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의 중심으로서의 말루꾸: 인도네시아 역사서술에 나타난 변화와 지속
Maluku as the Center of World History: Change and Continuity in Indonesian Historiography
1 강원대학교
1 Kangwon National University
DOI: https://doi.org/10.33334/sieas.2026.45.1.439
초록
이 글의 목적은 2010년대 중반 이후 말루꾸를 대상으로 한 현지 학자의 역사서술에서 나타나는 특징을 검토하는 것이다. 새로운 역사 쓰기를 요약 적으로 표현하는 세계사의 중심이라는 시각이 어떤 요소로 구성되며, 말루 꾸와 외부 세계, 그리고 말루꾸와 인도네시아 내 타지역과의 문화 교류에 관한 서술에 어떻게 적용되었는가를 알아볼 것이다. 또한, 새로운 역사 쓰 기와 민족주의적 역사관 사이의 연관성에 대한 분석이 이루어질 것이다. 이러한 논의를 바탕으로 이 글에서는 말루꾸를 대상으로 한 새로운 역사서 술이 탈식민주의적 관점을 일부 내포함에도 근본적으로는 인도네시아 중 심적(Indonesia centric) 민족주의 역사서술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는 주 장을 제기할 것이다. 이는 특정한 형식의 민족주의 역사서술이 새로운 사 회문화적 환경에서 소멸하기보다는 다른 모티브에 기반을 둔 다른 형식의 민족주의 역사서술로 대체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Abstract
The purpose of this article is to examine the characteristics of Maluku-centric historiography that has emerged since the mid-2010s. It analyzes the elements of this new approach—particularly the perspective that positions Maluku as a center of world history—and explores how these ideas have been applied to narratives of cultural exchange both within Indonesia and between Maluku and the wider world. In addition, it investigates the relationship between this historiographical shift and Indonesia’s nationalist historical discourse. Building on this analysis, the article argues that although the new historiography on Maluku incorporates certain postcolonial perspectives, it ultimately functions as an extension of Indonesia-centric nationalist historiography. This suggests that, rather than disappearing in response to changing socio-cultural conditions, nationalist historiography may persist by reappearing in new forms grounded in different thematic motifs.
Ⅰ. 들어가는 말
2025년 초, 인도네시아 술라웨시(Sulawesi) 하사누딘(Hasanuddin) 대학 역사학자들이 개최한 향신료 관련 세미나에서 예상하지 못한 상황을 접했다. 이들은 서구 열강을 말루꾸(Maluku)로 끌어들여 식민화를 촉발했던 요소가 향신료였고 식민화로 인해 현지인에게 커다란 고통이 부가되었다는 측면을 부각하지 않았다. 대신, 대항해 시대 말루꾸가 세계사의 중심이었으며, 향신료를 매개로 한 교류 과정에서 지역 문화가 풍부해졌음을 강조했다. 이들의 발표에서는 향신료가 말루꾸에 자생했음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듯한 논조를 찾을 수 있었다.
향신료 섬 중 하나인 떠르나떼(Ternate)에서 만난 역사학자에게서도 같은 모습이 나타났다. 서구 열강의 영향력 확대에 따른 토착 왕국의 붕괴나 피식민화 대신 그가 더욱 열정적으로 설명한 점은 이 지역에 유입한 중국,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의 발자취였다. 그는 외부 세계의 영향이 토착 문화와 혼재되어 현재까지도 지속됨을 강조했다.
이처럼 현지 학자의 시각에서는 식민 통치의 잔혹함, 토착인의 저항, 그리고 이러한 투쟁의 결과로써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강조하는 민족주의적(nationalistic) 역사관이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향신료로 인해 말루꾸가 세계사의 핵심 플레이어가 되었고, 다양한 민족 간 교역과 교류를 통해 지역 문화가 다양해졌다는 이들의 강조점은 오히려 탈식민주의(post-colonial) 역사관에 부합한다는 인상을 주었다.
탈식민주의 역사서술(historiography)은 식민지 체계에서 주변화되었던 집단의 삶과 경험에 초점 맞춤으로써 지배자 중심적이고 유럽 중심적인 역사서술에 도전하는 접근 방식이다. 이런 시도를 대표하는 ‘서발턴’(Subaltern) 연구는 중앙이 아닌 지역의 다양성을 중시하고, 공식 역사에서 배제되어 온 일반인의 목소리와 저항을 부각하며, 사회 내부 의 분열과 균열을 드러냄으로써 피식민지인의 시각에서 아래로부터의 역사를 재구성, 재해석하려 했다(이재원 2025).
탈식민주의 역사서술의 필요성은 수하르또(Suharto) 퇴진 후 진행된 민주화 및 지방 분권화 흐름 속에서 인도네시아 역사학자에 의해 제기되었다(송승원 2014a, 89-92). 이를 주도한 학자들은 단일한 역사가 아닌 다양한 역사에 관한 관심을 통해 지역사의 다이나믹스와 일반인의 목소리를 드러내야 한다고 주장했다(Taylor 2014, 174-5). 또한, 정치적 역학 관계에 집중된 연구에서 벗어나 지역과 외부 세계와의 교류, 문화적 혼종성에 대한 연구의 필요성을 제기했다(Curaming 2003).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술라웨시에서 만난 역사학자들이 제기한 세계사의 중심으로서의 말루꾸라는 인식은 탈식민지적 시각이 향신료 역사의 재해석 과정에 적용되고 있음을 추정할 수 있도록 했다.
탈식민주의 역사서술과 말루꾸 중심적 역사서술 사이에 일정한 유사성이 나타남에도, 이를 역사학계의 내적 변화의 결과로만 바라볼 수 없게 만드는 국가적 수준에서의 흐름 역시 존재한다. 2014년에 집권한 조꼬위(Jokowi) 대통령은 ‘세계 해양의 축’(Poros Maritim Dunia)이라는 개념을 제시하며 인도네시아를 강력한 해양 국가로 만들겠다는 비전을 천명했다. 이러한 기조에 맞추어 각 부처에서는 해양 관련 아젠다를 제시했다. 교육문화부에서는 향신료 루트(route)를 대표하는 20개 핵심 지역(titik jalur rempah)을 선정하여 지도로 만들었으며, 이를 유네스코 세계 무형유산목록에 등재하려고 시도했다(Kumoratih 2022, 53-4; Yamin et al. 2022, 35-38). 향신료 루트에 관한 관심이 고조되자, 16-17세기 향신료 교역의 중심축인 말루꾸 역시 자연스럽게 부상하며 사회문화적, 역사적 담론의 중심으로 이동했다. 이런 측면에서 세계사의 중심으로서의 말루꾸라는 인식은 지역사 일반에 대한 재해석이라는 차원뿐 아니라 정부의 정책 변화가 가져온 결과라고도 해석될 수 있다.
이 글의 목적은 2010년대 중반 이후 말루꾸를 대상으로 한 현지 학자의 역사서술에서 부상한 특징을 검토하는 것이다. 새로운 역사 쓰기를 요약적으로 표현하는 세계사의 중심이라는 시각이 어떤 요소로 구성되며, 말루꾸와 인도네시아 내 타지역, 그리고 말루꾸와 외부 세계와의 문화 교류에 관한 서술에 어떻게 적용되었는가를 알아볼 것이다. 또한, 새로운 역사 쓰기와 민족주의적 역사관 사이의 연관성에 대한 분석이 이루어질 것이다. 이러한 논의를 바탕으로 이 글에서는 말루꾸를 대상으로 한 새로운 역사서술이 탈식민주의적 관점을 일부 내포함에도 근본적으로는 인도네시아 중심적(Indonesia centric) 민족주의 역사서술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는 주장을 제기할 것이다. 이는 특정한 형식의 민족주의 역사서술이 새로운 사회문화적 환경에서 소멸하기보다는 다른 모티브에 기반을 둔 다른 형식의 민족주의 역사서술로 대체될 수 있다는 안쏘니 리드(Anthony Reid)의 주장(2023, 3)을 뒷받침할 수 있다. 반다(Banda)의 역사서술을 검토한 송승원(2024) 역시 지역의 자율성을 중시하는 반다 중심적 경향과 함께 지역사를 민족주의적 메타 내러티브에 부합하도록 재구성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짐을 밝힘으로써, 지방에 대한 역사서술에서 나타나는 새로운 혼종적 경향을 지적하고 있다.
