 처리 방식도 이러한 권력 구조를 반영하였다. 토지개혁 과정의 과도한 폭력과 오분류가 문제로 제기되었어도 시정 작업은 주로 당 내부 문서와 지침을 통해 처리되었으며, 책임 논의는 일선 간부의 정책 이해 부족이나 지역적 일탈로만 귀속되었다. 누가 누구를 어떤 기준으로 분류할 권한을 갖는지, 즉 분류 행위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는 공적 논쟁의 대상이 되지 못하였다. 이러한 구조는 1956~57년 백화제방과 반우파 운동을 거치며 더욱 강화되었다. 분류 행위의 자의성과 정치적 정당성을 비판한 지식인들은 공개 논쟁의 참여자로 인정되기보다 ‘우파’라는 정치적 범주로 재분류되어 처벌되었다. 반우파 운동은 일부 지식인에 대한 처벌에 그치지 않고 대학생과 지식인을 좌파・중도・우파로 나누어 정치적 충성을 확인하는 전사회적 분류 작업으로 전개되었다(Wu 2020). 그 결과 중국에서는 분류 권한에 대한 비판마저 다시 분류의 대상으로 흡수되었고, 당-국가의 분류 권한 자체가 그 권한에 의해 보호되는 정치적 환경이 확립되었다.
중국에서 1958년 호구등기조례가 도입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정치적 토대에 기인한다. 호구 제도의 직접적인 도입 목적은 도시 공업화에 필요한 식량과 노동력을 계획적으로 분배하고 농촌과 도시 간 이동을 통제하는 데 있었다(Solinger 1999). 그러나 농촌 인구의 도시 유입을 법적으로 금지하고 전 국민을 농업과 비농업 후커우로 이원화하는 차별적인 제도가 별다른 사회적 도전이나 당내 이견 없이 정착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혁명기와 토지개혁기를 거치며 국가가 주민을 분류할 수 있는 권한이 이미 제도적으로 보호된 상태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토대 위에서 호구등기조례가 시행되면서 전국민은 농업과 비농업 후커우로 이원화되었고, 농업 후커우 소지자의 도시 이주는 법적으로 금지되었다.
(2) 베트남: 분류 권한에 대한 도전과 공개적 시정
베트남공산당 역시 1953~56년 중국식 계급 분류에 기초한 토지개혁을 실시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광범위한 폭력과 오분류가 발생하였다.5). 그러나 폭력과 과오가 드러난 방식은 중국과 결정적으로 달랐다. 중국에서 토지개혁 과오가 주로 당 내부 문서를 통해 처리된 것과 달리, 베트남에서는 농민들의 공개 청원, 지방 봉기, 그리고 도시 지식인들의 공개 비판 등 여러 경로를 통해 분류 과오가 당-국가 바깥으로 드러났다. 1956년 토지개혁의 과오에 대한 농민의 불만이 공개적으로 분출되기 시작하였고, 호치민에게 전달된 청원이 급증하였으며, 11월에는 응에안성 꾸인르우(Quỳnh Lưu)에서 가톨릭 농민들이 토지개혁 시정을 요구하며 봉기를 일으켰다(Moise 1983; Szalontai 2005). 가톨릭은 베트남 북부에 강한 지역적 기반을 가진 주요 소수 종교 공동체였으며, 이 지역의 가톨릭 농민들은 토지개혁 과정에서 교회 연계 토지가 수용되거나 상대적으로 풍족한 신자들이 지주로 오분류되는 일이 많아 토지개혁에 특히 강하게 반발하였다(Moise 1983; Szalontai 2005). 이 봉기가 당에 상징적으로도 중요했던 이유는 발생 지역에 있었다. 꾸인르우가 속한 응에안성은 호치민의 고향이자 1930~31년 응에띤 소비에트 운동의 발원지로, 베트남 공산주의 혁명의 상징적 기원으로 기억되어 온 지역이었다(Báo Nghệ An 2025). 혁명적 정통성의 심장부에서 토지개혁에 반발하는 봉기가 일어났다는 사실은 당의 분류 행위가 농민 대표성을 훼손하였다는 인식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
당시 베트남공산당이 직면한 위기는 토지개혁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1955~56년 북베트남은 토지개혁 시행 혼란과 장기 전쟁의 후유증, 자연재해가 겹치며 일부 지방에서는 기근 수준의 심각한 식량 위기에 처했으며, 따라서 도시 배급 또한 큰 폭으로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식량난은 토지개혁 과오에 대한 농민 불만이 청원과 봉기로 폭발하는 도화선이 되었다(Moise 1983; Szalontai 2005). 더욱이 1956년 흐루쇼프의 스탈린 비판 이후 사회주의권에 해빙 분위기가 퍼지면서 도시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당의 권위에 대한 비판 목소리가 높아졌다. 하노이의 지식인과 문학인들은 『인문(Nhân Văn)』과 『자이펌(Giai Phẩm)』이라는 두 문예 잡지를 창간해 당의 문화 통제, 토지개혁의 과오, 관료주의를 공개 비판하는 운동을 하였다(Szalontai 2005; Truong 2020). 이러한 조건에서 토지개혁 시정은 행정 오류의 수정을 넘어 당의 정당성을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하였다.
베트남공산당은 결국 공개 사과를 선택하였다. 1956년 8월 호치민은 「농촌 동포에게 보내는 서신」을 통해 토지개혁의 오류를 공개적으로 인정하였고, 토지개혁을 총괄한 쯔엉찐(Trường Chinh)은 당 서기직에서 물러났으며 시정 정책이 통과되었다(Moise 1983). 시정의 규모는 이 사태의 심각성을 잘 보여준다. Szalontai(2005)에 따르면 시정 과정에서 해안 지역 피고의 약 70%, 비엣박(Việt Bắc) 지역 피고의 약 83%가 재분류되었으며, 쯔엉찐 스스로도 피분류자의 60% 이상이 오분류라고 인정하였다. 이 시정은 비공개 행정 명령이 아닌 국회-정부 합동 회의에서 공식 의제로 상정되어 처리되었다(Truong 2020, 120). 이는 분류 작업을 수행한 당의 최고 지도부가 자신의 분류 행위의 오류 가능성을 공개적으로 인정하였다는 점 그리고 그 시정이 당의 내부 문서가 아니라 국가 최고 입법・행정 기구의 공식 심의를 거쳤다는 점에서 국가의 분류 권한이 공개적으로 검증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정치적 선례를 형성하였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러한 정치적 토대 위에서 1964년 정부령 제104-CP호를 통해 호커우가 시행되었다(World Bank and VASS 2016).
