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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일본과 조선의 카페 유입·변화와 사회적 기능

The Introduction, Changes and Social Functions of Cafes in Modern Japan and Joseon

문예찬1
Yechan Moon1

1 서울대학교

1 Seoul National University

발행: 2026년 1월·Vol. 90, No. 45권 1호·pp. 125-167

DOI: https://doi.org/10.33334/sieas.2026.45.1.125

초록

본 연구는 근대 카페가 일본을 거쳐 식민지 조선으로 유입되는 과정과, 그 과정에서 카페와 끽다점(다방)이 어떠한 방식으로 변용·수용되었는지를 분석하고자 하였다. 일본에서는 근대 시기 커피 문화가 확산되며 카페와 끽다점이 혼재된 형태로 존재하였으나, 관동 대지진 이후 퇴폐적 공간인 카페와 커피 중심의 끽다점이 분화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반면 조선에서는 일본에서조차 명확히 분화되지 않았던 카페 문화가 그대로 유입되면서, 카페와 끽다점의 구분이 실질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특히 1930년대 조선에서는 여급으로 대표되는 일본식 카페 문화가 유행하였으며, 사회적 인식과 실제 운영 사이의 괴리가 두드러졌다. 이는 일본 본국과 식민지 조선 사이의 경제력 차이와 식민지적 조건에서 비롯된 구조적 한계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또한 본 연구는 근대 일본과 조선의 카페가 단순한 음료 소비 공간을 넘어 문화적 교류의 장, 현대적 감각을 체현하는 공간, 나아가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의 거점으로 기능하였음을 밝힌다. 이를 통해 본고는 근대 카페 공간이 제국과 식민지라는 상이한 조건 속에서 서로 다른 사회적 의미와 기능을 획득하였음을 논증한다.

Abstract

This study aimed to analyze the process by which modern cafes were introduced to colonial Korea via Japan, and how cafes and tea houses (tea rooms) were transformed and adopted during this process. In Japan, coffee culture had spread in modern times, and cafes and tea houses coexisted. However, after the Great Kanto Earthquake, a differentiation emerged between cafes, considered decadent spaces, and tea houses, which were primarily coffee-oriented. In contrast, cafe culture, which wasn't even clearly defined in Japan, was imported into Joseon, effectively obscuring the distinction between cafes and tea houses. In particular, in the 1930s, Japanese-style cafe culture, represented by waitresses, became popular in Joseon, and the gap between social perception and actual operation became evident. This was closely related to the economic disparity between Japan and colonial Korea, as well as the structural limitations stemming from colonial conditions. Furthermore, this study reveals that cafes in modern Japan and Korea functioned beyond mere beverage consumption, serving as venues for cultural exchange, spaces embodying modern sensibilities, and even as hubs for the independence and socialist movements. This paper argues that modern cafe spaces acquired distinct social meanings and functions under the different conditions of empire and colony.

주제어:카페끽다점일제강점기근대문화사
Keywords:Cafetea houseJapanese colonial periodmodern timescultural history 제공해주신 이미지 파일은 내용이 없는 빈 페이지입니다. 따라서 추출할 텍스트가 없습니다.

Ⅰ. 서론

근대 일본과 조선에서 카페는 지식인·청년·예술가들이 모여 사상적·사교적·문화적 교류가 이루어졌던 공간이었다1. 근대 시기 다른 문화 요소들과 마찬가지로 커피라는 음료와 카페라는 공간 또한 서양에서 유입된 문화였다. 서양에서 유행하던 카페 문화는 일본을 거쳐 조선에도 유입되었으며, 각 사회 및 문화적 영향 아래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수용 및 변용되었다. 그 결과 근대 일본과 조선에서 카페는 커피를 마시고 타인과 소통하는 교류의 장이면서도 다양한 서비스가 혼재된 독특한 공간으로 변모하여 갔다.

근대 일본인들과 조선인들은 카페를 통해 모던(modern)에 대한 의식과 서양에 대한 동경, 문화적 교류와 퇴폐적 욕구의 충족 등을 동시에 추구해 나갔으며 카페라는 공간에 대해 매혹과 더불어 그로테스크함을 느끼기까지 하였다. 일본과 조선에서 카페는 근대 문화를 대표하는 공간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특히나 근대 일본과 조선의 카페는 유럽 카페의 재현이었으며, 근대인들에게도 다양한 매체를 통해 재현되는 소재였다. 이미 이러한 관점에서 한국 영화 속 다방의 재현 양상에 주목한 연구도 이루어졌다(이주성, 2021).

근대 카페에 대한 연구는 주로 문학연구의 관점에서 이루어진 경향이 있다. 이러한 연구에서는 각 문학작품에 나타나는 카페 공간의 구조와 특성을 분석하는 데 주력하였다(이미림, 2018; 이경훈, 2021; 임영봉, 2021). 또한 근대 조선의 커피문화 유입과 역사 및 카페 문화를 다룬 연구들이 있다(김연희, 2022; 김종규 외, 2015; 김태희, 2022; 박현수, 2025). 그 외에 카페와 카페에서 일하는 여급을 젠더적 관점에서 분석한 연구도 상당히 진행되었다(박진경 외, 2020; 서지영, 2003; 이성은, 2007). 하지만 기존의 연구에서는 일본에서 유입된 카페 문화의 특성과 변천 및 일본과 조선의 카페문화 차이에 관해서는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루었다. 또한 카페와 다방을 별도의 공간으로 인식하여 카페는 퇴폐적 공간, 다방은 근대적 휴식공간의 이분법적으로 규정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카페라는 근대 공간이 지닌 다양한 면모와 기능, 당대인들의 사회적 인식을 복합적으로 밝히지 못했다는 한계가 있다.

이에 본 연구는 기존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다음과 같은 논의를 진행하고자 한다.

첫째 근대 일본에서 이루어진 카페 문화 유입 및 정착 과정을 분석하고 카페의 일본화 과정을 추적하고자 한다. 이와 함께 일본을 통해 이루어진 조선의 카페 문화 유입과 카페 카카듀의 탄생 및 운영 과정을 밝히고자 한다.

둘째 일본에서 이루어진 카페와 끽다점의 분화 과정 및 특성을 구명하고, 조선에서 유행하던 일본식 카페 문화의 특성과 조선에서는 일본과 달리 카페와 끽다점의 분화가 이루어지지 못한 이유를 도시 중상류층의 규모와 소비 기반, 카페의 영업 전략 그리고 해당 사회경제적 구조라는 관점에서 분석하고자 한다.

셋째 근대 일본과 조선의 카페 문화를 비교하며 당대 다양한 매체를 통해 근대 일본과 조선인들이 카페라는 공간을 어떻게 인식하고 이용했는지 밝히고자 한다.

본고는 근대 일본과 조선을 대상으로 카페 및 끽다점의 유입과 분화 과정을 비교 분석함으로써, 카페라는 근대 공간이 일본에서는 분화한 반면, 조선에서는 왜 분화되지 않았는지를 사회 경제적 조건의 차이 속에서 규명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카페라는 공간이 지닌 다양한 면모와 사회적 기능, 그리고 이를 둘러싼 당대인들의 인식을 보다 입체적으로 조망하고자 한다.

Ⅱ. 근대 일본과 조선의 카페 유입과 정착

Cafe 라는 공간은 프랑스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최초의 카페는 1654년 프랑스 마르세이유에서 생겨났으며, 파리에는 1672년에 카페가 세워졌다. 1686년에는 프랑스인들의 취향에 맞는 고급 스타일의 카페 프로코프(Procope)가 소르본느 대학교 근처에서 문을 열었다. 프로코프는 18세기 볼테르, 루소, 디드로 등의 계몽주의자들과 19세기 쇼팽, 나폴레옹 등의 인물들이 자주 방문하며 새로운 질서를 모색하거나 교회와 정부를 비판하는 공간이었다(이은숙 외 2018). 프랑스 외에도 카페는 영국, 러시아 등 유럽 여러 나라로 확산되었다.

이러한 서양의 카페 문화는 일본에도 유입되었다. 일본 최초의 커피점은 鄭永慶[테이에이케이]이라는 인물이 개업한 可否茶館이었다. 이 커피점의 창업자인 鄭永慶은 일본인으로, 나가사키의 唐通詞(혹은 唐通事) 자손이며, 청국대리공사(淸國代理公使) 鄭永寧[테이에이네이]의 차남이었다고 한다. 그는 京都불교학교를 다녔었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鄭永慶은 예일대학교에서 공부를 하던 중 건강이 악화되어 일본으로 귀국했다. 鄭永慶이 귀국한 후 1887년 그의 자택에 화재가 발생했다. 그는 화재가 난 자신의 집 자리에 2층짜리 서양식 건물을 신설하고 카페를 열었다 (林哲夫 2002, 37). 이것이 바로 일본 최초의 카페인 可否茶館이었다. 당시 이 가게에서는 커피, 홍차, 과자와 더불어 서양 술, 담배, 빵 등을 판매하였다(珈琲會館文化部 編 1959, 16-17). 현재 이 可否茶館가 있던 자리에는 ‘日本 最初の喫茶店 可否茶館跡地’라는 이름의 안내표지판이 서 있는데, 이 표지판의 설명에 따르면 이 커피점의 1층에는 트럼프 카드, 바둑, 장기를 배치했고, 내외의 신문, 잡지류, 일본과 중국 및 서양의 글과 그림을 배치하여 감상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두고 있었다. 커피는 이 건물의 2층에서 판매하였다. 이처럼 일본에서 카페는 처음부터 손님들에게 커피를 제공하고 서양 문화와 동양 문화를 모두 체험하게 하는 복합 문화공간으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현재까지도 일본에서는 이 可否茶館을 최초의 끽다점이라고 본다.2