이 글의 2장에서는 독립 이후 인도네시아 역사학계에서 주도적 패러다임으로 등장한 인도네시아 중심적 민족주의 역사서술의 특징을 알아본 후, 그것이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 밝혀볼 것이다. 3장에서는 새로운 역사서술의 특징을 세계사의 중심으로서의 말루꾸, 향신료 교역을 통한 역내 상호연계성의 제고, 향신료 루트를 통한 문화적 교류의 가속화 등으로 나눈 후, 각각의 주요 내용이 무엇이며, 민족주의 역사서술과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를 검토할 것이다.
이 글의 연구 대상은 2010년대 중반 이후 말루꾸 역사와 관련하여 인도네시아 학자가 작성한 20여 편의 논문과 책이다.1) 이들 학자 모두가 역사학 전공자는 아니며, 사회과학자가 기존 사료를 활용하여 말루꾸 역사를 재해석한 경우가 상당수 존재한다. 이 연구의 목표가 새로운 역사 쓰기의 특징을 규명하는 것이기에, 식민 지배의 잔혹성, 착취와 고통 등을 주제로 한 현지 학자의 연구는 분석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이 연구의 목표가 새로운 역사서술이 주도적 담론으로 부상했는지를 검토하는 작업이 아니기에, 제한된 자료만을 대상으로 한 접근이 용인될 수 있을 것이다.
Ⅱ. 민족주의 역사서술의 특징과 적용
1. 민족주의 역사서술의 특징
독립 이후 인도네시아 역사학계에서 가장 시급한 문제로 떠오른 과제는 식민주의 역사관의 극복이었다. 네덜란드를 인도네시아 역사의 핵심 플레이어로 규정하고, 식민화를 계몽과 진보를 위한 과정으로, 식민 정부의 통치 목표를 토착인의 이익 보호와 경제 및 복지 향상으로 서술했던 네덜란드 중심적 역사관(van der Kroef 1958, 353)에서 벗어나야 할 필요가 제기되었다. 이는 인도네시아를 중심으로 한 역사서술에 대한 요구로서, 인도네시아 역사의 중심에 인도네시아인이 있어야 함을 의미했다(Ali 2007, 11).2)
네덜란드로부터의 독립과 신생 국가 건립이라는 시대적 상황으로 인해 인도네시아 중심적 역사서술은 민족주의적 색채를 강하게 띠었다(Soedjatmoko 2007, 405). 20세기 초 식민 체계가 완성되기 전까지 공통의 역사를 갖지 못한 다종족 국가라는 조건에서 역사서술은 국가 통합이라는 목표와 함께 진행되어야 했고, 인도네시아 민족이라는 새로운 정체성 형성에 기여해야 했다(Nichterlein 1974, 261-3). 이렇게 탄생한 인도네시아 중심적 민족주의 역사서술의 특징을 몇 가지 차원으로 나누어 검토할 수 있다.
먼저 지적할 점은 단일한 국가 정체성 형성을 위해 경쟁적 역사들(histories)을 억압하고 하나의 역사를 강조하려는 경향이다(Nordholt 2004, 2). 이러한 목적으로 활용된 핵심 요소 중 하나는 힌두불교 왕국인 마자빠힛(Majapahit)이다. 마자빠힛 통치기 동안 인도네시아의 지도가 이미 완성되었음을 강조함으로써(Reid 2023, 4-5), 신생 독립국의 역사적 통일성을 부각하고 역사적 깊이를 깊게 만들고자 했다. 이러한 시도를 통해 인도네시아는 네덜란드 식민 통치 이후 새로 만들어진 국가가 아니라 그 이전부터 이미 형성되어 있던 역사적 실체임을 강조했다. 과거와의 연속성을 통해 신생 국가의 존재론적 필연성을 드러내려 한 것이다.3)
마자빠힛이 인도네시아의 유토피아적 과거로 선택되고 통합의 실체로 부상한 데에는 독립 후 인도네시아의 주도 세력이 자바인임과 연결되었다. 이들에게 있어 신생 국가의 중심은 자바였고, 자바 중심적 시각에서 마자빠힛의 역사적 중요성은 당연시되었다.4) 이러한 시각은 마자빠힛뿐 아니라 자바의 토착 관행으로 확장되었다. 예를 들어, 자바의 상호부조 관행인 고통 로용(gotong-royong)은 인도네시아 전역에 존재했던 것으로 이상화되었고, 단일 정체성을 뒷받침하기 위해 활용되었다(Bowen 1986, 558-559). 토착 관행은 식민화에도 불구하고 인도네시아 고유의 문화적 전통이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기제였다(김형준 2014, 7). 또한, 이를 통해 인도네시아의 내적 발전과 전통의 복원력을 경시했던 식민주의 역사관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기대되었다(van der Kroef 1958, 353).
토착적인 것에 대한 강조는 외부의 영향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종교적 영역에서도 새로운 해석을 제기할 수 있도록 했다. 힌두불교, 이슬람으로의 개종이 이루어졌지만, 그 이전부터 존재했던 인도네시아의 근원적 종교 전통이 유지되었다는 것이다(van der Kroef 1958, 355-356, 358). “인도네시아의 라마(Rama) 이야기는 발미키(Valmiki)가 저술한 인도의 서사시 라마야나(Ramayana)가 아니라 인도네시아 민속에 나타나는 ... 많은 요소와 모티브를 내재한 토착 스토리의 영향을 받았다”(Koentjaraningrat 2007, 308)라는 식의 재해석을 통해 민족주의 역사관은 인도네시아가 외부의 영향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외부와의 상호작용에서 주도적이고 능동적인 행위자로 작용했음을 부각하고자 했다(Nichterlein 1974, 265).
민족주의 역사서술이 지닌 또 다른 특징은 네덜란드 식민 통치의 잔인함과 착취, 토착인의 고난과 고통을 부각하는 것이다. 이와 연결된 문제 중 하나는 식민 통치 기간으로써, 350년이 피식민지 기간으로 자주 언급되었다(Soedjatmoko 2007, 405). 독립을 기준으로 할 때, 350년 전은 1590년대이며, 네덜란드 상인이 인도네시아에서 교역을 갓 시작한 때였다. 인도네시아 전역을 대상으로 식민화가 이루어지지 않았음에도, 이를 식민 역사의 시작점으로 설정한 이유는 토착인의 고통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식민지 기간을 확장함으로써, 인도네시아 사람이 겪었던 핍박의 시간 역시 증가시킬 수 있다. 또한, 이는 독립의 필연성을 강화하며, 독립 전쟁을 인도네시아 역사에서 더욱 결정적인 사건으로 규정할 수 있게 했다(Nordholt 2004, 3).
식민 지배의 잔혹성과 고통에 대한 대척점으로 민족주의 역사서술에 편입된 요소는 네덜란드에 대한 토착인의 저항이었다(Suwignyo 2014, 125). 이는 신생 국가를 형성할 내재적 힘을 축적할 수 있게 만들었다고 해석됨과 동시에 국가 형성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뒷받침했다(송승원 2014a, 80). 또한, 토착인의 저항이 인도네시아를 구성하는 여러 지역에서 발생했음을 강조함으로써, 공동의 적을 대상으로 함께 싸운 운명 공동체라는 인식을 공고히 할 수 있었다(Soedjatmoko 2007, 405).