3. 시장화 이행기 분류 권한의 재생산과 호구 제도의 분기
중국과 베트남은 각각 개혁개방과 도이머이를 거치며 시장화에 진입하였고, 이 과정에서 계획경제 시기 중국의 단위제와 식량배급제, 그리고 북부 베트남의 집체농업과 보조배급(bao cấp) 체계가 차례로 해체되면서, 양국 모두에서 호구 제도 본래의 기능적 토대가 약화되었다. 따라서 베트남에서는 호커우 제도가 본래 기능을 상실하면서 도이머이 이후 점차 약화되는 국면에 이르렀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후커우 제도가 도시화에 따른 불균형한 자원을 분배하는 선별 장치로 새롭게 기능하게 되었다.
양국이 시장화라는 공통된 변화 속에서도 왜 사회주의 체제의 유산인 호구제도의 발전 양상에서는 큰 차이를 보이게 되었는지에 대해, 본 연구는 앞에서 살펴보았듯, 혁명기와 토지개혁기의 국가가 국민을 구분하여 자원을 배분할 수 있는 분류 권한에 대한 정당성이 사회적으로 쟁점화될 수 있었는지에 배경 차이가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본다. 분류 권한의 정당성이 쟁점화될 수 없었던 중국에서는, 호구를 새로운 희소 자원과 다시 연계할 때 발생하는 불평등이 호구 제도 자체에 대한 도전으로 확장되지 않고, 개별적인 행정 또는 자격의 문제로 처리되었다. 즉 후커우가 낳는 불평등은 제도의 존폐를 묻는 정치적 쟁점이 아니라, 어떤 요건을 갖춘 사람에게 도시 호구나 그에 준하는 복지 접근 자격을 부여할 것인가라는 행정적 기준의 문제로 다루어졌다. 그 결과 불평등에 대한 대응은 선별 기준을 완화하거나 자격 대상을 넓히는 방식에 국한되었고, 분류 권한 자체는 유지될 수 있었다.
실제로 후커우로 파생되는 불평등, 가령 농민공의 유수 아동 문제와 같은 삼농 문제 등은 중국 내에서도 오랜 기간 공개적으로 쟁점이 되어 왔으나, 후커우 제도 자체의 폐지에 대한 논의가 아니라, 복지 접근 자격의 확대를 요구하는 형태에 머물렀으며, 중국 당국도 선별 구조 자체는 유지한 채 자격 조건만을 조정해오는 방식으로 대응해왔다(Chan 2019; Wang 2005). 2026년 5월에 발표된 국무원 의견이 취업한 지역의 사회보험의 호적 제한을 전면 철폐하는 등 복지 접근을 상주지 기준으로 확대하면서도, 공급이 부족한 서비스에 대해서는 적분제식 차등 공급을 허용하고 인재유치를 기본공공서비스와 구분한 것(国务院 2026) 또한 선별 구조 자체는 폐지하지 않는 이러한 접근 방식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반면 분류 권한의 정당성이 쟁점화될 수 있었던 베트남에서는 호커우를 새로운 자원과 다시 연계하여 특정 집단을 배제하려는 시도가 곧바로 그 배제의 정당성을 묻는 사회적 문제로 쟁점화될 가능성이 컸기에, 호커우를 강화하는 방향은 정치적 부담이 큰 선택이었다. 실제로 베트남은 1956년 토지개혁 공개 시정 이래 사회적 압력을 거듭 정책의 공개적 시정으로 흡수해 왔으며(Kerkvliet 2005), 호커우 역시 배제를 강화하기보다 완화하고 나아가 폐지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아래에서는 이 과정을 시장화 전후의 네 시기, 곧 계획경제 시기, 1980년대 개혁개방・도이머이, 1990년대 시장경제 심화, 그리고 2000년대 이후로 나누어 살펴본다.
(1) 계획경제 시기
앞 절에서 보았듯, 중국의 1958년 호구등기조례는 분류 권한의 정당성이 이미 사회적으로 쟁점화되기 어려운 환경에서 도입되었다. 이러한 토대 위에서 후커우는 인민공사, 단위제, 식량배급제와 긴밀하게 결합할 수 있었고, 이는 큰 사회적 저항 없이 관철될 수 있었다. 특히 농민의 생계는 농업 후커우와 연동되는 인민공사・생산대대・생산소대의 삼단계 집체 조직에 묶여 있었기 때문에, 설령 도시로 이주한다 하더라도 자신의 후커우가 아닌 도시에서는 식량 배급을 받을 수 없어 생존이 어려웠다. Wu and Treiman(2004)에 따르면 이러한 이중 봉쇄 속에서 1959년 이후 호구 전환율은 1% 미만으로 급락하여 개혁기까지 회복되지 않았다. 이는 중국의 호구 제도가 다른 제도와의 결합 강도가 매우 높았으며, 따라서 국민의 삶 전반에 미치는 영향 또한 매우 클 수밖에 없었음을 보여준다.
반면 베트남에서는 1964년 정부령 제104-CP호로 호커우가 도입되었으나, 그러한 결합은 처음부터 느슨하였다. 북부의 집체 농업은 1970년대 후반 농민들이 협동농장 노동을 줄이고, 국가 조달 곡물을 사적 시장으로 빼돌리며 사실상 무력화되고 있었고(White 1986), 1975년 통일 이후 남부로 집체화와 호커우를 확대하려는 시도는 광범위한 비순응에 부딪혔다. 특히 남부 농민의 저항은 북부에서 관찰된 일상적 비순응에 그치지 않고, 파업・수확물 은닉과 같은 공개적이고 대결적인 형태를 띠었으며, 농민들은 친족・비공식 네트워크・지역 규범을 동원해 사유지를 지키고 재분배 정책을 회피하였다(Dang 2010). 더욱이 남부 메콩 삼각주는 1970년 남베트남의 경자유전(Land-to-the-Tiller)법으로 소작이 대부분 해소되어 1975년 초 농촌 인구의 약 70%가 경작지의 80%를 소유한 중간계급 농민으로 재편된 지역이었다(Bui and Preechametta 2016). 이처럼 사적 토지소유에 기반한 시장 지향적 농업 구조가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북부식 집체화는 남부에 뿌리내리지 못하였다. 실제로 1979년 말까지 남부의 집체화는 농가의 33.5%, 경작지의 27%에 그쳤고, 메콩 삼각주에서는 그 비율이 면적 기준 0.6%에 불과하였다(Bui and Preechametta 2016).