그 후 일본에서 ‘카페(カフェー)’라는 명칭을 처음 사용한 곳은 1911년 4월에 개점한 카페 프란탄(カフェー・プランタン)이었다. 카페 프란탄의 창업자는 松山省三[마츠야마 쇼오조오]과 平岡權八郞[히라오카 곤파치로]였다. 松山省三은 도쿄미술학교를 졸업한 후 자유극장의 창립에도 참가한 인물로, 선배로부터 프랑스 파리에 대한 정보를 듣고 도쿄에도 카페와 같은 자유로운 살롱을 만들겠다는 생각에 카페를 열었다(林哲夫 2002, 121-123). 카페 프란탄은 銀座의 日吉町 銀座會館 주변에 위치하고 있었다. 카페 프란탄은 ‘카페(カフェー)’라는 명칭을 처음 사용하였지만 개점 당시 일본인들은 카페의 의미도 잘 몰랐고, 심지어는 발음조차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珈琲會館文化部 編 1959, 25). 이때까지도 일본인에게 카페는 생소한 공간이었던 것이다. 같은 해 8월에는 카페 라이온(カフェー・ライオン)이 개업하였다. 이곳은 카페 프란탄과 마찬가지로 銀座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카페 라이온에는 화가, 문사, 예술가, 신문기자 등의 출입이 빈번했다고 한다(林哲夫 2002, 123). 특히나 카페 라이온은 처음으로 미인의 여종업원을 고용한 카페였다. 이 시기에 아직 ‘여급’이라는 말을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미인의 여성종업원은 당시 카페를 찾은 손님들의 이목을 끌었다(珈琲會館文化部 編 1959, 25). 그리고 이 여급을 고용하는 방식은 일본의 다른 카페에도 널리 확산되었다.

한편 일본의 커피 문화 보급에 가장 큰 기여를 한 것은 카페 파울리스타(カフェー・パウリスタ)였다. 카페 파울리스타의 창업자는 이민사업에 종사했던 水野龍[미즈노 료]이다. 그는 이민사업의 공로를 인정받아 브라질 상파울로 주정부로부터 커피콩을 무상으로 제공받으면서 카페 창업을 계획하게 되었다. 水野龍는 原善三郎[하라 젠자부로], 大谷嘉兵衛[오오타니 카헤이], 石川澤吉[이시카와 사와키치] 등 요코하마의 영향력 있는 상인들의 협조 아래 1910년 합자회사 카페 파울리스타를 설립하였다. 1911년 6월 오사카 箕面에 카페 파울리스타 제1호점이 생겼고, 같은 해 12월에는 도쿄의 銀座에, 이듬해 1월에 오사카 道頓堀에도 가게를 열었다. 카페 파울리스타는 다른 카페와는 다르게 남자 종업원(급사)을 고용한 점이 특징이었다(長谷川泰三 2023). 또한 카페 파울리스타는 프랑스의 카페 프로코프와 같은 카페를 지향했다고 한다(최민지 2024, 136). 이러한 카페의 존재 때문에 일본에서는 카페가 유흥업소로 변질될 때도 순수한 형태의 카페 문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일본에서 커피 판매점의 역할을 한 것은 카페만이 아니었다. 끽다점(喫茶店)이라는 영업점에서도 커피가 판매되고 있었다. 『동경『시통계연표』에 따르면 1898년(明治31년) 시점에서 끽다점으로 분류된 점포의 수는 69개였다(林哲夫 2022, 163). 그런데 이 때의 끽다점은 카페와 엄밀히 구별되지는 않았다(山中雅大 2015, 33). 또한 당시 끽다점은 음료만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음식도 함께 판매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대표적인 끽다점으로 알려진 靑木店의 경우 가게에서 포도주도 판매하고 있었다(林哲夫 2022, 164). 1901년 도쿄제국대학 정문 앞에 개업한 끽다점 中村屋 또한 커피만 판매하는 끽다점은 아니었다. 이 가게는 일본에서 최초로 크림빵과 인도식 카레, 중국식 빠오즈를 본 따 만든 일본식 찐빵 추카만(中華まん) 등을 판매하였다(Agata tokyo 공식홈페이지). 이처럼 당시 카페와 끽다점은 모두 커피와 더불어 주류, 서양 음식들도 판매하고 있었고, 이 가게들은 일본고유의 문화가 아닌 서양 문화의 산물이었기 때문에 이 두 장소는 명확히 구분되지 않았다.

그러나 점차 카페가 일본사회에 정착되면서 ‘카페의 일본화’가 진행되었다. 일본화된 카페의 대표적인 특징이 바로 여급의 고용이었다.

서양의 산물인 카페도 마찬가지로 이 무렵에는 현저히 일본화가 되었다. 거의 헌법적이나 국제규약적으로는 카페의 급사인은 남자로 정해져 있는 것을 어느 때부터인가 여급사를 정해진 규칙으로 삼았던 東京의 카페에는 시대어의 하나로 여급이라는 말을 만들어내었다.3

위의 글에서도 나타나듯이 당시 일본인들도 카페가 여급을 고용하는 것을 ‘규칙’으로 삼는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이 관행이 카페의 ‘일본화 현상’이라고 보았다. 이때 말한 카페의 ‘일본화 현상’은 서양에서 기 원한 카페 문화가 일본 사회의 유흥 문화 속에서 서양의 카페와는 다른 문화적·상업적 특성을 지닌 채 재구성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여급을 중심으로 한 일본화된 카페는 커피 소비의 공간이라기 보다 음주와 유흥이 결합된 장소로 기능하게 되었고, 그 결과 당대 사회에서는 이러한 카페를 ‘퇴폐적’으로 규정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당시 일본에서 유행하던 카페 문화는 조선에도 유입되었다. 1907년 조선에서는 식료품 상점을 겸한 서양 음식점 청목당이 본정 입구에 문을 열었다. 이것은 일본 도쿄에 있던 청목점의 조선 분점이었다(이길상 2025, 85). 청목당은 2층에서 차와 커피, 식사를 겸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으므로 일종의 카페라고 볼 수 있다(김시현 외 2021, 182). 1908년에는 조선에서 처음으로 ‘끽다점’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가게가 영업을 시작하였다. 1908년 10월 25일자 황성신문에 小澤愼太郞[오자와신타로]의 끽다점이 대한의원 낙성식 물품 기증자 명단에 등장한다(황성신문1908/10/25). 이 끽다점에 대해서는 더 이상 정보가 없기 때문에 대한의원 낙성식을 위해 임시로 마련된 끽다점이었는지 조선 최초의 상설 끽다점이었는지 불확실하다.4 1926년 8월에는 금강산, 1928년 8월에는 후타미라는 이름의 끽다점이 각각 개업하였다(박현수 2025, 289).

조선에서 최초로 ‘카페’라는 명칭을 쓴 가게는 1911년 남대문통 3정목에 문을 연 카페 타이거(カフェー タイガー)였다(小松寬美 1931). 그런데 당시 조선에서 커피를 팔던 카페와 끽다점은 서양의 문물과 커피에 익숙하지 않던 조선인들에게 친절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914년 탑동에 신설한 탑동카페는 이러한 점을 감안하여 ‘조선인 본위로 영업을 하겠다’는 영업방침을 내세우며 영업을 개시하였다. 이 탑동카페는 성공적인 가게경영을 위해 청목당 주인이었던 久保田이라는 인물 이 경영을 맡았다(매일신보1914/06/07). 즉 조선에서 카페를 운영했던 주체는 조선인이 아닌 일본인들이었고, 자연스럽게 일본식 카페문화가 조선에 유입되었다.

1928년에는 일본에서 확산되던 카페 양식과는 구별되는 성격의 카페가 조선에서 문을 열었다. 1928년 9월 개업한 카페 카카듀는 기존의 끽다점이나 여급 중심의 일본식 카페와 달리 유럽의 살롱형 카페에 가까운 공간 구성과 분위기를 지닌 카페였다. 카카듀는 1940년대까지 ‘서울의 찻집의 원조요 찻집의 야릇한 풍속의 시초’라는 평가를 받았으며 사람들의 머릿속에 각인되었다(조선일보 1940/02/14). 이 카페는 당시 조선의 문인들이나 예술가들과 깊은 연관이 있는 공간이었다. 카페의 이름인 카카듀는 김진섭과 이선근이 정하였고, 정인섭의 주도로 가면을 사용한 실내장치와 조명이 돋보였다고 한다. 카페 주인이었던 영화감독 이경손은 턱시도를 입고 차를 날랐으며, 문인과 예술가, 기자들이 이 가게에 자주 들락거렸다. 이들은 모두 조선에서 카프(KAPF)의 결성 이후 등장한 해외문학파들이었다. 이들 중 김진섭은 호세이대학 영문과를, 이선근은 와세다대학 노문학을, 정인섭은 와세다 대학 영문과를 전공하였다.5 이들은 카프문학이 ‘억지로 두드려 맞춘 관념이거나 안이한 도식에 빠져 수준이 낮고 재미도 없으며, 민족문학도 복고적이거나 통속성의 냄새가 난다’며 비판하였다. 그 결과 이들을 중심으로 1926년 도쿄에서 외국문학연구회가 결성되었다(동아일보 1973/06/09). 카카듀는 이러한 해외문학파들과 연관이 있는 카페였다.