식민 정부에 대항하여 전개된 투쟁 중 특히 강조된 측면은 영웅 중심적 저항이며(Nordholt 2004, 7), 네덜란드를 대상으로 무장 투쟁을 벌였던 디뽀네고로(Diponegoro), 이맘 본졸(Imam Bondjol), 떵꾸 우마르(Tengku Umar) 등과 같은 투사의 행적이 부각되었다(Nichterlein 1974, 270). 또한, 1950년대부터 정부가 ‘국가적 영웅’(pahlawan nasional)을 선정하면서 식민 체제에 맞서 싸운 인물이 대거 이 범주에 포함되었다(송승원 2014b, 249, 254-255). 이처럼 영웅 중심적 역사가 주목받음에 따라, 농민이나 노동자와 같은 무정형한 집단의 투쟁은 주변화되었고, 이에 비례하여 국가통합의 주체로서 중앙의 권위가 강조되었다.
민족주의 역사서술의 초점이 인도네시아에 집중됨으로써, 토착인과 외부인 사이의 상호작용이나 그 영향, 동남아시아 나아가 전지구적 차원에서 인도네시아 역사를 조망하려는 시도는 상대적으로 경시되었다(Suwignyo 2014, 126). 이로 인해 리드(Reid)는 대항해 시대 세계사의 중심이 인도네시아였다는 사실조차 중시되지 않는 경향이 형성되었다고 주장했다(2023, 6).
인도네시아 중심적 역사서술에서 나타나는 또 다른 경향은 국가의 중앙집권적 메타 내러티브를 중시함으로써, 지역의 목소리를 배제하는 것이다(Nordholt 2004, 1). 지역에 관한 관심이 지역의 자율적 역사에 관한 관심으로 이어져 중앙집권적 국가의 정당성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우려되었기 때문이다. 지방사에 대한 무관심과 경시는 지역 내 제 집단 간 상호작용, 갈등과 긴장을 역사서술에서 주변화하는 상황을 초래했다(Curaming 2003).5) 이러한 경향이 영웅 중심적 역사서술과 합쳐짐에 따라 일반인의 역사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식민지 고통을 가장 직접적으로 겪었고 그에 대해 가장 격렬하게 저항한 일반인은 마치 식민지 역사를 갖지 않았던 것 같은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Taylor 2014, 174-5).
민족주의 역사서술은 정부의 지원을 받아 출판된 역사서를 통해 확산했고, 특히 초중고등학교 역사 교과서를 통해 대중화되었다. 수하르토 통치 시기, 정부는 ‘인도네시아 국가의 역사’(Sejarah Nasional Indonesia)라는 공인된 역사서를 1975년 발행했다. 이 서적은 고등교육 기관의 역사교육 교재로 활용되었으며, 초중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의 핵심 소스로 이용되었다(Suwignyo 2014, 117). 수하르토 정권이 와해한 후 이 책의 개정판이 2008년 발간되었지만, 인도네시아 중심적 민족주의 역사서술 경향은 크게 변화하지 않았다(Suwignyo 2014, 118).
아래 절에서는 2017년에 출판된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를 대상으로 인도네시아 중심적 민족주의 역사관이 어떻게 그 내용에 반영되어 있는가를 검토할 것이다. 2013년 커리큘럼에 기반을 두고 정부에서 발행하고 교육문화부에서 출판한 연구 대상 교과서는 10학년, 11학년 1학기, 11학년 2학기, 12학년 등 4권으로 구성되었다. 이 중 중세사를 다루는 10학년 교과서와 16-19세기 말루꾸 관련 역사가 포함된 11학년 1학기 교과서가 분석 대상으로 설정될 것이다. 연구 대상 자료는 아래와 같다.
Restu Gunawan, Amurwani Dwi Lestariningsih & Sardiman. 2017. Sejarah Indonesia, SMA/MA/SMK/MAK Kelas X (Edisi Revisi 2017).
Sardiman & Amurwani Dwi Lestariningsih. 2017. Sejarah Indonesia, SMA/MA/SMK/MAK Kelas XI Semester 1 (Edisi Revisi 2017).
2.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 분석: 민족주의 역사관의 반영
10학년 역사 교과서는 3장으로 나뉘는데, 1장에서는 선사시대부터 힌두불교 왕국 성립 이전 시기, 2장에서는 힌두불교 왕국 시기, 3장에서는 이슬람 왕국 시기를 다룬다. 2장과 3장의 서술은 대체로 유사한 방식을 취해서, 왕국의 성립에 영향을 미친 종교적 변화를 개괄적으로 설명한 후, 개별 왕국의 정치경제적 특징을 검토한다. 이후, 각 시기의 문화적 특징, 왕국들 사이의 관계가 서술된다.
힌두불교 왕국에 관한 서술에서는 역내 교역에 기반을 둔 문화적 교류를 통해, 이슬람 왕국에 관한 서술에서는 지역간 정치적 연대를 통해 독립 후 인도네시아를 하나로 묶을 자산이 축적될 수 있었다는 측면이 부각된다. 이러한 민족주의적 시각이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아래에서는 마자빠힛에 관한 서술이 검토될 것이다.
마자빠힛과 관련되어서는 왕국의 정치적 영향력이 현재의 인도네시아 영토 전체를 포괄할 정도로 확장되었음이 강조된다. 교과서에 따르면, 하얌 우룩(Hayam Wuruk) 왕과 가자마다(Gajah Mada) 수상 통치기에 그 정점에 도달한 “마자빠힛의 통치 영역(wilayah kekuasaan)은 매우 넓어서, 현재의 인도네시아 공화국 영토를 넘어설” 정도였다 (Gunawan et al. 2017, 137).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마자빠힛의 역사서 나가라꺼르따가마(Nagarakertagama)가 인용되는데, 여기에는 왕국의 영역이 수마뜨라, 말레이반도, 깔리만딴(Kalimantan), 술라웨시, 누사 뜽가라(Nusa Tenggara), 말루꾸, 빠뿌아(Papua), 싱가포르, 그리고 필리핀 군도의 일부를 포함했다는 서술이 제시되어 있다(Gunawan et al. 2017, 138).
마자빠힛 시기 인도네시아 군도의 여러 지역을 포괄하는 정치적 통합이 성취되었지만, 그것이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현상이 아님을 교과서는 강조한다. 마자빠힛 이전부터 인도네시아의 여러 지역을 통합하려는 정치적 시도가 이루어졌고, 이러한 흐름이 마자빠힛 왕조에 접어들어 정점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교과서에서는 이를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Gunawan et al. 2017, 154).
힌두-불교 시대에 정치적 통합력을 지닌 누산따라(Nusantara)의 강력한 힘은 스리위자야, 싱하사리(Singhasari), 마자빠힛 왕국의 위대함과 결부되었다. 여기에서 의도하는 정치적 통합의 힘이란 전통 왕국이 누산따라 군도의 광활한 지역을 느슨한(longgar) 정치적 통제 하에 놓고, 이 영토를 이들 왕국의 관리 하에 하나의 정치적 단위로 묶을 수 있었던 능력을 의미한다. 이로써 섬들 사이의 통합이 점차 구체화했다.