(2) 1980년대 개혁개방과 도이머이
1980년대에 들어 양국 모두에서 호구가 본래 묶여 있던 장치가 약해지기 시작하였으나, 이러한 약화가 진행된 방식에는 차이가 있었다. 중국에서는 단위제와 식량배급제가 약화되면서 후커우의 원래 기능도 느슨해졌다. 1984년 국무원은 「농민의 집진 입호 문제에 관한 통지」(国发〔1984〕141号)를 통해 자비로 식량을 조달하는 농민에게 소도시 정착을 허용하는 자리양식호구(自理口粮户口)를 도입하였고, 1985년 공안부 「도시 임시거주인구 관리 잠행규정」은 임시거주증(暂住证)을 도입하여 거주와 등록을 분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완화는 농업 및 비농업 구분과 분류 권한 자체를 폐기한 것이 아니라, 분류의 틀은 그대로 둔 채 그 위에서 접근 조건만 조정한 것이었다. 분류 권한의 정당성이 쟁점화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제도의 큰 틀은 유지한 채 운용 방식만을 조정할 수 있었던 것이다.
베트남에서는 같은 시기의 변화가 다른 성격을 띠었다. 1970년대에 누적된 농민의 일상적 비순응을 배경으로 1981년 지시 100호로 협동농장 내 가구 단위 청부 생산이 부분 허용되었고, 1986년 도이머이를 거쳐 1988년 결의 10호에서 가구가 농업 경영의 기본 단위로 공식 인정되었다(Kerkvliet 2005). 이는 농민의 비순응이라는 아래로부터의 압력이 국가의 기존 편성을 거듭 수정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1956년 토지개혁 시정에서 나타난 양상, 곧 국가가 설정한 구분이 사회적 대응 속에서 조정되는 양상이 이 시기에도 이어졌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조건에서 호커우는 식량 배급이나 고용 등 다른 제도와의 결합을 오래 유지하지 못하였다.
(3) 1990년대 시장경제 심화
1990년대에 들어 양국 모두에서 호구는 본래 결합되어 있던 자원과의 연결이 완전히 끊어졌지만, 그 빈자리를 새로운 자원으로 메울 수 있었는가에서는 큰 차이를 보였다. 중국에서는 1993년 국무원 「양식 유통체제 개혁 가속화에 관한 통지」에 따라 같은 해 4월부터 전국에서 식량배급표(粮票)가 폐지되어, 후커우가 더 이상 식량배급의 기준으로 기능할 수 없었다. 그러나 거의 같은 시기에 주요 도시들, 가령 상하이에서는 1994년, 선전에서는 1995년에 투자나 주택 구입과 연계하여 도시 호구를 부여하는 남인호구(蓝印户口) 제도를 도입하였다. 이는 앞서 살펴보았던 분류권한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거의 전무한 상황에서, 후커우로부터 파생되는 불평등이 제도 자체에 대한 정당성 문제로 쟁점화되기보다는, 개별 행정 문제로만 논의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반면 베트남에서는 이 시기에 호커우와 새로운 자원의 연계는 없었으며, 1980년대 이후의 약화가 뚜렷한 단절 없이 지속되었다. 시장화로 호커우의 법적 구속력이 약해진 가운데, 이주민들은 비공식 경로를 통해 제한된 사회 서비스에 접근하며 호커우 제도를 우회하였다(Hardy 2001; World Bank and VASS 2016). 분류 권한의 정당성이 쟁점화될 수 있는 조건에서는 호커우를 다시 새로운 사회적 자원과 연계하여 특정 집단을 배제하는 방향이 정치적 부담을 수반할 수 있으므로, 호커우는 새로운 자원과 결합하기보다 점차 영향력을 잃어 갔다고 해석할 수 있다.
(4) 2000년대 이후
2000년대 이후 중국에서 후커우는 시장경제 발전에 따라 1선 도시의 희소 자원을 선별하는 장치로 재편되었다고 볼 수 있다. 2003년 손즈강(孙志刚) 사건을 계기로 도시 부랑인 수용송환제도(「도시 생활무착 부랑걸식인원 구조관리 방법」, 国务院令第381号)이 폐지되면서 물리적인 이동에 대한 제한은 많이 완화되었다. 그러나 도시 진입의 제도적 문턱은 오히려 더 강화되었다고 볼 여지가 있다. 2014년 「국가신형도시화규획(2014~2020년)」과 「호구제도 개혁의 진일보 추진에 관한 의견」(国发〔2014〕25号)은 농업과 비농업 구분을 폐지하면서도 도시 규모별 차등 개방과 거주증 제도(2016년 「거주증 잠행조례」, 国务院令第663号)를 통해 1선 도시의 진입 장벽을 새로 설계하였다. 이러한 선별을 구체화한 장치가 2010년 전후 광둥성에서 처음 도입되어 1선 도시로 확산된 적분제로, 이는 학력・소득・사회보험 납부를 점수화하여 도시 자원에 대한 접근 자격을 차등 부여한다. 2026년 국무원 의견이 상주지 기준 복지를 확대하면서도 인재유치와 기본공공서비스를 구분해 적분제식 차등 공급의 여지를 남긴 것(国务院 2026) 역시 이러한 선별 구조가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반면 베트남에서는 호커우가 끝내 새로운 자원과 결합하지 못한 채 법적으로 해체되었다고 볼 수 있다. 2006년 거주법은 KT1~KT4의 4개 등급을 영구・임시 2개로 축소하였고(World Bank and VASS 2016), 2020년 거주법 개정은 종이 호커우 등록부를 폐지하며 거주 정보에 근거한 법적 차별을 명시적으로 금지하였다(National Assembly of Vietnam 2020). 2023년 1월 1일부터 종이 호커우 등록부의 효력이 종료되고 거주 관리가 디지털 체계로 전환되었다.