놀라운 것은 이 카카듀의 마담이 바로 현순의 딸인 현앨리스라는 사실이다. 지금까지 현앨리스의 1928년 1930년 6월까지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래서 이 시기를 현앨리스 인생 가운데 ‘우리가 찾지 못한 가장 큰 모자이크’라고 일컬어지기도 하였다(정병준 2015, 89).

1920년대 후반 현앨리스는 세계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바쁘게 움직였다. 이것은 그녀의 개인적인 사정들 때문이었다. 우선 그녀는 1922년 간사이 대학 전문부 법률과에 다니던 정범균(정준)과 결혼했다. 그러나 둘의 결혼생활은 행복하지 못했고, 1923년 무렵 현앨리스는 딸을 출산한 후 조선을 떠났다. 1926년 현앨리스는 다시 조선으로 돌아왔지만 결국 남편과 이혼했고, 자신의 딸을 두고 다시 조선을 떠나게 된다. 당시 현앨리스는 아들 정웰링턴을 임신한 상태였다. 그 후 그녀는 1927년 10월 6일 하와이 카우아이 섬에서 아들을 출산하였다. 1928년 정웰링턴을 안고 있는 현앨리스의 사진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볼 때 현앨리스는 1928년 초까지 하와이에 머물렀던 것 같다(정병준 2015, 62, 89). 그런데 알 수 없는 이유로 현앨리스는 1928년에 다시 조선으로 향했다.6

그녀는 조선에서 자신의 친척이자 유명한 영화감독인 이경손을 만나게 되었고, 그들은 함께 카페 카카듀를 운영해 나갔다. 이경손의 사촌누이인 이마리아가 현앨리스의 어머니였고, 현순 목사는 이경손의 사촌매형이었다. 따라서 이경손과 현앨리스는 당숙과 종질 간으로 5촌 사이였다(한상언 2020, 521).

카카듀를 운영하면서 현앨리스는 자신의 결혼 사실을 숨겼던 것 같다. 카페의 출입한 손님들은 그녀를 ‘미쓰 현’ 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조선일보 1940/02/14). 하와이에서 온 여성이 마담으로 있는 서양의 살롱풍 카페는 곧 예술인들의 집합소가 되었다. 1928년 9월 10일에는 외국문학연구회 동인들이 톨스토이 탄생 100주년 기념으로 톨스토이 관련 좌담회를 개최하였다(동아일보 1928/09/13). 또한 같은 해 9월 27일부터 28일까지 카카듀에서는 개점 피로연으로 예술 포스터 전람회를 개최했다. 이처럼 카페 카카듀는 일본화된 카페가 아닌 유럽풍의 카페가 재현된 조선의 카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당시 턱시도를 한 영화감독 이경손과 하와이에서 온 이국적 여성 현앨리스의 관계는 예술인들에게 많은 화제거리를 낳았다. 당시 예술가들은 현앨리스가 카페 카카듀에서 붉은 빛이 도는 나풀거리는 머리를 하고 있었다고 기억했다(조선일보 1940/02/14). 특히나 이경손이 현앨리스에 대한 시를 지으면서 그들의 관계는 더욱 주목받았다.7 이경손이 현앨리스를 생각하며 쓴 시는 다음과 같다.

호놀롤루의 달이여 아져수 숲사이로 들려오는 북소리를 듣는가? 바다의 물결은 고요히 흔들리고 기타소리에 젊은 사람들의 노래는 드높아만 가는데 이 밤에 집에서 잘 사람이 있던가? 언제나 한결같은 더위지만 이 밤은 웨 이 같이 시원하냐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춤을 추고 늙은이는 젊은이를 위하여 그들의 노래에 손벽장단을 치고 미쓰현아. 네 눈은 호놀롤루의 밤이다.

그는 이 시로 인해 ‘조선의 소극적 오스카 와일드’라고 불리기도 했다(조선일보 1940/02/14). 카카듀는 1929년 무렵 폐업을 한 것으로 보이는데, 1929년 이경손이 중국 상하이로 떠났기 때문이었다(김수남 1997, 15). 아마 현앨리스가 상하이로 간 것 또한 1929년 무렵이었을 것이다. 그 후 현앨리스는 상하이를 떠나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버렸다(정병준 2015, 90). 하지만 카카듀는 일본에서 확산되던 여급이나 주류 중심의 일본식 카페 운영 양식과는 구별되는 형태의 유럽 살롱풍 카페가 조선에서 구현된 공간이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카카듀의 뒤를 이어 경성에는 조선인들이 운영하는 많은 카페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조선에 카페가 처음 들어서기 시작했을 때 주로 일본인의 거주 지역이었던 남촌을 중심으로 카페들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1930년대 이후가 되면 조선인들이 거주하는 북촌으로까지 진출 하였다. 1930년까지 겨우 6개이던 북촌 카페는 1932년 봄에 이르면 17개까지 늘어났으며, 이 중 5곳은 조선인이 경영하였다(장유정 2008, 18). 우선 카카듀가 폐업한 이후 그 위상은 카페 멕시코가 이어받았다. 멕시코는 카카듀가 사라진 뒤 거의 유일한 종로의 카페이었으므로 문사, 예술가, 배우 등 문화인이 모이는 중심지였다(장유정 2008, 27). 하지만 결국 멕시코도 퇴폐적인 카페로 변하게 된다.

1934년 잡지 『삼천리』에는 喫茶店評判記라는 글이 게재되었는데, 이 글에서는 카페 멕시코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멕시코에는 崔承喜氏의 나체 舞踊 사진, 선정적인 극장 포스터 등이 걸려있었다. 이 글의 필자는 멕시코를 ‘배우 女給 기생이 가장 만히 출입하기로 유명한 멕시코!’라고 표현했다. 또한 ‘어엽분 거리의 천사인 妓生 아씨들이 흔히 몰내 맛나는 로-만스 만흔 곳으로 문을 열고 드러서면 甘美한 脂粉의 냄새가 코를 찌른다. 자극성이 만흔 화려한 곳’이라 하였다(삼천리 1934/05/01). 이처럼 조선인들의 문화 공간으로 시작되었던 카카듀 스타일의 카페는 결국 일본의 카페문화를 따라가게 되었다. 물론 거기에는 단순히 지성인들의 교류에 대한 욕구 외에도 퇴폐적인 욕구에 대한 수요 때문이기도 했다.

더구나 전면 벽은 전부 유리로 깔엇는 것이 이색이다. 이러케 鍾路大家를 엽헤 끼고 안젓느니 만치 이 집 독특히 인삼차나 마시면서 밧갓홀 내이다 보느라면 유리창 너머 페이부멘트 우로 여성들의 구두빨이 지나가는 것이 아름다운 그림을 바라보듯 사람을 황홀케 한다. 肉色 스톡킹으로 싼 가늘고 긴-각선미의 新女性의 다리 다리 다리-(삼천리 1934/05/01).

위의 글에서 볼 수 있듯이 카페를 찾는 사람들은 카페에서 여성들을 구경하는 것을 취미로 삼았다. 1935년 무렵에는 조선인이 경영하는 끽다점도 많이 늘었다. 대표적으로 멕시코 외에 뽄아미, 鍾路르릴, 로렐, 樂浪파로, 푸라터느, 쩨네바 등이 있었다.

그런데 茶를 마시러 가는 사람으로 말하면 茶를 마시러만 가는 것은 勿論아니다. 亦是社交室이고 또 休息室이다. 그만치 茶室의 室內裝飾, 레코-드 選擇, 써비스, 換氣裝置等에 注意해야할 것이다(개벽 1935/01/01).

결국 당시 카페를 이용하는 고객들은 커피를 마시고, 교류를 즐기면서도 이국적인 실내장식을 즐기고, 레코드를 듣고, 성적인 욕망을 충족하고자 카페를 찾았다. 카페는 이들의 수요에 맞게 점차 퇴폐적인 성격의 공간으로 변화해갔다.

이처럼 프랑스에서 시작된 카페는 일본에 유입되면서 여급으로 대표되는 카페의 일본화가 이루어졌다. 국권피탈 이후 조선으로 유입된 카페 또한 일본화된 카페문화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카페 카카듀와 같이 유럽풍의 카페 문화를 지향한 곳도 있었지만 곧 조선의 카페도 일본의 카페 문화를 따라가게 되었다.

Ⅲ. 일본과 조선에서 나타난 카페와 끽다점의 분화 양상

일본에서 카페가 커피를 마시고 토론을 하는 공간에서 술을 마시고 여객의 서비스를 받는 공간으로 무게중심이 이동하면서, 카페의 일본화가 이루어졌다. 앞서 언급했듯이 여급의 존재는 이러한 일본 카페의 가장 큰 특징이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 가운데 1922년에는 여러 카페의 여급들을 두고 일종의 인기투표가 이루어졌다.

제비처럼 가볍고 민첩한 여급사가 있어 우리에게 위안의 기쁨에 빠질 수 있게 해주고, 이것이 없으면 카페의 공기가 정미가 없다는 것을 잊지 못하겠으나 진실로 그들 여급사들은 카페의 중심화제가 되었고, 흥미의 핵심이며, 우리회사가 보았을 때 숨은 맛이 있어 인기를 불러 일으키는 여급사를 투표로 뽑아 그들의 생활이나 로맨스를 소개하여 카페의 新話題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으로 다음 규정에 따라 투표를 하고자 합니다.8)

이 대회를 주최한 『東京日日新聞』의 당시 기사를 보면 ‘제비처럼 가볍고 민첩한 여급사가 손님들에게 위안의 기쁨을 주며, 카페의 공기가 정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구체적인 투표 방식은 다음과 같다.