교과서에서는 누산따라라 불리는 현재의 인도네시아를 구성하는 지역이 하나의 정치적 단위로 작동한 역사적 경험을 오랫동안 가지고 있었음을 강조한다. 이런 역할을 한 전통 왕국에는 마자빠힛뿐만 아니라, 스리위자야, 싱하사리 역시 포함된다. 이처럼 정치적 통합의 흐름이 7세기부터 시작되어 14세기까지 꾸준히 진행되었음을 부각함으로써, 국가통합의 역사가 오랫동안 구축되어 왔음을 드러내는 효과를 지니게 된다.
인용문에서는 스리위자야와 마자빠힛이 타지역에 대해 행사한 정치적 통제를 ‘느슨한’이라는 형용사로 지시함으로써, 이들이 직접적인 지배-피지배 관계에 놓여 있지 않았음을 지나가듯 언급한다. 이는 지역 통합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역사 왜곡의 문제가 제기될 수 있음을 일정 정도 인지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그럼에도, 교과서에서는 무함마드 야민(Yamin)을 인용하며 스리위자야를 인도네시아의 첫 번째 국가 왕조(kerajaan nasional), 마자빠힛을 두 번째 국가 왕조로 규정함으로써(Gunawan et al. 2017, 106, 137), 현재의 인도네시아를 영토적으로 포괄하는 정치적 힘이 15세기 이전에 이미 형성되어 있었음을 강조한다.
유럽 열강이 인도네시아에 도래한 16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대략 400년의 시기를 대상으로 하는 11학년 1학기 교과서는 4개의 장으로 구성된다. 1장에서는 식민·제국주의 확대와 식민 체제의 확립, 2장에서는 식민·제국주의에 대한 토착인의 저항, 3장에서는 식민지 체제가 미친 영향이 중점적으로 다루어진다. 마지막 4장에서는 20세기 초 인도네시아 민족주의의 전개 과정과 네덜란드 식민 정부의 해체가 주로 설명된다.
1장에서는 유럽 열강의 인도네시아 유입을 촉발한 요소가 향신료였음을 부각한다. 유럽 사회의 필수품으로 자리 잡음으로써, 비단길에 상응하는 교역 루트가 말루꾸로부터 유럽까지 형성되었다. 이후 포르투갈, 스페인, 영국의 식민주의적 팽창, 그리고 VOC 의 확립과 확장, 파산 등이 검토되며, 네덜란드 식민 정부의 정책이 마지막으로 서술된다.
교과서에서는 말루꾸에 처음 발을 디딘 포르투갈 사람을 잔인하고 독단적이며, 인간성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알지 못하는 집단으로 묘사한다. 이를 보여주기 위한 예는 떠르나떼의 지도자 술탄 카에룬(Khaerun)과 연결된다. 포르투갈과 전쟁 중이던 술탄은 이들과의 협상을 위해 포르투갈 요새로 갔지만, 적에게 체포되어 살해당했다. 이 사례는 인간성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유럽인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으로 설명된다(Sardiman & Lestariningsih 2017, 78).
포르투갈인에 이어 네덜란드인에게도 동일한 잣대가 활용된다. 이들은 토착인과의 협약을 무시하고, 기본적인 상도덕조차 지키지 않는 집단이었다. 예를 들어, 이들은 현지인과 배 건조를 계약한 후, 그에 대한 대가를 지급하지 않고 약탈하는 일을 당연시했는데, “네덜란드 사람은 말루꾸 사람의 서비스를 일절 존중하지 않았다”라고 교과서는 지적한다(Sardiman & Lestariningsih 2017, 107).
유럽인과 달리 인도네시아인은 외부인에 대해 열린 태도를 취했던 것으로 설명된다. 술라웨시 고와(Gowa) 왕국은 국적을 가리지 않고 외부인을 환대했으며, 규칙을 정해 이들과 교역했다. 이런 태도는 자연을 모든 인간이 함께 이용해야 하는 것으로 바라본 고와 술탄의 인식과 연결된 것으로 이해된다(Sardiman & Lestariningsih 2017, 87). 외부인에 대한 토착인의 우호적 태도는 유럽인의 탐욕과 대비되며 식민화를 설명하는 하나의 요인으로 기능한다.
식민 세력의 침탈에 대한 토착인의 저항이 2장의 핵심 주제이다. 말루꾸 지역에서의 투쟁사를 다루는 2장 1절 제2소절은 유럽인에 저항하여 발생한 5차례의 투쟁을 주요 내용으로 설정한다. 그중 두 번째인 술탄 바아불라(Baabullah)의 투쟁은 포르투갈 사람을 몰아내는 성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VOC 와의 무력 충돌은 17세기 중반까지 3차례에 걸쳐 진행되었지만, 더 좋은 무기를 가진 VOC 가 승리하며 이 지역을 1680년 식민 통치하게 되었다.
정치적 권리를 빼앗긴 후에도 토착인의 투쟁은 이어졌으며, 그 마지막 사례로 술탄 누쿠(Nuku: Amir Muhammad Syafiudin Syah)가 소개된다. 그는 네덜란드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잠시나마 자율적인 정치 체계를 회복했다. 승리의 원동력으로 교과서는 지역 간 연대를 꼽는다. 띠도레(Tidore) 술탄이던 그의 항쟁에 빠뿌아, 할마헤라(Halmahera), 떠르나떼, 세람(Seram) 등 주변 지역 모두가 참여함으로써 네덜란드 군에 대적할 힘이 축적될 수 있었다. 이러한 연합은 VOC 폭정이 이들 지역 모두에 부과되었기에 가능한 자연발생적 성격을 내포하지만, 이 사례를 통해 지역을 넘어선 연대가 식민 세력에 대한 강력한 저항을 추 동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게 된다고 교과서는 지적한다. 이런 식의 해석을 통해 지역을 넘어선 연대 경험이 추후 이들 지역의 인도네시아로의 통합을 용이하게 만들었음이 부각된다(Sardiman & Lestariningsih 2017, 73-4).
2장 2절은 식민화가 본격화된 19세기 토착인의 저항을 주제로 하며, 제2소절에서는 말루꾸의 빠띠무라(Pattimura) 항쟁이 서술된다(Sardiman & Lestariningsih 2017, 107-110). 1817년 발생한 이 투쟁의 원인은 네덜란드 식민 정부의 수탈과 토착인에 대한 무시였다. 농작물의 강제 경작에 추가하여 강제 노동 및 물품 수탈이 부과됨으로써, 토착인의 어려움이 가중되었다. 또한, 법에 따른 지배가 아닌 자의적이고 독단적인 정책, 그리고 피식민지인에 대한 네덜란드인의 강압적 태도 등으로 인해 지역의 삶은 더욱 피폐해졌다. 이에 비밀회의를 통해 세력을 규합한 빠띠무라는 항구에 있던 네덜란드 배를 파괴하면서 네덜란드 군대와의 전쟁을 시작했고, 이 지역 총독을 살해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에 대응하여 식민 정부가 암본에 주둔한 병력을 보냈지만 진압에 성공하지 못했고, 자까르따에서 병력이 파견된 후에야 반란을 잠재울 수 있었다. 반란 후의 상황을 서술하면서 교과서는 토착인과 네덜란드인의 차이를 대조시킨다. 아래는 이에 대한 교과서의 서술이다(Sardiman & Lestariningsih 2017, 110).
게릴라전을 계속하던 크리스티나 마르타 띠아하후(Christina Martha Tiahahu)는 결국 체포되었다. 그녀는 사형을 면했지만, 강제 노역형을 선고받고 다른 39명과 함께 자바로 추방되었다. 배에 탄 그녀는 말하고 먹는 것을 일절 거부했다고 전해진다. 그녀는 병에 걸려 1818년 1월 2일에 사망했다. 그녀의 시신은 부루(Buru)섬과 띠가(Tiga)섬 사이 자바해에 버려졌다.