이상에서 보듯 양국의 변화는 같은 네 시기로 정리되더라도 각 시기를 이루는 사건과 그 방향이 상반된다. 중국에서는 후커우의 결합 대상이 단위제에서 토지재정 및 복지로 옮겨 가며 선별 기능이 강화된 반면, 베트남에서는 호커우가 생계 자원과 등급 구조에서 차례로 분리되며 그 기능이 약화되었다. 나아가 변화가 진행되는 방식에서도 양국은 대비된다. 중국의 변화가 주로 위로부터의 정책 결정을 통해 또렷한 분기점을 이루며 진행되었다면, 베트남의 변화는 그러한 단일한 분기점보다 일상적 비순응과 비공식적 우회가 누적되며 점진적으로 진행되었다. 이러한 변화 양식의 차이 또한 분류 권한의 정당성이 쟁점화될 수 있었는가의 차이가 반영된 결과로 볼 수 있다. <표 2>는 이러한 대비를 정리한 것이다.
<표 2> 호구 제도의 시기별 변화 비교
| 시기 | 중국: 제도적 결합의 강화 | 베트남: 제도적 결합의 약화 |
|---|---|---|
| ① 계획경제・도입기 | 1958년 호구등기조례: 단위제・배급제・인민공사와 결합, 농촌 인구의 도시 이주 법적 금지(1959년 이후 전환율 1% 미만) | 1964년 정부령 104-CP호로 호커우 시행(북부): 1975년 통일 후 남부로 확대 시도했으나 메콩 농민 비순응으로 집체화・결합 부진 |
| ② 개혁 시작기 (1980년대) | 개혁개방, 단위제・식량 배급제 해체로 후커우 본래 기능 약화 | 1981년 지시 100호・1986년 도이머이・1988년 결의 10호로 가구 단위 경영 환원, 호커우-생계 자원 연결 약화 |
| ③ 시장경제 심화기 (1990년대) | 토지재정・도시 복지와 재결합, 도시 자본 축적 도구로 재기능화 | 2006년 거주법: 거주 형태 4개 범주(KT1~KT4) → 영구・임시 2개 범주로 축소 |
| ④ 2000년대 이후 | WTO 가입 후 1선 도시 적분제 도입・강화: 2026년 국무원 의견도 선별 구조 유지 | 2020년 거주법 개정 → 2023년 1월 1일 종이 호커우 효력 종료, 거주 기반 차별 법적 금지 |
Ⅳ. 호구 제도의 제도적 결합과 도시 시민권 구성: 상하이와 호치민시
앞 장에서 살펴본 국가 수준의 분기가 두 대도시의 일상에서 어떻게 구체화되는지를 보기 위해, 본 장은 각각 중국과 베트남의 최대 경제 중심지이자 이주민 유입이 많은 상하이와 호치민시를 비교한다. 2025년 말 기준 상하이 상주인구는 2,485.41만 명이며, 이 가운데 외래 상주인구가 974.50만 명으로 약 39.2%를 차지한다(上海市统计局 2026). 호치민시는 2025년 7월 행정구역 개편으로 빈즈엉성, 바리아붕따우성과 통합되어 관할 인구가 약 1,400만 명으로 확대되었다(National Assembly of Vietnam 2025). 두 도시는 대규모 이주민 유입에 따른 주거 부족과 공립학교 수용 부담 등 외형적으로 유사한 도시 문제를 겪고 있지만, 호구 제도가 작동하는 방식은 매우 상이하다. 상하이에서는 후커우가 적분제, 인재유치, 교육 및 주거 자격을 매개로 이주민을 선별하는 장치로 여전히 강하게 기능하는 반면, 호치민시에서는 2020년 거주법 개정과 2023년 종이 호커우 폐지로 호커우가 도시 자원 배분을 직접 통제하는 기능을 상당 부분 상실하였다(National Assembly of Vietnam 2020). 본 장은 이러한 차이를 시민권, 교육, 주거 및 도시공간이라는 세 차원에서 비교한다. 이 세 영역은 사회주의 국가가 자원 배분의 평등을 가장 강조해 온 영역이지만(London 2014), 현실에서는 호구 제도를 매개로 도시와 농촌, 정주민과 이주민 사이의 격차가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영역이기도 하다(Chan and Wei 2019; World Bank and VASS 2016; Wu and Treiman 2004).