투표: 용지는 제한이 없으나 본지란 외에 끼워 넣은 용지를 사용할 것 (관제엽서는 어떤 종류든 허용)

수취인주소: 동경일일신문사 카페여급인기투표계

발표: 매일매일 신문에 전일의 투표수를 개인별로 게재한다.

마감: 최종 마감은 8월 말일로 하고 중간 마감 때는 그 시간 최고점자의 사진 및 로맨스를 소개한다.

상품: 최종 마감 시 최고점자에게는 상품을 수여하고 각 방면에서 기증받은 부상품을 준다(東京日日新聞 1922/07/22).

위의 대회 내용을 살펴보면 신문사는 카페 여급들이 매일 얻은 투표수를 공개하고 있으며, 최종마감시 최고점자의 사진뿐만 아니라 사적 영역인 로맨스까지 소개할 계획임을 밝히고 있다. 이처럼 여급은 ‘카페의 중심 화제가 되었고, 흥미의 핵심’이 되었다.

처음 카페 문화가 유입되면서 일본에서는 카페와 끽다점의 구분이 분명하지 않았으나, 1923년 관동대지진 이후 여급과 음주를 목적으로 하는 카페와 커피를 제공하는 문화공간으로서의 끽다점에 대한 구분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심지어 관동대지진 이후 카페의 숫자는 감소하는 반면 끽다점의 숫자는 점차 증가하는 추세를 보였다(林哲夫 2002, 215). 그 원인 중 하나는 카페에 대한 일본 경찰당국의 규제 강화였다. 1929년 일본에서는 카페에 관한 조사를 실시하여 2회의 조사보고서를 작성하였다. 또한 1933년 도쿄에서는 『カフェ―營業取締規則』을 마련하여 카페에 대한 명확한 정의를 내렸다.

본령에 의한 카페영업이라 불리는 것은 그 명칭의 여하를 불문하고 서양풍의 설비를 하고 음식물을 공급하는 여급을 두어 객석에 손님을 모시고 있게 하여 접대를 하는 것을 말한다(『동경부령』 제24호, 齊藤光 2020, 173에서 재인용).

그러면서 여급의 접대행위 금지, 카페의 개설지역 제한, 여급의 댄스 금지, 재즈 연주 금지, 세세한 영업 내용을 규제하였다(齊藤光 2020, 173). 카페에 대한 단속은 그 반대급부로 끽다점의 증가를 불러왔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1934년 1월 1일에 발행된 『昭和九年 東京百番附』라는 팜플렛에서는 동쪽에 끽다점을 서쪽에 카페의 점포 표기가 나타난다(齊藤光 2020, 172). 카페와 끽다점이 구분되어 표기된 것이다. 그리고 1935년 무렵에는 끽다점이 카페보다 훨씬 많아지게 되었다(표 1

표 1 1932~1935년 도쿄의 카페와 끽다점 수

년도카페끽다점
193213438
193312145
193410663
193562116

출처: "五条署管內のカフェ-と喫茶店 變遷" 『京都日出新聞』, 1935.12.21. 齊藤光. 2020, 175.에서 재인용

).9)

이처럼 다이쇼 초기부터 술을 마시고 여객의 서비스를 받는 공간으로 변질된 카페에서 벗어나 커피를 마시는 공간으로서 끽다점이 분화되었다. 일본식 카페의 ‘2단 변신’이 일어난 것이다(中村啓佑 1999, 119). 그러나 일본에서 조선으로 카페가 유입된 시점에는 일본에서조차 끽다점과 카페를 명확히 구별하지 않았다. 따라서 조선에서는 이러한 공간의 구별이 명확히 이루어지지 않은 채 카페 문화가 유입되었다.

특히나 1930년대 조선에서 여급으로 대표되는 일본의 카페문화는 크게 유행하였다.

향락주의자가 될 부와 교양과 환경의 문화가 부족하나 일본문학을 통해서 얻은 향락주의의 관념만은 흡수하여서 에로, 그로의 성전의 카페 출입을 하는 청년도 멫 십명은 될 것이다(이광수 1931).

이광수가 지적했듯이 일본에서 유입된 카페는 이제 ‘에로, 그로 성전이 되어버렸다’는 평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관동대지진 이후 카페와 끽다점이 분화되었던 일본과 달리 조선에서는 여전히 이 두 공간이 혼재되어 있었다.10)

조선에서 여급이라는 용어가 사용된 것도 일본의 카페업계의 분위기를 전하면서부터였다. 1926년 2월 28일자 『조선일보』에는 일본 廣島 시내 카페의 여급총동맹 소식을 전하면서 처음으로 여급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이 기사에서는 여급을 ‘아녀자 뽀이’, ‘레스추런드녀’ 등의 용어로 사용하고 있다(조선일보 1926/02/28). 그리고 점차 카페 여급의 존재는 카페를 방문하는 주요한 요소로 작동하게 되었다.

10錢짜리 白銅錢 한푼만 잇서도 「뿌라질」에서 온 「커피」에 兼하야 美人 「웨이트레스」까지 볼 수 잇는 「카페-」조차 업다면 서울의 젊은이들은 갓득이나 固塞하고 乾燥無味한 생활에 얼마나 더 寂寞을 늣길 것인가?(별건곤 1930/07/01).

위의 글에서도 볼 수 있듯이 카페는 커피와 더불어 ’미인의 웨이트레스까지 보는 것‘을 목적으로 가는 공간이었다. 그러나 점차 커피를 마신다는 목적보다는 여급들과의 퇴폐적인 유흥이 카페 방문의 주요 목적이 되었다.

카페! 카페는 술과 게집 그리고 엽기가 잠재하여 잇는 곳이다. … 젊은 남자! 그리고 어엽분 웨트레쓰는 서로 얼사안고 「마서라 먹어라」하며 술취한 붉은 얼골에 겨우 여지는 눈으로 서로서로 처다본다. 대체 카페란 그 곳을 찻는 者들은 엇던 者들이며 그들을 마저 상대해주는 웨트레쓰들은 엇더한 者들인가. 사교를 목적하고 가는 사람도 잇스며 한때의 메란코리-를 업시하려고 가는 사람도 잇겟지만 대개는 돈 잇는 사람들의 자제가 게집과 술을 어드려고 가는 것이다(삼천리 1932/09/01).

위의 글에서 볼 수 있듯 이제 커피와 카페의 관계는 멀어지고, 사교의 목적은 부수적인 것이 되었다. 카페를 방문하는 주요 목적은 ’술과 계집 그리고 엽기‘였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조선에서는 일본에서 사용되던 ‘끽다점’이라는 용어보다는 ‘다방’이라는 명칭이 신문과 잡지 등 당대 사료에서 보다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 즉 조선에서의 다방은 기능적으로 일본의 끽다점과 연속선상에 있었으나, 그 사회적 성격과 운영 방식의 변화로 인해 보다 포괄적인 명칭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카페 여급에 대한 관심과 수요가 더욱 증가하면서 다방과 카페는 더욱 구분하기 어려운 공간이 되어갔다.

그러나 자본주의 문화 성숙의 과정으로 보아 카페의 존재를 부인하지 못한다.…여름의 무성한 나무 그늘 더운 공기와 홍진을 잊은 녹음 속에 정좌하여 한잔 시원한 음료수는 목을 적시고, 명상의 세계를 걸어보고 겨울이면 바람 없는 조용한 양지짝한 更구석 붉은 난로 옆에 따듯한 한 컵의 커피가 얼마나 한 보온을 가지게 할 것인다? 그리고 늦은 밤 거리에 외롭고 무거운 다리의 피곤을 잊게 하는 홍차!-이러한 휴식소에 다리를 쉬이는 행인들에게는 시끄러운 파리떼는 大금물이다. 다만 더위와 추위를 잊게 하는 환대만이 가득 차 있으면 그것으로 족하다. 밝은 등불 깨끗한 테이블, 담색의 높직한 벽, 그리고 단조를 잊게 하는 고아한 레코드-이것만으로 가장 안락한 가로의 휴식소가 된 것이다. 그래서 카페의 다점화가 어디만큼 현대인의 명랑한 생활에 좋은 그림자를 던져 주도록 하면 좋을 것이다(동방평론 1932).

위의 글에도 1930년대 카페의 분위기를 설명하고 있지만 이 글에서 묘사하는 카페는 다방의 모습과 큰 차이가 없다. 이 글의 저자가 인식한 카페라는 공간은 계절에 상관없이 커피를 마시며 음악을 듣는 거리의 휴식소이자 끽다점과 같은 장소였다. 하지만 동시에 ‘카페의 다점화가 필요하다’는 말 자체가 카페와 다점의 경계가 모호했던 당시 조선의 현실 상황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카페와 다방은 사회적 인식의 측면에서는 구분되었지만 실제 운영에서는 경계가 흐릿했다.

카페와 끽다점의 구분이 불명확했다는 것은 당시 카페를 비판한 조 선인의 글에서도 나타난다.

카페 문제에 대하여는 나는 그곳이 어떤 곳인지 확실한 개념조차 없습니다마는 대체로 그곳에는 아리따운 여자들이 있어서 이것이 한 특색이 되어 보통술집과 구별이 되는 것 같아 보입니다(조선중앙일보 1932/01/01).

이처럼 카페에 대한 명확한 개념 구분이 없었기에, 카페와 끽다점, 다방은 혼용되어 사용되었다.

불란서 파리에 카페(다방)이 생긴지 금년으로 이백오십년의 된다. 그리하야 문사를 중심하야 다방 이백오십주년 기념제를 거행할 계획중이라고 한다(조선일보 1939/03/14).

위의 기사를 보면 파리의 카페를 다방으로 표기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카페와 다방의 구분은 명확히 이루어지지 않은 채 1930년대 말까지 혼재된 양상이 이어졌다.