교과서에서는 1960년대에 인도네시아 영웅으로 선정된 띠아하후의 사례를 제시한다. 그녀는 네덜란드 군대에 생포되어 자바로 추방되지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선상에서 단식투쟁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그녀가 사망하자 네덜란드 군대는 그녀의 시신을 자바로 가져와 매장하지 않고 바다에 던져버렸다. 네덜란드인의 잔인함과 비인간적임을 토착인의 불굴의 의지와 대비함으로써, 교과서에서는 정당하지 못한 식민 통치에 대한 저항의 정당성을 부각한다.
교과서에 제시된 말루꾸 관련 서술은 민족주의 역사관의 특징을 반영한다. 토착인에 대한 유럽 식민 세력의 잔인함, 억압적 식민 통치와 그에 대한 말루꾸인의 저항과 투쟁이 부각된다.6) 투쟁의 역사는 말루꾸 전역을 포괄하지만, 그 중 특히 주목받는 측면은 영웅의 활동이다. 식민 통치에 저항한 토착 지도자의 투쟁이 서사의 핵심을 구성함으로써 영웅중심적 반식민 투쟁이라는 민족주의적 서술의 특징이 개입하게 된다.
식민 세력의 유입과 그에 대한 투쟁의 역사를 다루는 파트에서 주요 주제 중 하나로 취급되는 말루꾸는 식민화가 미친 정치경제적, 사회문화적 영향을 다루는 3장, 20세기를 전후한 민족주의 운동을 검토하는 4장에서 그 자취를 거의 드러내지 않는다. 두 장을 통틀어 말루꾸는 지역 간 연대 없는 저항의 한계를 지적하는 서술에서 아쩨 등 다른 지역과 함께 한 차례 등장할 뿐이다(Sardiman & Lestariningsih 2017, 216). 일본의 유입 후 최근까지의 상황을 다루는 11학년 2학기, 12학년 역사 교과서에서도 말루꾸의 위상은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아서, 타지역과 함께 지나가듯 언급될 뿐이다. 이런 서술 방식은 자바 중심적 특성을 내재한 민족주의적 시각을 반영한다. 말루꾸 역사학자의 언급처럼(Pradadimara 2020, 320-321), 식민 통치 중후반기와 독립 후 향신료가 더 이상 중시되지 않음에 따라, 말루꾸는 인도네시아 역사서술에서 잊히게 되었고 이는 역사 교과서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이러한 평가는 말루꾸에 대한 새로운 역사서술의 지향점, 즉 말루꾸 중심적 역사서술의 필요성을 뒷받침한다.
Ⅲ. 새로운 역사서술의 특징
말루꾸에 대한 새로운 역사서술에서 강조되는 측면은 향신료를 찾아 서구 열강이 말루꾸로 유입함으로써 식민화의 비극이 발생했음에 초점 맞추는 전통적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자는 것이다. 향신료로 인해 토착 왕국이 파괴되고 주민 고통이 가중되었음은 부정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향신료 교역사의 전부라고 말할 수 없다.7)
전통적 해석에서 벗어나기 위해 새로운 역사서술은 향신료 루트가 미친 긍정적 측면을 부각한다. “누산따라를 향기롭게 하고(mengharumkan) 영광스럽게 만든 향신료에 대한 집합적 기억을 구축”하기 위해(Rahman, 2019, 348), 새로운 역사서술은 세계사의 중심으로서의 말루꾸, 향신료 교역을 통한 역내 상호연계성의 제고, 향신료 루트를 통한 문화적 상호작용 가속화 등 세 측면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경향을 보인다.
1. 말루꾸 중심성
향신료 교역사를 새로운 각도에서 바라보려는 연구자들은 그 국제 세계사의 중심으로서의 말루꾸 성격을 강조한다. 향신료가 자생하지 않았다면, 중국, 인도, 아랍, 아프리카, 유럽 등으로 펼쳐진 국제 교역망에 말루꾸가 개입할 여지가 없었다는 것이다. 이런 측면은 기존 연구에서도 거론되지만, 그 해석에 있어 말루꾸 중심적 경향이 나타난다.
새로운 역사서술의 관점에서 보면, 말루꾸는 국제적 향신료 교역에서 수동적 플레이어가 아닌 그 주인공이었다(Abbas 2022, 109; Marihandono & Kanumoyoso 2016, 3). 말루꾸는 세계 여러 지역에서 온 사람들의 교류 장소가 되었을 뿐 아니라 국제적 연결망의 핵심 고리(node)로서 물품뿐 아니라 다양한 관념, 과학, 종교, 언어, 미학, 관습 등을 포함한 국제적 상호작용의 중심축으로 기능했다(Kumoratih 2022, 53).
세계 교역사에서 가진 중요성으로 인해, 말루꾸는 15-17세기 세계사의 흐름을 이해할 핵심 열쇠이며(Rahman 2019, 356), 말루꾸와 연결되지 않는 세계사적 사건을 찾을 수는 없다. 말루꾸의 세계사적 중요성을 한 학자는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Ruray 2023, 29).
유럽의 모든 사건은 말루꾸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예를 들어,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8) ... 그리고 토르데시야스(Tordesilas) 조약(1494년)에서 사라고사(Saragosa) 조약(1529년)까지9) ... 이 모든 사건은 향신료 섬으로서 말루꾸를 둘러싼 패권 다툼에서 비롯되었다.
향신료를 얻기 위해 대항해가 시작되고 유럽 열강 간 경쟁이 발생했음은 기존 역사서에서도 거론되지만, 말루꾸는 보통 그 촉발 요인으로 언급될 뿐이다. 반면, 새로운 역사서술에서는 위 인용문처럼 유럽에서 벌어진 사건이 말루꾸로 인해 발생했음을 강조한다.
이런 시각을 확대적용하면, 말루꾸가 직접 개입된 것으로 이해되지 않던 세계사적 상황 역시 향신료와 관련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를 예시할 또 다른 사례는 유럽에서의 과학기술 및 학문의 발전이다. 향신료를 얻고자 하는 욕망에 의해 추동된 기술적, 학문적 혁신이 향신료 루트의 역사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항해술, 해양 기술, 군사학 등에서의 비약적인 발전, 지리학, 지도학, 생물학의 발전을 포함한 근대 지식 체계의 발달은 향신료로 인해 발생한 현상으로 이해된다 (Rahman 2019, 369; Ruray 2023, 26-27). 이처럼 새로운 시각을 적용함으로써 대항해 시대에 출현한 문명적 발전 모두를 말루꾸에 있는 향신료로 인해 야기된 현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말루꾸 중심적 역사서술의 또 다른 특징은 향신료 사용의 역사적 깊이, 공간적 분포 그리고 일상으로의 침투에 대한 강조이다. 이를 위해 향신료 교역사를 16-17세기로 제한하지 않고, 그것이 기원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측면이 부각된다(Mauizah 2022, 39-40; Ruray 2023, 20-21). 말루꾸 향신료가 기원전 지중해에서 사용되었다는 기록, 로마와 중국 한나라 궁정에서 향신료가 활용되었다는 기록(Saleh 2023, 219; Ririmasse 2017, 49) 등은 향신료 교역사의 깊이를 드러내는 데 이용된다.10) 향신료가 세계 곳곳으로 퍼져나간 역사적 상황은 아래와 같이 정리될 수 있다(Fitriani et al. 2023, 13-14).
서기 7세기와 8세기에 동남아시아와 인도 사이에 중요한 무역 관계가 형성되었다. 이를 통해 아시아와 아프리카, 그리고 유럽을 연결하는 향신료 항로가 구축되었다. ... 누산따라에서 온 향신료는 알렉산드리아 항을 통해 유럽으로 들어왔다. 당시 말루꾸에서 정향과 육두구 무역에 이용된 경로는 인도나 스리랑카를 거쳐 아라비아 반도(예멘과 주변 도시)를 통해 유럽으로 향하는 것이었다.