본 연구가 두 나라의 여러 도시 가운데 상하이와 호치민시를 비교 사례로 택한 기준은 크게 두 가지이다. 먼저 두 도시는 각국에서 최대 경제 중심지이자 외래 상주 인구가 매우 많은 도시라는 공통점이 있다. 상하이는 2025년 말 외래 상주인구가 974.50만 명에 이르는 대규모 이주 유입 도시이며(上海市统计局 2026), 호치민시도 베트남에서 경제 규모가 가장 큰 경제 중심지이자 국내 이주가 가장 많은 도시에 해당한다(World Bank and VASS 2016; Liu and Meng 2019). 두 도시의 절대 규모는 다르지만, 경제적 위상과 이주 압력처럼 호구 정책의 결과에 영향을 줄 수 있는 핵심 조건이 유사하다는 점에서, 두 도시 사례 비교 분석은 도시 규모나 이주 압력과 같은 일반적인 요인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양국 간 차이를 설명할 수 있다는 이점이 크다. 또한, 두 도시는 호구를 통한 선별의 이해관계가 가장 첨예하게 나타나는 곳이기도 하다. 이주 압력과 도시 자원의 희소성이 클수록 국가가 호구를 자원 배분의 관문으로 활용할 유인도 커지므로, 두 도시는 각국에서 분류 권한의 효과가 가장 뚜렷하게 관찰되는 도시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제도의 연속성이라는 관점에서는 1950년대부터 사회주의 체제를 일관되게 운용해 온 베트남 북부의 하노이・하이퐁이 호치민시보다 더 전형적인 사례로 볼 여지가 있다. 그럼에도 위의 기준에 비추어 볼 때, 호치민시가 경제 규모와 이주 유입 면에서 더 상하이와 유사한 특징을 가진 도시라고 판단할 수 있다는 점에서 호치민시를 사례 분석 도시로 채택하였다. 또한 남부의 비교적 짧은 사회주의화 경험은 이러한 비교의 타당성에는 큰 영향을 준다고 보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앞 장에서 살펴보았듯 베트남에서는 북부의 경우 1956년 토지개혁 시정과 호치민의 공개 사과를 통해 분류 권한이 공개적으로 검증되며 약화되었고, 남부의 경우 분류 권한이 애초에 정착하지 못하였다. 경로는 서로 달랐으나 베트남의 남북 지역 모두 중국에 비해 약한 분류 권한을 보였다는 점에서, 호치민시는 비록 베트남 전체를 대표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으나 분류 권한이 강하게 제도화된 상하이와의 대비를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내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1. 도시 시민권 접근: 등록 자격의 결합과 분리
중국의 대도시에서는 2010년대 이후 적분제(积分制)를 도입하여 호구 취득 경로를 형식적으로 개방하였다(Dong and Goodburn 2020; Zhang 외 2019). 적분제는 학력・직종・소득・사회보험 납부 기간 등 기준에 따라 점수를 부여하고, 일정 점수 이상을 충족한 이주민에게 도시 호구 접근을 허용하는 제도이다. 그러나 실제 작동 방식은 호구제의 보편적 완화라기보다 선별적 시민화에 가깝다(Chan 2019). 단위제와 배급제 같은 사회주의 시기의 자원 배분 장치로 기능하였던 후커우 제도가 시장화 이후에는 학력・소득・사회보험 같은 새로운 선별 기준을 통해 희소한 1선 도시의 자원에 접근할 수 있는 자격으로 기능하며, 여전히 사회의 자원을 배분하는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적분제는 크게 두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첫 단계인 거주증 적분 120점은 자녀의 공립학교 우선 배정과 까오카오 응시 자격 같은 자녀 세대의 도시 진입 통로를 결정한다. 두 번째 단계인 영구 상하이 호구 취득은 2025년 말 개정 규정(沪府规〔2025〕8号)에 따르면 7년 이상의 거주증 보유와 7년 이상의 상하이 직공 사회보험 납부, 개인소득세 납부, 중급 이상 전문기술직 또는 국가 2급 이상 직업자격을 요구한다(上海市人民政府 2025a). 또한 최근 4년 중 36개월 및 신청 당월의 사회보험 납부 기준이 전년도 상하이 전체 도시단위 취업자 평균임금의 2배에 도달한 경우에는 전문기술직・직업자격 요건이 면제될 수 있고, 3배에 도달한 경우에는 거주증 보유 및 사회보험 납부 기간이 5년으로 단축될 수 있다(上海市人民政府 2025a). 이러한 요건은 정규직, 지속적 사회보험 납부, 일정 수준 이상의 기술・직업 자격 또는 높은 소득 수준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단기 계약과 비공식 고용이 일반적인 저임금 제조업・건설업・서비스업 노동자에게는 제도적으로 충족하기 어렵게 설계되어 있다.
또한 인재유치(人才引进) 경로로도 상하이의 후커우를 취득할 수 있다. 2025년 개정 규정은 상하이에서 안정적으로 근무하고 법에 따라 사회보험에 가입한 인재 가운데 고급인재, 업종・지역 추천기관의 긴급수요 인재, 고숙련 인재, 혁신창업 인재, 전문・기타 특수 인재를 상주호구 신청 대상으로 규정한다(上海市人民政府 2025a). 즉 상하이에서는 호구 취득이 특히 정부가 중점적으로 지원하는 산업에서 일하는 고숙련 인력에게 더 유리하다고 볼 수 있다.
앞서 보았듯 2026년 국무원 의견도 공급 부족 서비스에 대한 차등 공급을 허용해 선별 구조를 유지하고 있어(国务院 2026), 1선 도시 후커우의 선별적 취득 방식은 당분간 유지될 여지가 크다. 상하이와 같은 1선 도시의 도시 정착권, 공립 학교 교육 기회, 공공주택 등은 아직까지 수요에 비해 공급이 부족한 상황이므로, 거주증・적분제・인재 기준을 통해 후커우를 취득하는 방식이 지속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 상하이를 비롯한 1선 도시에서의 후커우는 도시 희소 자원에 의해 오히려 선별 방식의 강화로 재조정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호치민시는 2020년 거주법 개정의 핵심인 종이 호커우 등록부 폐지와 거주 정보에 근거한 법적 차별 금지를 도시 행정의 기본 원칙으로 삼고 있다. 2023년 1월 1일부터 종이 호커우 등록부의 효력이 종료되면서 거주 정보가 국가인구데이터베이스와 디지털 신분 인증(VNeID)을 통해 관리되도록 전환되었다(Government of Vietnam 2024). 또한 2026년 7월 1일 시행 예정인 거주법 개정안에서는 6세 미만 아동이 부모 또는 법정대리인과 함께 거주하는 경우 본인 소유가 아닌 합법적 거주지에도 영구거주 등록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신분증법 개정은 거주정보를 국가인구데이터베이스와 연계함으로써 종이 호구부 폐지 이후 거주 관리가 디지털 행정 체계로 전환되고 있음을 보여준다(Ministry of Public Security 2025). 즉 베트남은 상하이와 같은 7년 거주 요건이나 적분제와 같은 점수 기반 영구 정주권 선발 장치를 도입하지 않으며, 등록 자체의 법적 문턱을 낮추는 방향으로 개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법률 개정이 곧 실질적 평등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베트남은 종이 호구부를 폐지했지만, 영구거주 등록은 여전히 합법 주거지 증빙을 전제로 한다. 특히 임차, 차용 또는 거주허락을 받은 주거지에 영구 등록하려는 경우에는 주택 소유자와 세대주의 동의가 필요하며, 지방 인민의회가 정한 1인당 최소 주거면적 기준을 충족해야 한다. 거주법 제20조는 이 기준이 1인당 8m2보다 낮을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National Assembly of Vietnam 2020). 이러한 요건은 비공식 임대와 과밀 주거에 의존하는 이주노동자에게는 합법적 영구등록을 어렵게 만드는 주거 기반 장벽으로 작용할 수 있다.