근자에는 낮이면 양식꾼과 밤이면 술꾼등살에 통히 발을 끊다시피 했다.…대개 양주는 곁들여 팔곤하니 여삼아 한편구석에서 남이 볼까 조심하면서 한두잔 마신다거나 또 레몬, 스카슈에 위스키 한잔쯤 부어서 마마시는것쯤 그다지 흉한 짓은 아니겠지만 정종[도꾸리]가 삼엄한 탁자 사이에 간장과 스루메 접시를 놓고 앉아 취흥이 자못 높아 소녀웨이터 더러 술을 치라고 꾸중꾸중하는 광경은 실로 송구스러 볼 수가 없다(채만식 1939, 109-110).

위의 글은 다방을 묘사한 채만식의 글이다. 채만식이 1939년에 발표한 이 글에서도 다방과 카페가 구분되지 않는 모습이 보인다. 일제의 단속으로 인해 낮이면 건전한 다방을 운영하더라고 밤에는 술을 판매 하는 방식으로 다방이 운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다방에는 여전히 소녀웨이터와 같은 여급이 고객들에게 술을 따르고 있었다.

많은 배우들 및 문화예술가와 윤보선, 조병옥 등이 자주 방문했던 다방 비너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비너스의 주인이었던 복혜숙은 광복 후 자신의 회고에서 영화인들의 요구에 의해 양주와 오징어 같은 안주도 팔았다고 이야기하고 있다(동아일보 1981/05/12). 1939년 6월 5일 밤에는 본정경찰서에서 카페, 바, 다방에 대한 일체단속이 이루어졌다. 이때 경찰의 발표에 따르면 본정과 명치정 일대의 카페와 바 단속을 했는데, ‘카페인지 바인지 차집인지 전연분간 할 수 없는 곳이 대부분이었다’고 한다(동아일보 1939/06/07). 이때 다방 36곳을 조사하였지만 13곳이 ‘아무 계출없이 끽다양이라 불리는 여급을 고용하고 있었다’고 한다(조선일보 1939/06/07).

반면 조선의 지식인들이나 학생들은 카페와 다방을 구분하여 인식하려고 하였다. 1938년 조선일보 주도로 연희전문학교, 이화전문학교, 보성전문학교 등 전문학생들이 모여 학생 좌담회를 개최하였다. 여기서 연희전문학교 학생이던 정광현은 카페와 다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실은 바나 카페를 못가니까 가는 거에요. 바나 카페를 못 가니깐 갈 데가 있어도 할 수 없이 다집에라도 가는 겝니다. 다방은 아무런 뜻도 이야기도 없고 그저 거리에 놓인 아름다운 휴게소입니다. 거기에서 한 잔의 홍차를 마시고 앉았으면 제법 머릿속이 시원해지니까요(조선일보 1938/10/31).

이처럼 다방은 카페와 바의 대안 공간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카페와 바에 대한 수요는 여전했고, 그 수요의 일부를 다방은 대신 충족시킬 수밖에 없었다. 또한 학생들은 카페와 다방은 다른 공간임을 강조하 며 다방은 휴게소로서의 성격을 가진다고 인식하였다. 그럼에도 조선에서는 다방의 점포수와 다방에 대한 선호는 카페를 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1930년대와 1940년대의 카페영업에 대한 경성상공회의소의 조사에서 카페와 끽다점(다방)을 구분하여 조사하고 있지 않은 점도 이러한 현실을 반영한 것으로 추정된다(김연희 2002, 17, 22).

일본과 달리 조선에서 끽다점이 카페를 압도하지 못한 양상은 당시 조선 사회의 사회경제적 조건과 관련지어 살펴볼 필요가 있다.11) 우선 다방은 예술가, 문학가를 비롯해 중상류계층이 주로 이용하는 공간이었다. 당시 커피 한 잔의 가격은 대략 10전 정도였는데, 이는 식민지 조선인들에게는 상당히 부담스러운 가격이었다. 더군다나 커피의 가격은 수입제한으로 인해 1930년대 후반 대략 3할 정도가 올랐다고 한다(조선일보 1937/09/25).

카페를 이용할 수 있는 중상류층의 규모에서도 도쿄와 경성은 큰 차이를 보였다. 1931년 『경성부세일반』에 나타난 경성 내 공무 및 자유업으로 분류된 인구는 총 53,248명이었다(京城府 1931, 5). 반면 1년 전인 1930년 도쿄의 공무 및 자유업으로 분류된 인구는 이미 132,066명에 달하였다(桐村喬 2019, 192). 즉 1930년대 초 도쿄에서는 이미 경성의 3배에 가까운 중상류층이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회경제적 조건의 차이는 두 지역에서 카페와 끽다점이 형성·운영되는 방식, 나아가 그 분화의 양상에 서로 다른 조건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와 더불어 경성에서 중상류층으로 분류될 수 있는 사무직 종사자 들의 소득 수준을 살펴보는 것은 이들이 실제로 카페 이용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경제적 여건을 구체적으로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 표 2

표 2 1936~1944년 경성의 남성 사무직 일급 (단위: 원)

년도관공리교원회사원백화점원은행원
19360.50.550.650.570.90
19370.50.550.650.570.90
19380.50.560.750.650.95
19390.50.560.750.801.05
19400.50.570.750.801.10
19410.50.650.901.051.36
194211.201.101.051.44
194311.301.101.251.86
194411.301.101.251.99

출처: 김낙년 외 2018.

는 1930년대 후반부터 경성의 남성 사무직원의 일급이다.

표 2에 따르면 당시 경성의 중상류층이라 할 수 있는 사무직들이 받은 일급이 1930년대 후반에는 0.5~1.05원, 1940년대 이후에는 0.5~1.99원 정도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10전~13전이면 1936년 중상층 일급의 대략 1/5에서 1/9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음료 한 잔의 가격으로는 상당히 부담스러운 가격이었다.12) 경성의 사무직 종사자조차 이러한 경제적 제약을 안고 있었다면, 노동자를 비롯한 하층계급에게 카페는 더욱 접근하기 어려운 공간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던 농민과 도시 하층민, 노동자의 생활수준은 커피 한잔은 고사하고 생존을 유지하는 데 집중되어 있었다(허수열 2016, 292).

또한 일제강점기 조선 내 민간소비지출의 성장률은 총지출의 성장률보다 낮았고, 1인당 실질소비지출의 연평균 증가율은 1% 정도로 추계된다. 그 중에서도 의복비, 교통통신비, 가정 기구 등의 지출이 빠르게 증가하였다(이헌창 2021, 414). 이러한 경제적 조건 속에서 조선의 카페는 커피 판매만으로 안정적인 수익을 확보하기 어려웠으며, 제한된 고객층을 상대로 다양한 서비스 제공을 통해 영업을 유지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로 인해 조선의 카페는 일본에서와 같은 방식으로 커피 소비를 중심으로 한 끽다점으로 분화되기보다는, 커피·주류·여급 서비스가 결합된 형태로 운영되는 경향을 보였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은 당시의 신문기사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1927년 『조선일보』에서는 당시 카페의 흥행 요인을 커피나 음식이 아니라 여급의 존재에서 찾고 있다.

근래의 카페는 물질본위는 결코 아니다. 그곳은 누구나 아는 바와 같이 미인본위이다. 얼굴딱지가 좀 얌전하고 분깨나 좀 바르고 한 여급이 있는 곳은 점점발전하고 그렇지 못한 곳은 망해버리고야 만다.…카페에 가서 미인구경겸 음식포복으로써 아주 경제적으로 노는 세상이니까 또 카페 여하인이라고 하면 기생이나 매음부보다가는 일반이 좀 고상하게 생각하는 까닭에 연애전문가들도 카페에서 카페로 돌아다니며 미인탐방을 하는 까닭에 각 카페점이 상이한 듯이 미인 본위를 아니 삼을 수도 없을 것이다(조선일보 1927/10/13).

즉 커피를 소비할 수 있는 중상류층이 많지 않은 조선의 상황에서 커피 판매만으로 영업을 유지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다시 말해 조선에서 카페는 경제적 제약 속에서 커피 판매만으로는 유지되기 어려운 영업 구조를 보완하기 위해 다양한 서비스가 결합된 공간이었다. 심지어 커피 가격의 상승은 커피를 즐겨 마시는 중상류계층에게도 부담을 배가시켰고, 이들이 커피소비를 목적으로 카페를 방문하는 것을 기피하게 만들었다.

지난날 헐하게 마실 수 있던 커피도 마음 놓고 한잔 마시기가 거북해질 것이며 꾹 참아 두었다가 그 돈으로 돌아가는 길에 소고기를 사서 두부찌개에 넣어 먹을 생각이 날 것입니다. 천하의 차당을 위하여는 슬픈 일입니다(조선일보 1937/09/25).

위 기사에도 언급했듯이 커피 가격 상승으로 사람들은 차라리 ’소고기를 사서 두부찌개에 넣어 먹는 것‘이 더 낫다고 할 정도였다. 차당들에게조차도 커피 가격은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이처럼 일본 본국과 식민지 조선 사이의 경제적 조건과 소비 기반의 차이는 카페와 다방 문화의 성격 형성에 일정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13)

Ⅳ. 일본과 조선 카페의 특성과 사회적 기능

카페가 근대인들의 일상에서 중요한 의미와 기능을 가진 공간이었던만큼, 카페 문화는 일본과 한국의 소설, 수필, 잡지, 신문 등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재현되었다. 다음은 카페에서의 경험담을 쓴 森苿莉[모리 마리]의 글이다.