향신료 교역이 오랫동안 지속됨으로써, 전혀 다른 배경을 지닌 민족 사이에서 향신료가 의약품, 방부제, 조미료, 종교용품 등 다양한 용도로 활용되었으며, 높은 지위와 부유함, 이국적임을 드러내는 상징으로 확립되며 이들의 삶에 스며들었다(Anuraga 2021, 305-6; Salempa & Seniwati 2024, 72).11) 말루꾸의 향토 사학자는 향신료의 중요성을 아래와 같이 설명했다(Insani & Irwandi 2022, 82-3)
여러 자료와 우리 조상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고대에는 향신료가 방부제, 의약품, 그리고 보온재로서 유럽인에게 꼭 필요한 필수품이었다. 유럽의 기후가 추웠기에 향신료는 유럽인에게 냉장고와 같은 존재였고, 향신료가 없다면 이들은 고통받았다. 이들은 향신료에 대해 의존적이었다.
향신료가 오랫동안 유럽을 포함한 세계 여러 곳에서 필수품으로 자리 잡았음을 부각함으로써, 말루꾸 중심적 역사서술은 말루꾸가 단순한 향신료 산지가 아니라 세계사의 흐름을 주도한, 한 학자의 표현에 따르면(Marbun et al. 2025), 세계사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한 ‘우두머리’(bos)였음을 드러내려 한다. 말루꾸 향신료가 세계적 교류를 촉진하고 문명의 진보를 가속한, 세계사를 견인한 주역이었다는 것이다(Saleh 2023, 219).
새로운 역사서술에서 향신료 교역의 오랜 역사를 강조하는 또 다른 이유는 향신료와 관련된 유럽 식민 통치의 중요성을 희석하기 위해서이다. 식민화에 따른 억압과 고통의 역사를 무시할 수 없는 조건에서 수천 년에 달하는 교역의 역사를 부각할 경우, 식민 시기는 향신료 역사의 전체가 아닌 ‘하나의 작은 부분’(Kumoratih 2022, 55)으로 축소될 수 있다. 이러한 전환을 통해 일부 연구자는 새로운 역사서술이 내포한 탈식민적 성격을 뒷받침하려 한다(Rahman 2019, 361). 네덜란드 통치기를 거치며 향신료의 중요성이 점차 줄어들고 말루꾸의 역사적 중요성이 간과되는 상황에서, 향신료 교역사의 깊이를 드러냄으로써 식민주의적 틀에서 벗어난 새로운 역사 쓰기를 실천할 수 있다는 것이다(Farid 2020, 10).
2. 누산따라 역내 교역의 활성화
새로운 역사서술이 강조하는 또 다른 차원은 향신료를 매개로 하여 전개된 인도네시아 군도 내 여러 지역간의 긴밀한 상호작용이다, 향신료 교역사를 설명하면서 인도네시아라는 명칭 사용이 어색할 수 있기에, 대다수 역사서술에서는 누산따라라는 표현을 이용한다. 자바 고어(Jawa kuno)에 기원을 둔 이 표현은 ‘섬’을 가리키는 누사(nusa)와 ‘사이’를 의미하는 안따라(antara)가 합쳐진 말로, 넓게는 해양부 동남아 전체를, 좁게는 현재의 인도네시아 영토를 일컫는 개념으로 사용된다. 그 자바어 어원에서 보이듯, 이 개념은 마자빠힛 왕조시대에 활용되었다고 여겨진다(Ruray 2023, 18).
향신료를 매개로 한 누산따라의 교역사는 스리위자야 왕국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도 이해되는데(Rahman 2019, 350; Zuhdi 2020, 22), 이 시기 수마뜨라를 중심으로 향신료 거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는 기록을 그 근거로 이용한다(Fitriani et al. 2023, 11). 하지만, 보다 적극적으로 누산따라 개념이 적용되는 시기는 마자빠힛으로, 자바와 말루꾸를 포함한 누산따라 전지역에서 향신료 교역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졌음이 강조된다(Jafar 2022, 68-69). 이런 논의 과정에서 말루꾸와 자바 사이의 교류를 뒷받침할 사료가 풍부하게 제시되지는 않는다. 떠르나떼 공항을 신축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힌두교 신, 데위 빠르와띠(Dewi Parwati)의 석상, 마자빠힛의 역사서 나가라꺼르따가마에 쓰여 있는 말루꾸의 지명, 말루꾸 언어에 편입된 자바어 어휘, 말루꾸에서 발견된 자바의 동전이나 악기 등이 반복적으로 활용된다(Abbas 2022, 107; Ririmasse 2017, 51; Sulistyo 2020, 257).
유럽인 도래 전 누산따라에 형성된 교역 루트는 말루꾸, 마까사르, 드막(Demak), 반뜬(Banten), 빨렘방(Palembang) 등의 도시를 말레이 반도의 말라까(Malaka)와 연결했다(Farid 2020, 4-5). 향신료 루트를 주도한 집단은 시기적으로 차이를 보이는데, 14세기 중반 이후 중국의 쇄국정책에 의해 토착인에 의한 교역이 활성화되었다고 이해된다. 이 시기 이전까지 교역에서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던 중국 상인의 역할이 약화하자 그 자리를 자바를 포함한 수마뜨라, 마까사르 상인이 차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Jafar 2022, 68). 당시 주로 이용된 두 개의 교역로 중 하나는 말라까에서 수마뜨라, 자바를 거쳐 말루꾸로 이어지는 남쪽 루트였고, 다른 하나는 깔리만딴, 술라웨시 남부를 거쳐 말루꾸로 이어지는 북쪽 루트였다. 16세기 초, 포르투갈이 말라까를 정복하자, 그곳에 살던 무슬림 상인이 누산따라의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게 되면서 역내 교역은 더욱 활성화되었다(Sulistiono & Muchsin 2022, 145-6; Sulistiyono & Amaruli 2024, 23).
말루꾸와 자바, 수마뜨라, 깔리만딴, 술라웨시와의 연결망에 더해, 새로운 역사서술에서는 말루꾸 지역 내, 그리고 말루꾸와 동부 인도네시아 지역 사이의 관계를 강조한다. 말루꾸의 떠르나떼와 띠도레 왕국의 정치적 영향력은 말루꾸 남부뿐만 아니라, 술라웨시, 누사 뜽가라, 빠뿌아까지 확장되어 있었고(Insani & Irwandi 2022, 79; Sulistiono and Muchsin 2022, 151), 각 지역에서 자생하는 특산물을 매개로 하여 지역간 교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Ririmasse 2017, 50). 육두구의 자생지인 반다(Banda) 역시 말루꾸뿐 아니라 누사 뜽가라와 다양한 물품을 매개로 한 교역 네트워크를 형성했다(Anuraga 2021, 307).
누산따라 내에서 전개된 교역은 현재 인도네시아를 구성하는 지역 대다수가 하나의 교역권으로 통합되어 있었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해석된다.12) 이 교역망은 유럽 열강의 도래 전, 스리위자야와 마자빠힛 시기에 이미 구축되었으며, 서양 열강의 유입 이후에도 긴밀하게 작동했다.