다만 영구 등록을 충족하지 못했다고 해서 곧바로 사회권적 자격의 법적 박탈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상하이와 대별된다. 2020년 거주법은 영구・임시 거주지 정보를 시민의 합법적 권익을 제한하는 조건으로 남용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으며, 영구 등록 요건 역시 합법 거주지와 지방 인민의회가 정한 최소 주거면적 충족 문제로 규정한다(National Assembly of Vietnam 2020). 사회보험법도 가입 대상을 영구 등록 여부가 아니라 노동계약 관계를 기준으로 규정하고 있으며, 2024년 사회보험법은 1개월 이상 노동계약을 맺은 베트남 시민을 강제 사회보험 가입 대상으로 둔다(National Assembly of Vietnam 2024). 주택 영역에서도 2023년 주택법은 도시 저소득층과 산업단지 안팎의 기업 노동자를 사회주택 지원 대상에 포함시킨다(National Assembly of Vietnam 2023). 따라서 호치민시의 등록 장벽은 합법 주거 증빙과 지방정부가 정한 주거 면적 기준이라는 우회적 장벽을 통해 정주 접근을 어렵게 하는 구조에 가깝다.
2. 교육 접근: 응시 자격의 차등화와 공급 제약
상하이의 공립학교 입학과 시험 응시 자격은 부모의 후커우와 거주증 적분에 의해 엄격하게 통제된다. 2026년 상하이시 의무교육 입학 지침에 따르면, 이주민 자녀가 상하이의 의무교육 단계 학교에 입학하려면 아동 본인의 유효한 상하이 거주증 또는 거주등록증이 필요하고, 부모 중 한 명은 유효한 상하이 거주증과 함께 2025년 7월 1일부터 2026년 6월 30일까지 상하이 직공 사회보험 6개월 납부 증명(보충 납부 제외) 또는 2026년 6월 30일까지 3년 연속 유연고용 등록을 제시해야 한다(上海市教育委员会 2026a). 시험 제도 자체에서도 후커우와 거주증 적분의 장벽은 크다. 2026년 상하이 중카오 등록 규정은 비상하이 호구 학생이 상하이에서 중카오에 응시하려면 부모 한쪽이 유효한 상하이 거주증을 보유하고 거주증 적분이 표준점수에 도달해야 하며, 학생 본인도 유효한 상하이 거주증을 보유해야 한다고 규정한다(上海市教育委员会 2025a).
대학 입학시험인 까오카오(高考)의 경우에도 비상하이 호구 학생의 상하이 응시는 부모의 거주증・적분 요건과 연결된다. 2026년 상하이 보통고교 시험모집 등록 규정에 따르면, 비상하이 호구 학생이 상하이에서 응시하려면 부모가 거주증 적분 표준점수에 도달한 거주증 보유자여야 하며, 학생은 상하이에서 중카오를 치렀거나 부모 한쪽이 3년 연속 상하이 거주증을 보유한 조건을 충족하고, 동시에 상하이의 고등학교 단계 학교를 졸업해야 한다(上海市教育委员会 2025b). 반면 거주증은 있으나 적분이 표준점수에 미달한 가정의 자녀는 중등직업학교 자주모집을 통해 전일제 중등직업교육을 이수한 경우에도 전문대 층위 전형으로 제한된다(上海市教育委员会 2025b; 上海市教育委员会 2026b). 따라서 상하이의 교육 정책은 의무교육 단계의 입학 통로를 일정하게 열어두면서도, 중카오와 까오카오의 응시 자격을 부모의 거주증・적분 요건과 연결함으로써 다음 세대의 도시 시민권 진입을 제약하는 구조로 작동한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적분 요건을 충족하지 못한 가정의 자녀는 부모와 분리되어 호구 소재지로 돌아가 시험을 치러야 하는 가족 분리 문제가 발생한다.
호치민시의 경우 초・중등 입학 배정 시에 현재 거주지가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된다. 2025~2026학년도 호치민시 초등학생은 행정구역상 동(坊) 경계에 따라 기계적으로 배정하지 않고, 교육부문 데이터베이스에 등록된 현재 거주지와 GIS 기반 통학거리 정보를 활용해 거주지 인근 학교 배정을 우선하도록 하고 있다(VTC News 2025). 다만 이러한 방식은 실제 거주지가 행정 데이터에 제대로 등록되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비공식적으로 임대를 했거나 행정 데이터를 제대로 갱신하지 않은 경우에는 이주노동자 자녀가 실제 거주지 기준 배정에서 불리해질 가능성은 남아 있다. 그러나 적어도 중국의 대학입시제도처럼 호구 소재지로 귀향해서 응시를 강제하는 제도적 장벽은 없으며, 초・중학교 입학 배정이 실제 거주지와 행정 데이터를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그러나 학교 수용 능력의 한계 때문에 학교 접근이 완전히 균등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2025년 행정구역 재편으로 기존 호치민시와 빈즈엉성・바리아붕따우성이 ‘호치민시’라는 새 광역 행정단위로 통합되면서(National Assembly of Vietnam 2025) 2026~2027학년도 호치민시의 교육 행정 관할 범위도 확대되었다. 행정구역 재편 이후 치러지는 2026~2027학년도 10학년 입학 전형에서 호치민시의 9학년 졸업 예정자는 169,000명 이상으로 추산되었지만, 표준 학급 정원을 적용하면 공립 고등학교 수용 인원은 103,739명, 전체의 61%에 그친다. 호치민시 교육청은 시설 재점검과 정원 조정을 통해 이를 118,356명, 약 70%까지 늘리는 방안을 제시하였지만, 이 경우에도 약 51,000명은 사립학교, 직업교육기관, 계속교육 체계 등으로 이동하게 된다(SGGP 2026a; VietnamNet Global 2026). 또한 호치민시는 매년 5만~6만 명의 학생 증가를 겪고 있으며, 2030년 목표 학급 수를 맞추기 위해 약 4,669개의 교실이 부족할 것으로 추산된다(SGGP 2026b). 즉 호치민시의 교육 차등은 거주 등록 상태가 시험 응시나 입학 자격 자체를 박탈하는 제도적 배제가 아니라, 학교 수용 능력 부족과 행정 데이터 누락이라는 행정적・현실적 제약을 통해 나타난다.