얼마 안 있어 운반되어 온 커피잔을 나의 아버지가 우유와 설탕을 넣고 곧 입에 대셨다. 커피가 처음인 나는 아버지에게 우유나 설탕을 넣었기 때문에 맛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아버지는 “마츠리, 뜨거워.”라고 말할 틈도 없었다. 그러자 손이 미끌어져 뜨거운 커피가 가슴에 쏟아졌다14).

이처럼 일본에서 카페는 가족이 함께 음료를 마시는 공간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저자는 카페에서 아버지와 함께 처음 커피를 마신 경험을 묘사하고 있다. 다음 글은 1924년경 도쿄의 카페 분위기를 잘 묘사하고 있다.

동생 精二는 『물의 주변(水のほとり)』이라는 저서에 서명을 하고, 그 카페에 뭐라고 불리는 아름다운 웨이트리스에게 주었다고 한다. 내가 카페에 발이 멀어진 것은 결국 내가 이제 청년이 아니기 시작하였다는 증거일지도 모르겠다. 실제 지금의 카페는 청년의 집합소가 되어버렸다. 피곤한 사람이 한 잔의 커피에 휴식을 찾기 위한 설비는 없으며, 청년은 점점 원기를 되찾으며, 미각과 청각, 시각도 혹은 그 이상의 관념적인 만족을 구하기 위해, 자극의 강렬한 오락장이 된 기분이 든다15).

위의 수필을 보면 1920년대 도쿄의 카페에 대한 필자의 경험담과 감상이 나타나 있다. 당시 카페의 한 청년은 자신이 지은 책을 웨이트리스에게 주었다. 필자는 그 장면을 보면서 ‘지금의 카페가 청년의 집합소가 되었다’고 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피곤한 사람이 한 잔의 커피에 휴식을 찾기 위한 설비는 없으나’, 최근의 카페에서 ‘청년은 점점 원기를 되찾으며, 미각과 청각, 시각도 혹은 그 이상의 관념적인 만족을 구하기 위해, 자극의 강렬한 오락장’이 되어버렸다고 평하고 있다.

그렇다고 카페에서 휴식과 연애만 한 것은 아니었다. 1920년대 카페는 처음 카페를 만든 취지대로 학술적 토론의 장이기도 하였다. 植草甚一[우에쿠사 신이치]은 「東京に喫茶店があった頃」라는 글에서, ‘돔이라는 식당 겸 카페의 끽다실에서 학생들이 강사를 초빙하여 문학좌담회를 열었다’고 회상하거나 ‘건축과 교수가 학생 5인을 데리고 끽다점에서 커피를 마셨다’고 서술하였다(植草甚一 2023, 80-81).

카페와 끽다점이 분화하면서 이 두 공간을 다루는 작가들의 글에서도 카페와 끽다점의 분위기에는 차이가 난다. 끽다점이 문학좌담회를 하는 장소이거나 또는 교수와 학생이 함께 시간을 보내는 장소였던 반면 일본의 카페는 유흥의 공간이었다. 근대 일본의 탐미주의 작가 谷崎潤一郎[타니자키 준이치로] 작품 『치인의 사랑(癡人の愛)』에서 주인공 조지도 카페에서 아내가 될 여자 나오미를 데려온다(谷崎潤一郎 2018). 작품 속 나오미가 서양인과 흡사한 외모와 서구적 감수성을 체화한 인물로 그려지듯, 그녀가 일하는 공간으로 설정된 카페 역시 근대적·서구적 분위기를 상징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여성작가 林芙美子[하야시 후미코]는 그의 자전적 소설 『방랑기』에서 카페라는 공간을 재현하였다. 그녀는 직접 카페의 여급으로도 일한 적이 있었다. 소설 속 林芙美子는 글을 쓰면서 생계를 위해 여러 가지 일에 종사한다. 그러나 그녀는 ‘카페 여급은 다시 하지 않겠다’ 결심하면서도 극심한 생활고로 인해 다시 카페의 여급으로 나서기도 한다. 거기서 그녀는 카페 손님에게 ‘지금 매춘부 사러 가는 길인데, 사실 난 네가 더 마음에 들어 어때?’ 와 같은 성희롱을 당하기도 한다(林芙美子 2015, 78). 또한 그녀의 소설 속 카페는 기생집을 가기 전 남자 직공들이 들러 커틀릿 등의 음식과 열 몇 병의 술을 마시는 공간이었다(林芙美子 2015, 375). 그녀는 카페 여급으로서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그날 밤 카페 테이블 위에서 꽃같은 얼굴이 울었다. 뭐라고 나무 위에서 까마귀가 운다고 밤은 괴롭다. 두 손으로 감싼 내 얼굴은 녹색의 분 때문에 지쳐 열두시 시ꗳ바늘을 잡아당기고 있었다(林芙美子 2015, 221).

또한 그녀는 다른 시에서 카페 여급의 심정을 ‘킹 오브 킹스를 열잔만 마셔주면 나는 당신에게 키스를 한번 해줄게요. 아아 가련한 여급이여.’라고 표현하기도 하였다(林芙美子 2015, 232). 이처럼 카페는 끽다점과는 다른 유흥공간으로 변했고, 林芙美子는 그런 카페의 모습을 자신의 소설에서 사실적으로 묘사하였다.

그렇다면 당시 근대 조선인들은 카페에서 무엇을 하였을까? 카페와 끽다점의 문화가 조선에 유입되면서 조선인들도 일본인들과 비슷한 목적으로 카페를 찾았다. 가장 먼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역시 커피를 비롯해 음료를 마시는 것이다. 夢甫라는 필명을 가진 인물은 『동아일보』에 여러 차에 대한 자신의 감상평을 투고하였다. 여기에는 당시 조선인들이 즐겨 마셨던 음료와 간식에 대한 설명이 있다.

양식에는 언제든지 홍차가 맛있소. 늘다녀 그 솜씨를 잘 알고 있는 끽다점외에는 커피차를 마신 일이 없소. 차와 케익을 맛보고 싶을 때면 나는 언제든 코코아와 슈크림을 취하오. 첫사랑의 맛을 잘알고 있는 나 칼피스를 먹을 마음이 생기지 않소. 왠일인지 나는 파피스, 세피스, 오아피스 –피스가 붙은 음료를 의식적으로 취하지 않소. 조달수도 산미가 강함으로 그리 애호하지 않소. 보리차는 나는 아이스크림과 함께 이 음료를 애용하오(동아일보 1930/03/25).

이 기사를 통해 보면 당시 조선인들은 카페에서 커피 외에도 코코아, 슈크림, 보리차, 아이스크림 등을 먹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일본의 음료인 칼피스 또한 카페에서 판매하고 있었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서도 주인공 구보가 중학시대의 열등생을 만나 카페로 들어가 음료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밝히기도 한다.

그는 주문 들으러 온 소녀에게 나는 가루삐스(칼피스), 그리고 구보를 향하여 자네두 그걸로 하지. 그러나 구보는 거의 황급하게 고개를 흔들고 나는 홍차나 커피로 하지. 음료 칼피스를 구보는,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은 외설한 색채를 갖는다. 또 그 맛은 결코 그의 미각에 맞지 않았다. 구보는 차를 마시며 문득 끽다점에서 사람들이 취하는 음료를 가져, 그들의 성격, 교양, 취미를 어느정도까지는 알 수 있을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여 본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그네들의 그때, 그때의 기분조차 표현하고 있을게다(박태원 2012, 54-55).

이 글들을 종합해 보면 커피나 홍차는 조선인들의 취향에 맞았지만 일본에서 만들어진 칼피스에 대해서는 그리 선호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본 카페문화의 유입으로 당시 조선인들은 카페의 정체성과 카페에서 파는 음식에 대해서도 혼란스러워하기도 하였다.

일본 사람들의 풍속을 배운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요사이 시내 각처의 카페집과 같은 음식점이 갈수록 점점 수효가 늘어간다는데, 음식점도 아니요 색주가도 아니요 파는 음식물은 일본요리도 아니요, 청요리도 아니요, 조선요리도 아니, 이름도 알 수 없는 것을 팔며…(조선일보 1927/05/19).

위의 글에 따르면 필자는 카페에 대해 ‘일본 사람들의 풍속을 배운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카페가 증가하고 있으며, 음식점도 아니고 술집도 아닌데, 일본요리나 청요리, 조선요리도 아닌 음식을 판다며 카페의 성격에 대해 의문을 표하고 있었다. 카페는 그 출처와 국적도 애매한 공간으로 조선인에게 다가온 근대 공간이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카페는 만남과 사교의 장소였다. 앞서 살펴본 카카듀에 예술가들이 모였던 것 외에도 카페는 근대 조선인들이 가볍게 사람을 만나고 일상을 공유하는 공간이었다. 당시 카페의 분위기는 박태준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 잘 표현되어 있다.

오후 두시 일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그곳 등의자에 앉아 차를 마시고, 담배를 태우고, 이야기를 하고, 또 레코드를 들었다. 그들은 거의 다 젊은이들이었고, 그리고 그 젊은이들은 그 젊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자기네들은 인생에 필요한 것같이 느꼈다. 그들의 눈은 그 광선이 부족하고 또 불균등한 속에서 쉴사이 없이 제각각의 우울과 고달픔을 하소연한다(박태원 2012, 38).

카페에서 사람들은 차를 마시고 담배를 태우고, 이야기를 하고 음악을 들었다. 하지만 박태준이 구보의 시선을 통해 바라본 당시 카페는 우울과 고달픔을 하소연하는 공간이었다. 또한 카페는 조선인들에게 휴식과 위안, 현실도피 공간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당시 카페를 자주 이용했던 채만식도 그러한 자신의 심상을 글로 남겼다.