새로운 역사서술에서 역내 교류가 강조됨으로써, 앞 절에서 언급한 말루꾸 중심성과 일정한 충돌 상황이 발생한다. 정향과 육두구가 역내 교역의 핵심 물품으로 간주된다는 점에서 말루꾸 중심성이 유지되지만, 교역을 매개로 한 교류의 차원에서 볼 때 말루꾸가 그 중심적 역할을 차지하기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마자빠힛과의 교류를 예로 들면, 말루꾸는 자바의 정치적, 종교적, 사회문화적 영향력을 일방적으로 수용한 것으로 여겨진다. 여기에서 한 발 더 나가면, 말루꾸의 전통 왕국이 마자빠힛의 조공 국가(vessel country)가 되었다는 식의 해석(Jafar 2022, 65; Sulistyo 2020, 257) 역시 제기될 수 있다.
이슬람의 확산은 말루꾸 중심성을 약화하는 또 다른 요소이다. 떠르나떼와 띠도레의 이슬람으로의 개종은 자바 북부 항구 도시에서 온 선교사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이해된다. 개종 후, 인근 지역으로 이슬람이 확산하는데, 떠르나떼 술탄은 술라웨시 남부 고아(Goa), 남부 말루꾸, 롬복, 빠뿌아 등지로 이슬람을 설파했고 성공적인 결과를 얻어내기도 했다(Sulistiono and Muchsin 2022, 154). 이슬람으로의 개종이 일사천리로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자바와 수마뜨라를 본거지로 하여 이슬람이 유입되었다는 사실은 말루꾸가 종교적으로 종속적인 위치에 놓여 있었음을 시사한다.13)
말루꾸 중심성은 누산따라 내 교류를 해석하는 주도적 담론에 의해서도 약화된다. 상당수 연구에서 역내 교류는 여러 종족간 연대(persaudaraan)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발전했고(Yamin et al. 2022, 34; Insani and Irwandi 2022, 85), 궁극적으로는 인도네시아라는 국가 정체성 형성에 기여한 것으로 해석된다(Kumoratih 2022, 53; Marihandono & Kanumoyoso 2016, 224). 즉, 식민화 이전에 전개된 역내 교역은 인도네시아라는 신생 국가를 구성하는 여러 집단이 역사적으로 긴밀한 상호작용 속에 놓여 있었고, 공통의 정체성의 단초를 형성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Ruray 2023, 35, 41). 또한, 마자빠힛 왕국 붕괴 후 소규모 이슬람 왕국이 여러 지역에 세워지고 누산따라 전체를 포괄하는 정치적 힘이 부재한 상태에서 향신료 교역은 역내 집단간 통합을 유지하게 만든 대안적 힘으로 비추어진다. 정치적 분산이 이루어졌지만, 교역을 통한 상호작용이라는 구심력으로 인해 누산따라의 통합이 계속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Sulistiyono & Amaruli 2024, 21).
향신료 교역을 단순한 물품 교환이나 식민화의 측면에서 바라보는 시각에 반대하면서 한 역사학자는 누산따라의 교역 네트워크가 인도네시아의 민족 정체성 형성에 중요한 기초로 작용했음을 아래와 같이 서술한다(Wulandari 2016, VII).
이 암울한 이야기[식민화]의 이면에는 인도네시아 공화국이라는 단일 국가를 형성하는 데 있어 요구되는 종족 집단을 통합하는 힘이 있다. 인도네시아 역사에서 향신료는 단순한 상품 거래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의 지역과 다른 지역을, 하나의 종족과 다른 종족을, 하나의 가치관 및 문화와 다른 가치관 및 문화를 인도네시아로 통합하는 원동력이었으며 궁극적으로 인도네시아 국민으로서의 정체성 형성에 기여했다.
향신료 교역을 종족 간 연대강화와 국가 정체성 형성의 기초로 바라보는 시각이 강조됨으로써, 그 중심에 말루꾸가 있었음은 상대적으로 경시되게 된다. 이는 향신료 교역에 대한 새로운 역사서술이 국가적 수준의 민족주의 담론으로 환원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인도네시아 독립 후 부상한 민족주의적 역사서술에서 마자빠힛이 인도네시아 공통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준거점으로 이용되었듯이, 향신료 교역은 통합적 정체성 형성을 뒷받침하는 또 다른 요소으로 작동하게 된다. 마자빠힛뿐 아니라 향신료를 매개로 구축된 지역간, 종족 간 연대를 통해 인도네시아가 추후 하나의 국가로 성립할 기반이 이미 확립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새로운 역사서술에 내재한 탈식민주의적 경향이 국가통합과 국가 정체성을 강조하는 민족주의 담론에 다시 흡수되는 모습을 찾을 수 있다.
3. 향신료를 통한 문화적 교류
새로운 역사서술에서 고려해야 할 문제 중 하나는 향신료로 인해 식민화가 진행되었고 말루꾸 사람에게 커다란 고통이 가해졌다는 사실이다. 식민 정부의 잔인함과 억압, 토착인의 고통이 간과되지는 않지만, 새로운 역사서술에서는 문화적 접촉과 교류, 문화적 혼성과 같은 차원을 강조함으로써 식민 지배의 어두운 측면을 완화하려는 경향이 나타난다. 향신료 교역사를 패배나 투쟁의 역사만으로 바라보기보다는 그것의 긍정적 차원을 함께 검토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주목할 측면은 향신료 교역이 집단 간 접촉을 확대하고 문화적 교류를 가속했다는 점이다. 이 과정에서 말루꾸는 문화적 용광로(melting pot)로 기능했다고 이해된다(Marbun et al. 2025, 1918). 식민화 이전부터 진행된 것으로 묘사되는 지역 간 교류의 역할은 아래와 같이 정리될 수 있다(Fitriani et al. 2023, 14).
향신료 교역은 멀리 떨어진 지역의 사람들이 지식, 문화, 관습, 언어, 재능, 심지어 종교까지 교류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 결과, 향신료 루트는 다양한 신념, 사상, 관습의 교차로가 되었고, 이러한 것을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는 통로 역할을 했다.
문화 교류는 누산따라에 있던 집단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토착인과 외부인 사이에서도 진행되었고 문화적 혼성을 결과했다. 이를 보여줄 대표적 예는 언어인데, 외래어와 토착어의 언어 혼합은 아래와 같이 설명된다(Marbun et al. 2025, 1918).
예를 들어, 향신료(rempah)라는 단어 자체는 산스크리트어 ‘ramba’에서 유래했고, 배(kapal)라는 단어는 타밀어 ‘kappal’에서, 설탕(gula)이라는 단어는 아랍어 ‘sukkar’에서, 버터(mentega)라는 단어는 포르투갈어 ‘manteiga’에서, 치즈(keju)라는 단어는 네덜란드어 ‘kaas’에서, 차(the)라는 단어는 중국어 ‘cha’에서 유래했으며, 이외에도 많은 예가 있다.
외래문화와의 접촉을 통한 언어 혼합에 대해 검토하면서, 연구자들은 그 논의를 유럽 언어로 국한하지 않는다. 유럽어에 추가하여 산스크리트어, 타밀어, 아랍어, 중국어의 영향이 거론되는데, 이는 향신료 교역의 역사를 16-17세기로 제한하지 않고 기원전으로까지 확장했기에 가능하다. 언어에 더해 토착문화와 외래문화의 혼합은 음식, 건축물, 의복, 종교, 사회적 위계와 조상 숭배 방식 등 여러 영역에서 나타났다 (Ririmasse 2017, 53).