3. 주거・도시공간 접근: 보상 자격의 배제와 사회주택 확대
성중촌(城中村)은 도시 공간 안에 편입되었지만 농촌 집체 토지 소유 구조가 남아 있는 지역으로, 저렴한 임대료 때문에 농민공의 주요 거주지로 기능해 왔다. 상하이시는 2014년부터 성중촌 개조를 추진해 왔으며, 2025년에는 59개 프로젝트, 3만 무(亩) 규모, 2,100억 위안 투자 계획이 수립되는 등 사업이 크게 가속화되고 있다. 이는 성중촌 개조를 통해 사회자본과 시장 주체를 끌어들이는 대규모 도시재생 사업을 추진하고자 하는 목적을 갖는다(上海市住房和城乡建设管理委员会 2025).
성중촌 개조에서 가장 취약한 집단은 민간・비공식 임대에 의존하는 이주민 세입자라고 할 수 있다. 상하이의 2025년 개정 「상하이시 국유토지상 주택 수용・보상 실시세칙」은 보상협약의 당사자를 주택 소유자인 수용 대상자와 공공주택 임차인으로 한정한다. 따라서 성중촌의 일반 민간임대 이주민은 철거로 주거를 잃더라도 보상협약의 직접 당사자가 되기 어렵다(上海市人民政府 2025b). 한편 공공임대주택은 제도상 상하이 이주노동자를 포함하지만, 신청자는 상하이 상주호구 또는 거주증, 노동・근로계약, 사회보험 납부, 무주택 또는 주거곤란 요건을 충족해야 한다. 따라서 비정규 고용이나 사회보험 미가입 상태의 이주민에게는 대체 주거 접근성이 제한될 수 있다(上海市住房和城乡建设管理委员会 2023). 결국 상하이의 성중촌 철거・개조는 이주민에게 주거 상실 위험을 초래할 수 있지만, 후커우 자격이 되지 않으면 보상이나 대체 주거 혜택을 받기가 어려운 구조이다.
호치민시는 상하이시와 다른 경로를 보인다. 2023년 주택법(National Assembly of Vietnam 2023)은 산업단지・경제구역・수출가공구 근로자를 사회주택의 명시적 대상으로 포함시켰다. 이는 사회주택 접근이 사실상 호커우로 제한되었던 2014년 주택법과 대비되며, 공공임대주택 입주에 거주증과 사회보험 납부를 요구하는 상하이와도 다르다. 또한 베트남 정부는 2021~2030년 기간 저소득층과 산업단지 노동자를 위한 사회주택 100만 호 공급을 추진하고 있다(Vietnam News Agency 2024). 즉 정책 방향은 이주노동자를 주거 정책의 정식 대상으로 포함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법적 대상 확대가 곧 충분한 공급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호치민시는 2030년까지 사회주택 70,000호 공급을 목표로 하고 있으나, 현재 완공량은 목표에 크게 못 미치는 수준이다(Vietnam News Agency 2024). 많은 이주민은 여전히 소형 임대방인 냐쩌(nhà trọ)에 거주하며 월세가 소득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Lin and Mao 2022), 이주민의 임차 비율도 현지 주민에 비해 현저히 높다(Liu and Meng 2019). 또한 호치민시에서도 재개발 과정에서 낮은 보상과 강제 이주, 생계 상실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가령 호치민시 2군(Quận 2)의 투티엠(Thủ Thiêm) 신도시 개발은 2000년대 이후 상당 규모의 가구를 이주시켰고, 보상이 시장 가격보다 낮으며, 1층 상점 운영자가 강제로 이주한 고층 주택에서 생계 수단을 상실하는 문제가 보고된다(Huynh 2018). 그러나 호치민시의 재개발은 주로 프로젝트 단위로 진행되며 토지 보상 갈등과 재정 조달 문제로 진척 속도가 느리고, 비공식 주거에 대한 묵인도 광범위하다. 이는 상하이처럼 도시 전역에서 저가 이주민 주거지를 체계적으로 정비하고 대체하려는 방식과 구분된다. 결과적으로 상하이에서는 후커우 자격이 도시 재개발의 보상 대상 자격을 직접 결정함으로써 이주민을 도시 공간에서 배제하는 장치로 작동하는 반면, 호치민시에서는 이주노동자가 법적으로는 사회주택의 정식 대상에 포함되었어도 주택 공급 부족과 비공식 주거가 공존하는 양상을 보인다.
상하이와 호치민시에 거주하는 이주노동자는 여전히 경제적, 사회적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호구 제도를 포함한 법적 제도가 두 도시에서 작동하는 방식은 다르다. 상하이는 적분제를 통한 후커우 취득의 선별화, 후커우에 따른 교육 접근권 제한, 성중촌 재개발에서의 후커우 미소지자 배제 등의 방식으로 이주민을 선별적으로 포섭하고 다수 저숙련 이주노동자를 주변화하는 반면, 호치민시는 거주법 개정과 차별 금지를 통해 적어도 법적인 차별은 완화하려고 하고 있다. 중국의 후커우는 단순히 거주등록제도로만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기회의 보이지 않는 천장으로 기능하며, 1선 도시의 보호주의와 도시 과밀화 등의 이유로 후커우 제도의 1선 도시에서의 개혁은 여전히 매우 부진한 실정이다. 반면 호치민시에서는 유사한 불평등 문제가 주거 면적 요건, 공립학교 수용 능력, 비공식 임대시장, 사회주택 공급 부족이라는 현실적 장벽을 통해 나타나지만 이는 제도적으로 고정된 배제가 아니라 행정 역량과 자원 배분의 문제라는 점에서 상대적으로 더 유연하게 조정될 여지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본 장의 내용을 <표 3>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표 3> 상하이와 호치민시의 호구 제도 비교
| 상하이 | 호치민시 | |
|---|---|---|
| 시민권 등록 자격 | 적분제, 7년 사회보험, 인재유치를 기준으로 도시 호구 자격을 선별적으로 부여, 저숙련 이주민은 충족하기 어려움 | 2020년 거주법으로 종이 호커우 폐지, 거주 정보에 기반한 차별 법적 금지. 단, 1인 8m2 요건이 우회적인 장벽으로 기능함 |
| 교육 | 의무교육은 일부 개방하지만, 중카오와 까오카오 응시자격을 부모의 거주증과 적분에 연동 → 가족 분리 | 실거주지 기준으로 학교를 배정, 응시자격 박탈은 없음. 단, 학교 수용능력 부족 제약 문제가 있음 |
| 주거 공간 | 성중촌 철거 시 후커우 소지자와 공공주택 자격자만 보상, 비자격 이주민은 배제 | 2023 주택법에서 산업단지 노동자를 사회주택 대상에 포함. 단, 공급 부족과 비공식 주거 문제 공존 |
| 배제의 성격 | 자격 자체를 적분제를 통해 제도적으로 배제하는 특징 | 법적 배제는 완화, 행정 역량과 자원 부족에 따른 현실적 제약은 지속 |
Ⅴ. 결론
본 연구는 중국과 베트남이라는 두 공산당 일당 체제 국가에서 거주등록제도가 왜 상이한 경로를 밟게 되었는지를 비교 분석하였다. 양국은 모두 사회주의 계획경제 시기에 인구 이동을 관리하고, 농촌 인구의 도시 유입을 통제하며, 배급・고용・교육・주거와 같은 핵심 자원에 대한 접근을 거주등록과 연결하였다는 점에서 제도의 출발점이 유사하다. 그러나 시장화 이후 양국 호구 제도의 발전 양상은 크게 다르다. 중국의 후커우는 배급제 해체 이후에도 1선 도시에서 교육・사회보험・주거・토지재정・공공서비스에 대한 접근 권리와 결합하며, 일종의 도시 시민권처럼 새롭게 기능하고 있다. 반면 베트남의 호커우는 도이머이 이후 점진적으로 완화되어 2006년 거주법으로 KT1–KT4 등급이 영구와 임시 등록 두 범주로 축소되었고, 2020년 거주법 개정으로 종이 호커우 등록부가 폐지되었다.