머리와 몸이 피로하기 쉬운 우리 도시이다. 오피스로부터 풀려 나오 는 길이라도 좋다. 볼일로 줄창 돌아다니던 길이라도 좋다. 혹은 아스팔트를 거닐러 나왔던 길이거나 영화를 보고 나오던 길이라도 좋다. 아무튼지 피로를 느낄 때 길옆 거기 어디 다방을 찾아 들어서면 우선 푹식한 쿠숀이 있어서 앉을자리가 편안하다. 기호에 따라 향긋한 홍차던지 쌉쌀한 커피던지 또는 갈증에 좋은 청량음료라던지, 이편이 청하는 대로 대령을 한다.…이마침 다방이란 두루두루 편하고 緊하고 그래서 현대 도시인에게는 끔찍이 고마운 물건이긴한데…(채만식 1939, 109-110).

채만식이 위의 글에서 언급한 것처럼 부르주아 계층의 조선인들에게 카페와 다방은 휴식의 공간이면서, ‘두루두루 편하고 緊하고 그래서 현대 도시인에게는 끔찍이 고마운 물건’이었다.

문학가 이상도 제비라는 이름의 카페를 열었다. 이 카페는 사방의 흰 벽에 남쪽에는 바둑판 모양의 창틀이 있고, 동쪽에는 커다란 초상화가 걸려있는 카페였다. 이상은 온천에서 만난 금홍이라는 기생과 함께 이 카페를 운영했다고 한다(김시현 외 2021, 220-221). 이상이 제비를 통해 추구하고자 한 카페의 모습은 자신의 소설 날개에도 등장한다.

서글프다. 그러나 내게는 이 서글픈 분위기가 거리의 티룸들의 그 거추장스러운 분위기보다는 절실하고 마음에 들었다(이상 2017, 84).

날개 속 주인공 ‘나’는 집을 나와 시간을 보낼 장소로 경성의 티룸을 선택한다. 그곳에서 주인공은 자신을 아는 사람이 없는 공간에서 익명성의 편안함을 느끼지만 동시에 서글픔을 느낀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거리 티룸들의 분위기를 거추장스럽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마 이상은 자신이 묘사한 경성역의 티룸과 같은 공간을 제비에서 구현하고자 했을 것이다.

반면 이상이 거추장스럽다고 느낀 카페의 분위기를 모던하다고 느끼고 애용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카페를 예찬하는 다음 글에서도 그러 한 조선인들의 감상을 읽을 수 있다.

집에라고 가야 별것이 업다. 재미는커녕 을쓰년스러워 드러갈 수부터 업다. 조고만 셋방에 늙으신 어머님 어린애들이 뒤법석을 치고 게다가 그리 탐탁지 안은 고생주머니 안해가 잇고…김치 냄새가 후더분한 신선치 못한 방안의 공기와 합해서 야릇하게 불유쾌한 냄새가 코를 지르는 그 속에 화로에서 보글보글 끌코 잇는 된장찌개-이런 것을 생각하면 그만 질색이 나서 발길이 도라선 것이다. 차ㅅ집! 이것은 우리의게 현대의 감각을 자극식히는 매개장이 아니야. 이만한 데만 와도 훨신 명랑한 긔분을 맛보는 소득이 잇다(별건곤 1934/01/01).

여기서는 시각, 미각, 후각 등 다양한 이미지를 사용해 자신의 일상을 묘사하고 있다. 늙으신 어머님, 뒤법석을 치는 아이들, 고생주머니 아내가 있고, 조선의 음식인 김치와 된장찌개의 냄새는 고단하면서도 전근대적인 일상을 의미한다. 반면 찻집(카페)는 이러한 이미지와 대조되어 ‘현대적인 감각’과 위안을 제공하는 근대적 이미지로 재현된다.

그럼에도 카페의 퇴폐적인 문화는 카페에 대한 고객들의 수요를 불러오는 요인 중 하나였다. 이러한 카페와 끽다점이 조선에 유입되면서 조선인들도 이들 공간을 주목하였다. 특히 당시 식민지 조선인들은 카페의 퇴폐적인 문화가 일본을 통해 유입되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敆吠(카페)라 하는 것은 구주에 있어서는 오랜 역사를 가졌다한다.… 그(카페-필자)에 대한 사고적 고찰과 지식은 빈약함으로 해설키 어려우나 빈틈없이 만세일계라하는 대일본제국에 수입케 됨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직후 즉 명치 39년에서 명치40년경이라 한다. 그러면 우리 경성에 경영케 됨은 언제인가 하면 아마 지금부터 4,5년전이라고 생각한다. 혹은 그 이전 희소하게도 있었다 하더라도 지금이라도 그러하지만은 가페다운 가페는 하나도 없을 것이다(조선일보 1927/10/12).

이 글은 카페에 대한 1920년대 후반 카페에 대한 조선인들의 인식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준다. 우선 이 기사의 필자는 카페를 ‘敆吠’로 표기하며 이것이 유럽에서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청일전쟁 무렵 카페가 유입되었고, 1927년까지 유럽에서 의미하는 진정한 의미의 카페는 없다는 것이다. 1935년 유진오가 발표한 소설 『김강사와 T 교수』에서도 김강사와 T 교수는 함께 세르팡이라는 차집에 들어간다. 그런데 이들은 이 차집에서 홍차를 마신 후 함께 위스키를 마신다. 또한 이 차집에는 ‘「카운타」에 앉은 매물스럽게 된 여자’가 고객을 응대하는 것으로 봐서 이 가게 또한 카페와 끽다점(다방)의 성격이 혼재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삼천리 1935/03/01).

하지만 카페는 동시에 새로운 사회를 구상하고, 투쟁과 저항을 위한 준비를 하는 공공의 장으로서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우선 3.1운동 시기에 일본에 거주했던 임규는 일본의 카페 中村屋에서 독립만세 운동을 위한 준비를 하기도 하였다.

문: 피고가 금번 조선 독립운동을 한 전말을 말하라.

답: 본월(1919년) 3월 23, 24일경 전부터 잘 알고 있는 최린이 오라고 하여 나는 동인 집에 간즉 동인은 금번 천도교가 조선 독립운동을 계획하고 있는데 그 방법으로서 독립선언서를 작성하여 3월 1일 발표하려면 내각과 귀·중양원에 청원서를 내지 않으면 안되겠으니 그대가 그 문서를 작성하여 달라고 하기에 나는 그 일에 찬성하여 청원서 작성을 승낙하였다.…그 후 동인은 그 서면을 일본에 가지고 가야되겠는데, 그대가 가지고 가달라고 하므로 나는 승낙하고 동 청원서에 독립선언서 일통씩을 첨부하여 가지고 2월 27일 오후 7시 열차로 경성을 떠나 3월 1일 오후 4시 3분 동경에 도착하였다. 나는 숙옥에서 숙박하다가는 관헌에 잡힐 염려가 있어 中村이라는 과자집에 나의 여식이 있으므로 동인 집에 가서 숙박하고 3월 2일에 동 서류를 내각과 귀·중양원에 제출하려고 하였다.…

문: 피고는 다수한 서류를 가지고 가지 않았는가

답: 그렇다. 동인은 청원서를 백통이상 등사판에 인쇄하여 각 신문사 동경제국대학 기타 지명의 대의사 또는 조선인에 대하여 동정을 가진 학자중에 吉野박사, 阿部, 磯村 등에게 3월 5일 우편으로 부쳤다.

문: 그것은 어디서 등사로 인쇄를 하였는가

답: 2월 25일 26일경 나의 집에서 인쇄하였고 그 후 일이 발각될까 염려하여 곧 파괴하였다(이병헌 1959, 715-716).

임규의 진술에 따르면 임규는 최린의 부탁을 받고 일본 각 기관과 인사들에게 독립선언서를 전달하는 임무를 받았다. 그는 3월 1일에 도쿄에 도착했지만 원래 머물던 숙옥은 관헌에게 체포될 염려가 있어 당시 끽다점으로 운영되던 中村(屋)에 머물렀다. 그가 등사를 한 공간으로 지목한 ‘나의 집’은 이 中村屋을 의미하는 듯 하다. 크림빵이 구워지고 카레가 요리되는 가게에서 독립 선언 배포를 위한 준비가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최민지 2024, 186).

1920년~1930년대에 일본의 끽다점은 사회주의자들의 회합 장소로 다시 한번 주목을 받는다. 1930년 9월 일명 ‘조선공산당 일본총국 사건’이 발생한다. 1929년 1월 인정식, 김계림, 이병순은 비밀리에 고려공산청년회일본부호총 야체이카 회의를 개최한다. 인정식은 1929년 3월 東京府 豊多摩郡 落合町에서 일본에서 활동 중이던 사회주의자들을 규합하여 야체이카를 구성하였다. 1929년 6월 박득용과 이원형 등은 고려공산청년회 일본부의 재일본조선청년동맹동경지부 사무소 부근의 끽다점에서 비밀리에 프락숀 회의를 개최하고 박득용이 청년동맹본부 특파원으로 오사카에서 활동하는 문제에 대하여 협의하였다(조선일보 1930/09/12; 1930/09/13).