문화 접촉에 관한 서술 중 주목할 만한 논의 대상은 유럽인에 의해 만들어진 요새(benteng)이다. 유럽인의 이익을 보호하려는 명백한 목적을 가졌다는 점에서 요새를 긍정적 역사서술의 대상으로 삼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새로운 역사서술은 이러한 한계를 뛰어넘어 요새를 상업적 중심지로서의 말루꾸의 위상(Ruray 2023, 27-9), 그리고 토착인과 외래인 사이에 전개된 긴밀한 인적 교류와 사회문화적 상호작용을 시각화하여 보여주는 자료(Pessy & Yulifar 2025, 101)로 바라본다. 이러한 시도는 패배의 역사만을 부각하려는 경향에서 벗어나 향신료 루트를 균형적으로 바라보려는 노력으로 이해된다.14)
불평등한 권력관계가 아닌 문화적 상호작용의 틀에서 요새를 바라보려고 시도한 한 학자 (Ruray 2023, 42-3)는 자신의 논의를 뒷받침하기 위해 말라까를 이용했다. 말라까에 갤리온 배 모형을 전시하는 공간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이를 거론하면서 그는 요새를 포함한 식민유산에 대한 관심이 단순한 노스탤지어가 아니라 민족 정체성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을 갖는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의 타당성 여부와 관계없이, 새로운 역사서술은 식민지 종주국을 포함한 서양 열강과의 문화적 교류를 설명하며 인도네시아라는 정체성 형성을 강조한다(Rahman 2019, 348). 외부 세력이 이런 목적을 위해 이용될 수 있는 이유는 인도네시아적 정체성의 특징과 연관된다.
향신료 교역을 통해 형성된 것으로 지적되는 국가 정체성의 첫 번째 특징은 정치경제적, 사회문화적 개방성이다. 이는 유럽인에 대한 말루꾸 토착 왕국의 인식을 통해 표현된 것으로 이해된다. 토착 왕국은 새로 유입한 유럽인을 환대하며 교역에 참여할 수 있게 했다(Marihandono & Kanumoyoso 2016, 202). 1521년 스페인 사람의 띠도레 도래에 관한 구전 설화에 따르면, 이들 외부인에 대한 술탄의 포용적 태도는 이슬람의 가르침에 기반을 둔 것이며, 토착인의 삶의 방식으로 오랫동안 자리 잡고 있었다(Insani & Irwandi 2022, 78).
외부 집단에 대한 개방성은 향신료 루트에 속한 누산따라의 여러 지역에서 유럽인 도래 이전에 형성된 특성으로 해석된다. 이들은 바다를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공간으로 이해했다. 예를 들어 마까사르 술탄은 이슬람 교리를 근거로 신이 각각의 인간 집단에게 각자의 땅을 나누어 주었지만, 집단 구분 없이 모두에게 바다를 주었다는 인식을 지니고 있었다(Sulistiyono & Amaruli 2024, 26-7). 외부인의 자유로운 항해를 용인하는 태도로 인해 토착 왕국은 상이한 종교와 관습을 가진 집단과의 교류에 적극적으로 임할 수 있었다.
누산따라를 구성하는 집단의 개방성은 식민화 이후에도 유지되었다. 네덜란드에 의한 학살 경험을 가진 반다(Banda)에서조차 이러한 개방성이 지속되었는데, 식민화 이후에도 반다인으로서의 정체성의 핵심은 이곳에서 출생했느냐가 아니라 이곳에 살고 있느냐였다고 주장된다(Anuraga 2021, 314).
땅에 기반을 둔 연대라는 측면은 이민자들이 어느 종족 출신인지를 중요시하지 않았음을 통해 이해될 수 있다. 반다라는 땅에 대한 책임감과 소유감은 누군가를 반다 사람으로 만드는 가장 중요한 정당성을 구성했다. 이로 인해, 부모가 반다 출신이 아닌 사람도 반다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향신료 교역 과정에서 드러난 개방성은 다양성에 대한 존중과 연결 된다. 식민화 이전부터 서로 다른 종교와 문화를 받아들이는 태도가 형성되었고, 여기에 기반하여 향신료가 누산따라 내부에서, 나아가 전 세계로 확산하는 일이 가능했다(Yamin et al 2022, 34). 말루꾸가 네덜란드 통치에 편입된 이후에도 서로 간의 차이를 형제애와 공동체적 정신에 기초하여 축소하며, 서로를 존중하고, 인정하고, 신뢰하고, 도우려는 태도가 지속되었다(Huliselan 2012, 22-23). 이러한 서술에서 드러나듯, 향신료를 매개로 하여 형성된 관용적이고 다문화적인 태도는 누산따라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핵심으로 자리 잡았다(Anuraga 2021, 318).
새로운 역사서술에서 강조하는 개방성과 다양성에 대한 존중은 ‘다양성 속의 통일성(Bhinneka Tunggal Ika)’이라는 인도네시아의 국가 모토의 주요 내용이며, 이를 인도네시아의 정체성으로 규정하는 민족주의적 담론과 긴밀하게 연결된다. 향신료 교역을 통해 누산따라의 여러 집단이 교류할 물적 토대가 확립되었고, 상호교류를 통해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태도가 강력히 뿌리내렸다는 식의 역사서술은 독립 후 인도네시아인의 정체성으로 규정된 다양성에 대한 존중이 서양 세력 도래 이전에 만들어졌음을, 그리고 누산따라를 구성하는 제 집단 간 형제애와 연대감 형성을 가능하게 할 사회문화적 자본이 오래 전부터 축적되어 있었음을 지시하는 것으로 이해된다(Yamin et al. 2022, 34).
Ⅳ. 나가는 말
본문에서는 2010년대 중반 이후 인도네시아 학계에서 부상한 말루꾸 중심적 역사서술의 특징을 검토했다. 새로운 역사서술은 향신료 역사를 식민화라는 틀로 제한하여 이해하려는 시각에서 벗어나, 지역 중심성, 지역 간 상호연계성, 사회문화적 교류와 혼종성 등의 관점에서 이를 재해석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이를 통해 말루꾸는 단순히 식민화의 피해 공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세계사를 견인했던 핵심 주체로 재위치화된다.
그러나, 말루꾸 중심적 역사서술에 내재한 탈중심성은 인도네시아 중심적 민족주의 담론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향신료 교역을 매개로 한 역내 교류와 문화적 상호작용이 누산따라의 통합과 민족 정체성 형성이라는 국가 중심적 서사로 치환되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이다.
말루꾸 중심적 역사서술이 민족주의적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유는 그것이 중앙 정부의 해양 국가 담론과 연결되어 부상했으며, 조꼬위 대통령이 제기한 ‘2045년 인도네시아 황금기’(Indonesia Emas 2045)라는 국가 비전과도 연계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말루꾸와 향신료의 재발견은 역사학 내부의 문제의식, 지방 자치의 확대에 따른 지역에 대한 재인식에 일정 정도 기반하지만 세계 중심 국가로의 도약이라는 비전을 확산하려는 중앙의 정치적 필요와 더욱 밀접하게 결합하여 진행되었다. 이에 따라, 지역의 특수성이 강조되면서도 이를 국가의 민족주의적 메타내러티브에 부합하도록 재구축하려는 경향(송승원, 2024)이 나타나게 되었다.
말루꾸에 대한 새로운 역사서술은 탈식민적 움직임이 민족주의적 서사와 긴밀하게 연결되는 인도네시아의 독특한 상황을 예시한다. 서발턴 연구가 출현한 주요 배경 중 하나가 민족 국가의 위기적 상황에 대한 자성(이재원, 2025, 50)임을 고려할 때, 꾸준한 경제 성장을 통해 세계 4위 경제 강국으로의 발전을 꿈꾸는 비전이 광범위하게 유포되고 있는 최근의 인도네시아 상황은 탈식민적 특성을 내포한 역사서술이 해방의 서사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표출될 수 있도록 했다. 이러한 점에서 새로운 말루꾸 역사서술 사례는 탈식민주의 역사서술이 지역과 국가의 정치, 사회적 조건에 따라 상이한 방향으로 전개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비교론적 자료를 제공해 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