본 연구는 이러한 분기의 원인을 혁명기와 국가건설기에 형성된 당-사회 관계의 차이에서 분석하였다. 중국 공산당은 혁명기와 토지개혁기를 거치며 농촌 사회를 당-국가가 설정한 행정 범주 안으로 직접 재편하였고, 그 결과 주민을 분류하고 권리를 차등 배분하는 국가의 권한이 사회적 도전으로부터 보호된 채로 호구 제도의 토대를 이루었다. 반면 베트남공산당은 장기 전쟁과 분단이라는 조건 속에서 농민의 생계 관행과 지방의 집행 재량에 의존하며 당-국가를 수립하였고, 1956년 토지개혁 시정과 호치민의 공개 사과는 국가가 수행한 분류 행위가 사회적 검증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정치적 선례를 남겼다(Moise 1983; Szalontai 2005). 결과적으로 분류 권한의 정당성이 사회적 도전으로부터 보호되어 온 중국에서는, 단위제와 배급제가 해체된 뒤에도 후커우가 도시의 새로운 자원, 즉 토지재정・공교육・사회보험 등과 다시 연계되며 1선 도시의 선별적 시민권 장치로 새롭게 기능할 수 있었다. 반면 혁명기와 토지개혁기에 이미 당의 분류 권한 자체가 공적 검증의 대상이 되었던 베트남에서는, 호커우가 새로운 제도와 밀접하게 결합되지 못한 채 시장화와 함께 본래의 기능을 잃고 점진적으로 약화되었다.
본 연구의 기여는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그동안 서로 다른 지역연구 전통 속에서 분절적으로 축적되어 온 중국의 후커우 연구와 베트남의 호커우 연구를 하나의 비교정치적 문제로 재구성하였다. 기존 연구가 중국의 후커우는 주로 도시-농촌 이원구조와 농민공 차별의 관점에서, 베트남의 호커우는 도이머이 이후의 완화 양상을 중점으로 따로 분석해 온 반면, 본 연구는 동일한 사회주의적 출발점에서 두 제도가 갈라진 경로를 하나의 분석틀로 비교함으로써 거주등록제도가 시민권의 경계를 구성하는 정치제도임을 보였다. 둘째, 양국의 분기를 설명하기 위해 분류 권한 개념을 제시하였다. 분류 권한은 국가가 국민을 나누고 그에 따라 권리를 차등 배분하는 권력을 뜻한다. 본 연구는 이 권한의 정당성이 사회적으로 쟁점화될 수 있었는지에 따라, 사회주의의 유산인 호구 제도가 시장화 이후에도 도시 시민권처럼 작동하여 누가 도시의 공교육이나 의료 등의 복지를 온전히 누리고 누가 배제되는지가 좌우되었음을 보였다. 셋째, 이러한 분기가 호구 제도 도입 이전의 공산당 혁명기와 토지개혁기부터 제도의 본래 기능이 해체된 시장화기에 이르기까지 각 국면에서 자기강화적으로 이어졌음을 보였다. 호구가 인접 제도들과 결합하거나 그로부터 분리되는 양상을 시기별로 추적함으로써, 제도 형성기와 2020년대의 상이한 귀결 사이를 여러 국면에 걸쳐 누적된 과정으로 설명하였다.
본 연구의 한계는 크게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먼저 양국 간 비교에 집중하면서 각국 내부의 지역적 편차를 충분히 다루지 못하였다. 상하이와 호치민시가 중국의 중소도시나 베트남 북부 도시를 대표하기는 어렵다. 후속 연구는 도시 규모별 차이와 남북 차이를 보다 체계적으로 비교할 필요가 있다. 또한 본 연구는 당-국가와 농민・이주민의 관계를 중심에 두면서 도시 호구 보유자, 지방정부, 부동산 개발 주체, 기업, 교육행정기관, 산업단지 기업, 임대주택 시장, 학교 관리자, 지역사회 네트워크 같은 다른 행위자의 역할을 충분히 다루지 못하였다. 이들 행위자가 양국 호구 제도의 작동과 변화에 어떻게 개입하는지를 더 심화하여 분석하는 작업은 후속 과제로 남긴다. 끝으로, 본 연구는 베트남 관련 서술을 주로 국회가 공포한 법률의 공식 영문본과 영어권 2차 문헌만을 참고하였다. 향후 베트남어 1차 사료를 통해 베트남의 구체적 맥락을 보완할 필요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