이와 유사하게 1936년 7월에는 일본에서 한일 사회주의자들로 구성된 극좌문화단체 콤아카데미가 일본 경찰당국에 의해 적발되었다. 이 들은 시국 신문, 문예 잡지 등을 이용하여 공산당 재조직을 도모하였다는 혐의로 체포되었다. 이 단체는 공산당중앙위원 岩田義道[이와타 요시미치], 野呂榮太郞[노로 에이타로]의 지도하에 대학교수 등 여러 지식인들로 구성된 단체였다. 이들 단체에는 조선인 張文環, 金斗鎔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早稻田 鷄卷町59의 끽다점 山茶子를 아지트로 삼고 사회주의 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카페에서 여급을 사회주의자로 포섭하는 사건도 발생하였다. 사회주의자 박용칠은 경성중앙고보 5학년 때 광주학생 항일운동에 연루되어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개월 집행유예 4년을 받고 퇴학당하였다. 그 후 그는 도쿄로 가 明治大學 예과에 입학하였다. 明治大學 재학시절 박용칠은 반제국주의동맹에 가입하였고, 明治大學 예과 책임자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1933년 5월 그는 明治大學同志會의 간사가 되어 공산청년회명치대학세포기관 책임자 長谷川豐大郞[하세가와 도요타로]과 연락하여 적기우회 무산청년우회를 조직하여 활동하던 중 검거되었다. 그는 매우 잘생긴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고 하는데 취조 중 밝혀진 바로, 그는 여러 카페를 돌아다니며 여급들에게 사회주의 사상을 선전하고 다녔다고 한다. 그의 사상에 동화되어 카페 銀猫의 神山優子[가미야마 유코] 외 2명과 소극장 배우 최영자 등이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였다고 한다(조선일보 1933/12/05).

조선에서도 카페는 사회주의자들과 깊이 연관된 장소였다. 1933년 카페 낙원회관에서 일하던 여급 전령란이라는 여성 사회주의자가 종로경찰서에 체포되기도 하였다. 매우 궁핍한 가정형편 속에서 자란 전령란은 어머니와 동생을 위해 카페에 출근하였다. 그녀는 사상서적을 탐독하여 적색여급이란 평판까지 들었다고 한다(조선일보 1933/08/02). 그녀가 일한 낙원카페는 1931년 일본인 中野道가 인사동 조선극장 위에 개업한 카페였다(매일신보 1931/05/25).

1935년 사회주의 운동가 이재유와 경성제국대학 교수 三宅鹿之助[미야케 시카노스케]에 의해 주도된 조공재건사건에서도 카페가 등장한다. 조공재건동맹은 노동, 학생 등 각 분야의 인물들을 포섭하여 조공재건동맹을 결성하였다. 이 중 학생들의 포섭 임무를 맡은 임택제는 7월에는 경성부 종로 이정목의 카페 뽄아미에서 정룡산과 회합하여 반제활동을 공모하였다(동아일보 1935/08/30; 조선일보 1935/11/19). 이들이 회합한 카페 뽄아미는 대구의 청년 부호가 독일 유학 후 개업한 곳이다. 주인은 두 세번 바뀌었으나, 비싼 의자와 탁자를 두었고, 화가들도 많이 모여 개인전도 가끔 열렸다. ‘일광을 잘 못 받아 백주에도 전등을 켜야 한다’는 것을 보면 이 카페가 어두운 편이었기에 이들이 회합 장소로 선정된 것이 아닌가 한다(삼천리 1934/05/01). 근대문화와 도시 소비문화의 상징과도 같은 카페에서 사회주의자들이 회합하여 사회주의운동 방향을 구상하였다는 것 또한 아이러니한 부분이 없지 않다. 그러나 오히려 카페의 이러한 점이 일제의 감시를 피하는 전략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사례들은 1920~1930년대 카페가 단순한 음료 소비 공간에 그치지 않고 사회주의자들이 비교적 은밀하게 접촉하고 조직 활동을 전개할 수 있는 도시 공간으로 기능했음을 보여준다. 특히 카페는 일상적 소비 공간이라는 외양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정치적 회합 장소로서의 성격이 외부에 쉽게 드러나지 않는 장점을 지니고 있었다. 이와 같은 사례들은 카페와 끽다점이 일정한 기능으로 고정된 공간이 아니라, 각 사회의 정치적 상황과 도시 환경 속에서 다양한 용도로 활용될 수 있었던 다층적인 근대 공간이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당시 여러 매체에서 재현된 카페는 커피를 비롯한 음료를 마시는 공간이자 타인과 소통하는 장소였고, 한편으로는 여급의 서비스를 즐기는 유흥공간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카페는 동시에 독립운동이나 사회주의 운동과 같은 저항과 변혁을 위한 공모 장소의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Ⅴ. 결론

프랑스에서 탄생한 카페(Cafe)는 근대 시기 일본에 유입되었다. 일본 최초의 커피 전문점은 可否茶館이었으며, 이후 ‘카페(カフェー)’라는 명칭을 공식적으로 사용한 최초의 가게는 1911년 4월 개점한 카페 프란탄(カフェー・プランタン)이었다. 같은 해 8월에는 카페 라이온(カフェー・ライオン)이 개업하였는데, 이곳은 화가와 문인, 예술가, 신문기자 등 문화예술계 인사들의 출입이 빈번하였으며, 미인의 여종업원을 고용한 최초의 카페로 알려져 있다. 아울러 일본 내 커피 문화의 확산에 결정적 역할을 한 카페로는 카페 파울리스타를 들 수 있다. 한편, 일본에서는 카페 외에도 끽다점이 커피 판매점으로 기능하였다. 그러나 당시 카페와 끽다점은 모두 커피뿐만 아니라 주류와 서양 음식을 함께 제공하였으며, 이들 영업점은 일본 고유의 전통적 공간이라기보다 서양식 문화가 유입되어 형성된 장소였다는 점에서 상호 간의 구분은 명확하지 않았다.

당시 일본에서 유행하던 카페 문화는 조선에도 유입되었다. 조선에서 처음으로 ‘끽다점’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가게가 영업을 시작한 것은 1908년이었다. 1908년 10월 25일자 황성신문에 小澤愼太郞[오자와 신타로]라는 인물의 끽다점이 대한의원 낙성식 물품 기증자 명단에 등장한다. 또한 조선에서 최초로 ‘카페’라는 명칭을 쓴 가게는 1911년 남대문통 3정목에 문을 연 카페 타이거(カフェー-タイガー)였다. 일본인이 주도한 카페들과는 다르게 1928년 개업한 카페 카카듀는 일본화된 카페가 아닌 유럽풍의 카페가 재현된 조선의 카페였다. 카카듀는 영화감독 이경손이 운영한 카페였으며, 해외문학파들이 자주 방문하였다. 더군다나 하와이에서 온 현앨리스가 마담으로 있어, 이경손과 현앨리스의 관계에 대해 많은 화제거리를 낳았다. 이처럼 프랑스에서 시작된 카페는 일본에 유입되면서 여급으로 대표되는 카페의 일본화가 이루어졌다. 국권피탈 이후 조선으로 유입된 카페 또한 이러한 일본풍의 카페문화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카페 카카듀와 같이 유럽풍의 카페문화를 지향한 곳도 있었지만 곧 조선의 카페도 일본의 카페 문화를 따라가게 되었다.

카페가 일본사회에 정착하면서 카페의 일본화가 진행되었고, 1935년에는 일본 내 끽다점이 카페보다 훨씬 많아지게 되었다. 일본에서는 다이쇼 초기부터 술을 마시고 여객의 서비스를 받는 공간으로 변질된 카페에서 벗어나 커피를 마시는 공간으로서 끽다점이 분화되었다. 일본식 카페의 ‘2단 변신’이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일본에서 조선으로 카페가 유입된 시점에는 일본에서조차 끽다점과 카페를 명확히 구별하지 않았다. 따라서 조선에서는 이러한 공간의 구별이 명확히 이루어지지 않은 채 카페 문화가 유입되었다. 1930년대 조선에서는 여급으로 대표되는 일본의 카페문화가 크게 유행하였다. 조선에서 카페와 다방은 사회적 인식의 측면에서는 구분되었지만 실제 운영에서는 경계가 흐릿했다. 일본 본국과 식민지 조선 사이의 경제적 조건과 소비 기반의 차이는 카페와 다방 문화의 성격 형성에 일정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식민지 조선은 일본으로부터 카페 문화가 이식되었음에도, 일본 본국과는 달리 순수한 문화 공간인 끽다점을 운영할 수 없었다. 이에 따라 조선에서는 실제 운영면에서 카페와 끽다점이 구분되지 못하였다.

한편 근대 카페는 일본과 조선에서 다양한 성격과 사회적 기능을 지닌 공간이었다. 1920년대 초중반 일본에서 카페는 가족이 함께 음료를 마시는 공간이었으며, 학술적 토론의 장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카페와 끽다점이 분화된 후 카페는 퇴폐의 공간으로 변질되었다. 그리고 카페의 퇴폐성을 형성하는 핵심 요소에는 여급의 존재와 여급에 대한 남성들의 성적욕구가 있었다. 관동대지진 이후 카페와 끽다점이 구분된 일본과 다르게 조선에서는 카페와 끽다점(다방)이 혼재되어 있었다. 조선인들은 카페에서 커피를 비롯한 음료를 마시기도 하였고, 카페를 타인과 교류하는 공간으로서 활용하였다. 당시 조선에서 카페는 ‘현대적인 감각’과 위안을 제공하는 근대적 이미지로 재현된다. 반면 카페의 퇴폐적인 문화 역시 카페에 대한 수요를 불러일으키는 주요한 요인이었다. 그렇지만 카페는 동시에 새로운 사회를 구상하며 실질적인 준비를 하는 비밀 공간이자, 투쟁과 저항을 위한 모의하는 공공의 장으로서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카페는 독립운동의 공간이자 사회주의자들의 공모장소, 사회주의사상의 전파공간으로서 활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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